이곳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메타포로 배우는 곳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셔서 네이버 카페 / 소풍교회 배움터 / 로 가시면 기독교강요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을 눌러 보세요.
기독교 강요 4부 20장 : 투표함(성도의 올바른 시민생활)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
||||||
[성경본문] 로마서13:1-7절 개역개정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6.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오늘은 제 4부 20장입니다. 기독교 강요 마지막 장이지요. 이 장에서는 시민 정부의 역할과 그리스도인의 시민적 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영적인 나라인 교회와 세상의 나라인 국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쉽게 말해 누구의 통치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을 ‘투표함’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투표함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투표함은 국민 모두가 참여하여 나라 일을 결정하게 해주는 기적의 상자입니다. 투표함에서 국회의원이 나고 대통령도 납니다. 새 헌법이 나기도 하지요. 투표제도의 역사는 오래 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도시국가에서 이미 사용했었지요. 그러나 투표권은 근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어 왔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투표함은 민주주의 정치의 상징이요 또 국가 통치 행위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원칙을 따라 정치를 하고, 시민생활을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는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 통치이지요. 우리의 속 사람, 즉 영혼과 영생에 관계된 통치입니다. 또 하나는 국가 통치입니다. 우리의 외면적 생활, 즉 시민 생활의 정의와 외적 도덕성만을 다루는 통치입니다. 이 두개의 영역은 서로 밀접히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야만인들(재세례파)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국가 제도를 무시하고 무너뜨리려고 날뜁니다. 또, 어떤 아첨꾼들(마키아벨리 등)은 군주의 권력을 과장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해독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의 순수한 믿음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국가 제도를 주신 이유를 알면 알수록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건에도 불이 붙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충만해 질 것입니다. 우선 두 통치의 관계를 말하려면 서로 다른 점부터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 둘은 서로 성질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어리석게 혼동하면 안됩니다. 어떤 자들은 미련하게도 복음이 주는 자유를 세상의 집권자들이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전혀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 몸 없는 영혼을 꿈꾸며, 현세 없는 내세를 꿈꾸는 것과도 같습니다. 몸과 영혼, 그리고 현세와 내세는 완벽하게 공존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세상의 초보적인 제도에서 찾으며 거기에 한정하려는 것은 유대적인 망상입니다. 성질이 전혀 다르지만 그리스도의 왕국과 세상 나라는 서로 완벽하게 공존합니다. 따라서 몸으로는 세상의 제도나 권세 아래 철저히 묶여 있는 신자라도 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완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서는 여전히 종의 처지에 있는 신자들에게 이제 다시는 ‘(영적으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갈5:1; 고전7:21; 갈3:28; 골3:11). 우리의 몸과 영의 동거만큼이나 신비한 공존이지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 두 통치는 서로를 반대하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조합니다. 영적 통치는 이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이미 하늘 나라가 시작되게 만들고, 이 죽을 생명 속에 영원불멸의 복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국가 통치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지켜주며, 우리를 사회생활에 적응하게 해주며, 우리의 행위가 사회 정의에 맞도록 이끌어 주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고 평화를 유지하고 증진시키게 해줍니다. 어떤 자들은 그런 국가 통치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교회만이 통치하는 완벽한 사회를 주장하지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의 ‘나그네’라고 부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는 사회의 악행을 억제해주는 세상 통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국가 통치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권력으로서 꼭 필요합니다. 따라서 정부를 폐지하려는 행위는 야만적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역할과 위치는 그런 것들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즉 정부는 우상숭배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훼방, 그리고 그 밖에 종교에 대한 공공연한 방해가 사회에 발생하거나 만연하지 않도록 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시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며, 정직과 겸양의 덕을 보존케 합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공개적으로 마음껏 종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어 사회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나 경건에 대해 멋대로 법을 제정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된 참 종교를 노골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부에는 세 부분이 있습니다. 즉, 법의 수호자인 집권자와, 집권자가 통치할 때 표준으로 삼는 법과, 그 통치를 받으며 집권자에게 복종하는 국민입니다. 차례로 하나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집권자에 대해서입니다. 집권자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권세가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못 박고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행자를 칭찬하며 악행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한다고 말합니다(롬13:1-4; 잠 8:15-16). 따라서 정권(政權)은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무정부를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인간이 짚 속의 쥐처럼 혼란하게 살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현재의 상태는 그들의 주장처럼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정부 상태를 악으로 인정합니다(삿21:25). 