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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9장 : 가장 행렬(로마교회의 거짓 성레들)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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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계시록22:18-19절 개역개정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오늘은 제 4부 19장입니다. 로마 교회의 거짓 성례에 대한 비판이지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성례는 단 두 가지입니다. 세례와 성만찬이지요. 그러나 로마 교회는 일곱 성례라고 주장합니다. 세례와 성만찬도 성경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교리를 만들었지만, 여기에 더해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 등 다섯 가지 성례를 덧붙였습니다. 그것은 성경에도 없는 엉터리 성례이지요. 그것을 ‘가장 행렬’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가장(假裝)’이란 말은 거짓으로 꾸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장 행렬은 꾸민 모습이나 가면을 쓰고 줄 지어 걷는 것이지요. 행동도 목소리도 꼭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의 것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가짜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달리는 행렬을 가장 행렬이라고 합니다. 로마 교회의 7성례는 바로 가장 행렬입니다. 로마 교회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세례와 성만찬에 다섯개의 성례를 더했습니다. 1439년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7성례가 선언된 것입니다. 성례가 아닌데, 다섯 개를 더 만들어서 성례의 가면을 만들어 씌워서 성례의 행렬에 동참시킨 것이지요. 그 선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법에는 7성례가 있다. 즉 세례, 견진. 성만찬. 고해성사, 종부성사, 신품성사, 혼배성사 등이다. 이 가운데 처음의 다섯 가지는 개인의 내적이고 영적인 완전을 위해 정해진 것이며 나머지 뒤의 두 개는 전 교회의 통치와 양적 증가를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이 일곱도 알고 보면 열 셋이 됩니다. 성례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성례가 아닌 가짜 의식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의 참 성례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성례에는 항상 말씀이 앞서 갑니다. 성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날인하는 도장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무 물질이나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도장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를 이런 비천한 물질 속에 숨긴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런 목적을 위해 예정하시고 그렇게 만드시기 전에는 그것들로 하나님의 약속을 날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대 성례를 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카톨릭 안에서는 지금까지 ‘일곱 성례(성사)’라는 말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가 곧 ‘성례’라는 단순한 정의를 미신적으로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곱 가지 성례를 모두 성령의 그릇, 의를 부여하는 기구, 은혜를 얻는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구원과 은혜의 수단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신약 교회에 주신 성례는 간단하고 단순하고 쉬운 것으로서 세례와 주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뿐이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처럼 오직 두 개의 성례만 갖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예식들이 다 성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행7:60; 9:40; 20:36; 21:5; 26:14; 딤전2:8; 시63:4; 88:9). 또 고대 교부들의 글에서도 ‘일곱’이라는 숫자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이 ‘성례’라는 말을 아주 자유롭게, 폭넓게 사용했지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표징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항상 세례와 성찬의 두 가지로 만족했습니다. 다른 데서는 불필요할 정도로 숫자에 관심이 많은 어거스틴조차도 성례에 관한 한 ‘일곱’이란 숫자를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한번 가면을 벗겨 봅니다. 첫째 가면:견진례 견진례는 ‘아주 확고하게 해주는 성례’라는 뜻입니다. 고대 교회의 관습을 보면 유아 세례를 받은 믿음의 자녀들이 소년기 말이나 청년기 초에 감독에게 일정한 교리문답 형식에 의해 심사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인 세례자들에게 요구되는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이 행위 자체가 이미 중요하고 거룩했지만 더욱 존중하는 의미에서 안수하는 의식을 첨가했습니다. 교황 레오는 이단에서 세례 받은 자에게도 다시 세례를 주지 말고, 다만 감독의 안수로 성령을 받게 하라고 말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수가 성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도 분명하게 단정합니다. ‘안수는 기도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덧 붙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가장 위대한 은사며, 사랑이 없으면 다른 모든 거룩한 것이 있을지라도 구원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 사랑의 유대를 위해서 바르게 돌아선 이단자들에게 안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수는 축복 형식에 불과 합니다. 성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한계를 지킬 수 있다면 그런 안수 의식은 회복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견진례를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고 견진례는 은혜를 얻는 수단이요, 덕을 위한 것이다. 세례는 중생해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고 견진례는 전투 준비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물로 세례를 받은 후 다시 주교에게서 기름을 바르고 안수를 받아 성령을 받아야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러한 로마 교회의 주장은 파렴치하고 미친 소리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님이 제정하신 세례에 포함된 약속들을 자기들이 만들어낸 견진례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견진례를 통해 주겠다는 은혜와 유익들은 이미 세례에 다 포함된 것입니다(갈3:27). 누가의 기록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 중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행8:16).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 누가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겠습니까(롬10:9-10;마10:20)? 다만 저들이 안수로 성령을 받았다는 뜻은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것처럼 성령의 나타내 보이는 힘과 눈에 보이는 은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견진례는 세례의 약속을 도적질합니다. 