이사야는 열왕이 교회의 양부가 되며 왕비들이 교회의 유모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사49:23). 특히 바울은 왕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교회에 부탁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2:2).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긴 것 아닙니까? 당연히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그런 임무를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렘48:10; 신1:16; 대하19:6-7).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은 자신에게 책임감과 동시에 큰 위로를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정부의 형태가 가장 좋을까요? 그 문제에 대한 답은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왕국이 전제국으로 타락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의 정치가 소수인의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더 쉽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지배가 난동으로 타락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나는 귀족정치, 또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를 결합한 제도가 다른 형태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임금 한 사람보다는 여러 사람이 정국을 운영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고 보다 견딜만 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자유를 적절한 절제로서 조절하고 견고한 기초 위에 바르게 확립하는 정치제도가 가장 좋다고 봅니다. 하여튼 집권자는 자유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여러 나라에 여러 종류의 정부 형태를 주셔서 각각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지혜롭게 배정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집권자들은 율법의 두 돌판 모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즉, 그들의 직책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과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일 모두에 대해 책임지는 직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권자는 나라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한 종교가 융성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호하며 높이는 데 힘써야 합니다. 또한 상벌을 바르게 시행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정치 조직은 상벌에 의해서 유지되며 상벌을 제거하면 도시들의 규율은 붕괴되고 소멸된다’라고 한 솔론(Solon)의 말처럼 매우 중요합니다. 정의(justice)는 무죄한 사람들을 지켜주며 ,감싸주며, 보호하며, 변호하며,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평(judgement)은 담대한 악인들을 막고 그 폭행을 억압하며 그 비행을 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권자들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집권자들이 휘두르는 그 칼이나 채찍이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대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히려 칭찬 받을 만한 일이며 경건한 것입니다(롬13:4). 폭력과 심판은 다르지요. 마땅히 심판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죄이고 직무유기입니다(잠20:26; 24:24; 25:4-5; 딤후2:15 참조). 어떤 이의 말처럼, 지배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불행이지만, 무슨 일이든지 하게 하는 것은 더 큰 불행이라고 한 말이 참으로 맞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에게는 그런 칼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만, 왕에게는 주셨습니다(눅22:25-26). 그러므로 집권자는 경건하면서 동시에 피를 흘릴 수도 있습니다(출32:27-28; 왕상2:5-6; 시45:7). 뿐만 아니라 왕과 국민은 공적인 보복을 위해서 무기를 들어야 합니다. 국가를 부정하는 재세례파는 당연히 전쟁까지도 부정하지만(슐라이트하임 신조 4,6조), 왕은 합법적인 전쟁을 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해야 합니다. 몇 사람을 해친 강도를 처벌할 권리가 있다면, 한 나라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강도들을 가만 놓아둘 수 있습니까? 집권자는 나라 안의 악행을 무력으로 억제할 뿐 아니라, 자국의 영토가 적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전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재세례파 사람들은 영적 왕국 건설을 위해 주신 성경 말씀들을 지상 왕들에게 적용 시키려 합니다. 그러니 헷갈릴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무력을 행사할 때는 항상 조심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감정을 잃거나 증오심에 사로잡혀 무자비하게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기에 호소하기 전에 모든 방법을 찾아 봐야 합니다. 무력 사용은 일부러 기회를 찾는 것은 물론, 필요하지 않으면 주어진 기회도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권자는 절대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되고 항상 국민의 유익을 생각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끝으로 군주에게 드리는 공물(貢物)과 세금에 대해 첨가하고 싶습니다. 그것들은 군주들의 합법적인 수입이며, 그것으로 그들은 주로 공무의 공적 경비에 사용하고, 또한 자신들의 호화로운 가정 생활에도 사용합니다. 저들의 그런 화려한 생활은 그들이 갖고 있는 권위의 위엄에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다윗이나, 히스기야, 여호사밧, 요셉, 다니엘 등도 경건을 해치지 않고서도 공공경비를 그렇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군주들 편에서는 항상 그들의 수입이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재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13:6). 그리고 그것은 국민의 피와 같은 물질이므로 이유 없이 과세하는 것은 곧 착취요, 세금을 낭비하는 것은 잔혹한 범죄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법률과 소송절차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무엇어야 할까요? 이제 법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키케로는 플라톤을 따라 법률은 나라의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는 법은 말 없는 집권자요 집권자는 살아 있는 법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법은 국가의 가장 튼튼한 힘줄입니다. 그러면 어떤 법이 가장 좋을까요? 우선 모세의 율법을 봅니다. 그것은 도덕에 관한 법, 의식에 관한 법, 그리고 재판에 관한 법으로 구별됩니다. 의식법이나 재판법은 폐지 되었지만, 도덕법은 변하거나 폐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덕법은 다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부분과 우리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부분으로 나누입니다. 세상 나라들의 모든 헌법은 그 도덕법이 규정해주는 공정성을 목표로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말씀하는 공정성이 모든 나라 법의 목표와 표준과 한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형태가 다르다는 것은 별 문제가 못 됩니다. 예를 들어, 모든 법이 다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질과 위증을 처벌하지만 그 처벌 방법은 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다양한 법으로 다양한 사회를 적절하게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집권자들이나 관리들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저들에게 소송을 할 수 있습니다(행25:10-11; 16:37; 22:11,25).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법정에서는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레19:18; 마5:39; 롬12:19; 12:17). 거짓말은 물론 과도한 투쟁욕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모든 소송을 죄악시 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고전6:5-8). 바울은 미친듯이 소송을 좋아 하는 마음은 책망하지만 소송을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법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언제든지 자기의 권리를 양보하겠다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손해가 너무 클 때라든지, 사랑을 잃지 않고서도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법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번엔 불의한 통치자에게 복종할 때와 불복종할 때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집권자에게 큰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를 필요악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꺼이 순종할만한 집권자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왕을 공경하라는 베드로의 명령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벧전2:17). 바울도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롬13:5). 우리가 집권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복종의 의무들을 수행함으로써 우리의 복종심을 실증해야 합니다( 롬13:1-2; 딛3:1; 벧전2:13-14; 딤전2:1-2). 사람들이 집권자에게 항거하면 하나님은 자신이 모욕을 받으신 것처럼 그들을 위해 중벌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시민 개인은 집권자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공적인 일에 간섭하거나 집권자의 직무를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부의 규정을 개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소란을 일으키거나 스스로 손 댈 것이 아니라 집권자에게 맡겨 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의한 집권자에게도 복종해야 할까요? 집권자 중에는 집권자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형상도 찾아 볼 수 없고, 권선징악의 직무에 불충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자들을 지배자라고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자들일지라도 그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단2:21,37; 4:17; 5:18-19; 삼상8:11-17; 렘27:5-8,17). 불의하고 무능한 지배자들은 곧 하나님이 그 땅 위에 내리시는 진노와 심판입니다(욥34:30; 호13:11; 사3:4; 신28:29). 세상의 모든 재난과 마찬가지로 악한 왕도 하나님의 저주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기들을 포로로 잡아 간 왕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렘29:7). 함께 평안하고 그 가운데서 번영하기 위해서이지요. 다윗은 불의한 사울이라도 그 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삼상26:9-11). 그러므로 우리는 지배자의 인물을 보지 말고, 그의 신성한 직위를 보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뜻밖의 사람들을 통해서 폭군들을 제거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권능과 섭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폭군을 제거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자들은 두 종류입니다. 모세나 사사들처럼 하나님의 합법적인 소명에 의해서 더 큰 힘을 받아 열등한 힘을 굴복 시키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직 자기들의 야심과 악행을 수행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섭리로 그렇게 인도되어 하나님의 사업을 실행하는 경우입니다. 세상 군주들은 과거 역사에 수 없이 반복되어 온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떨어야 합니다. 그런데 군주들의 폭정을 막기 위해 헌법으로 임명된 관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된 것입니다. 아첨만 하지 말고 자기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나는 왕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종에는 항상 한가지 예외가 있어야 합니다. 예외라기 보다는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직 주 안에서만 그들에게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집권자들의 명령이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명령을 조금도 존경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위엄이나 영광도 전혀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 집권자들의 명령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경건에서 벗어나게 한다거나 만왕의 왕에 대한 복종을 손상 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 왕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들에게 권위를 주신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집권자는 이미 자격을 잃었습니다. 존경 대신 그 머리에 침을 뱉아야 합니다(호5:11; 행5:29; 고전7:2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가 되고 싶어 하시고, 내 삶의 통치자요, 내 삶의 온전한 주권자가 되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국가든 공동체든 거기에 우리를 넣어 놓으시고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 하신 것은 우리 인생의 통치자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라는 요구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질서 있고 또 열정적인 시민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부나 관리들은 사회의 평안과 번영을 위하는 동시에 교회의 안전과 활동과 행복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하루하루 삶의 끊임없는 생로병사,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허덕이는 삶 속에서 평안을 얻고 싶으십니까? 기쁨을 얻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주권을 돌려드리십시오. 삶의 주권을 쥐고 계지 마십시오. 넘겨드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오늘도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고스란히 이양해 드리며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