다음 둘째 이유는 그것이 사도는 물론 수많은 순교자들을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견진례의 기름을 구경조차 못했던 그들은 완성에서는 거리가 멀었던 자들이 됩니다. 또 셋째 이유는 성례의 가치를 도나투스파처럼 집행자의 가치에 따라 정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세례는 일반 사제에게 맡기지만, 견진례는 주교에게만 맡깁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는 왜 한 편지에서 그것을 일반 장로(사제)들에게 맡겼을까요? 머리에 뿌리는 물보다 신체의 더 존귀한 부분인 이마에 바르는 기름이 더 값지기 때문이라는 저들의 주장은 정말 어처구니 없습니다. 둘째 가면:고해 성사 고대 교회는 키프리아누스의 표현처럼 ‘평화의 수여식’이라는 안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공적인 회개에 있어서 회개의 과정을 다 이행한 사람을 안수로 화해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안수식은 죄를 용서하는 표징이었고, 이 표징에 의해서 죄인 자신은 용서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섰으며, 교회는 그로 말미암아 그에 대한 죄의 기억을 말소하고 친절하게 그를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이 때 항상, 장로가 아니라 감독의 권위로 안수합니다. 제2차, 3차 칼타고 회의와 오랑주 회의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이 공적인 회개 의식이 사적인 회개 의식으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고해성사이지요. 아무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또 하나의 조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 가짜 의식을 ‘파선 후의 둘째 판자’라고 부르는데, 세례에서 받은 결백의 옷을 죄로 더럽히면 다시 고해에 의해서 세탁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정말 참람한 것입니다. 그것은 세례가 죄에 의해서 말소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세례를 고해성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세례는 충심으로 회개할 때마다 은혜를 주신다는 보장의 인(印)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의 효과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었을 때마다 우리는 세례 받은 것을 회상해서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내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세례에 대한 그 기억은 주님께 죄를 고백할 때마다 세례에 약속된 죄의 용서를 받으리라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견고하게 해줍니다. 복음서의 기자가 무엇이라고 증거 합니까? ‘요한은---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라고 말합니다(막1:4; 눅3:3).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기에 충분합니다. 다시 고해성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셋째 가면:종부 성사 종부성사(終傅聖事)는 야고보서5:14-15을 오해한 것입니다. 종부성사는 주교가 성별해준 기름을 사제가 임종하는 사람에게 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힘, 즉 죄를 용서하며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하는 힘이 있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면서 이 성례는 야고보가 제정했다고 말합니다. 정말일까요? 물론 사도들이 병든 자에게 기름을 사용한 것은 사실입니다(막6:13). 그러나 주님과 사도들은 병을 고칠 때 아주 자유로웠습니다(요9:6;마9:29;눅18:42;행19:12). 기름을 사용하는 것이 일정화된 예식은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기름을 사용한 것을 성례로 만들 수 있다면 성경에 있는 다른 치유 상징들도 다 성례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요9:7; 행20:10). 그러면 사도들이 가끔 왜 기름을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무지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치유의 위대한 권능이 사도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성령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려는 것이었지요. 기름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상징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상식이 아닙니까(시45:7)? 그리고 사도들을 통해 권능으로 나타내신 병 고치는 은사는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병을 고쳐주시는 은혜가 소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그것은 일시적 은사였다는 말입니다. 그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함께 주님에 의해 한동안 사용되었지만, 새로운 복음이 선포된 후에는 복음만이 영원한 놀라움이 되게 하기 위해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사도들에게는 기름 부음이 하나의 성례였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금의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권능을 나누어 주는 사명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에게 주셨던 치유의 은사는 주의 섭리와, 사람들의 배은망덕도 한 원인이 되어 일찍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적도 없고, 아무 약속도 없는 기름 부음을 성령의 권능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성령을 중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비둘기처럼 나타났다고 해서 모든 비둘기를 다 성령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마3:16; 요1:32). 더군다나 주교가 기름을 성별하기 위해 아홉번 무릎 꿇어 인사하는 것은 푸닥거리와 같습니다. 그리고 로마 교회가 기름을 그렇게 사용하려면 야고보에게서 바로 배워야 합니다. 야고보는 죽는 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병든 자들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왜 고치려 하지 않고 죽이려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치유의 권능을 나타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무 권능도 없이 사도들처럼 기름을 사용하겠다는 것은 사기가 아니겠습니까? 넷째 가면:신품 성사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신품(神品) 즉 성직계급을 말하며 그것을 ‘성사’라고 부릅니다. 성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신권(神權)과 은총을 부여 하는 성사이지요. 그 일곱 신품은 수문품(守門品:교회의 출입문을 관리하고 성찬식 도중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 강경품(講經品:미사 중 성경을 낭독하는 책임을 맡는 직무), 구마품(驅魔品:악령을 쫓아내는 구마(Exorcism)를 행하는 직무), 시종품(侍從品:성찬식 중에 사제나 부제에게 보조하며, 미사 중 제단에서 촛불을 관리하거나 제단에서의 다른 의식을 보조하는 직무), 차부제품(次副祭品:사제와 부제 사이의 중간 계급으로, 사제의 역할을 보조하며 미사 중 성작과 성반을 관리하는 역할), 부제품(副祭品:성경 읽기, 세례 집전, 결혼 주례, 장례 집전 등을 할 수 있는 직무), 그리고 사제품(司祭品:사제는 미사를 집전하고, 성찬례를 거행하며, 고해성사를 주관하는 등 성례를 집전하는 중요한 직무) 등입니다. 이 일곱 계급은 성령의 일곱 가지 은혜에 해당하며, 승진할 때마다 그 은혜를 받는다고 까지 말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에게서도 그 일곱 직분을 찾아냅니다(문지기-요2:15;10:7, 강경사-눅4:17, 구마사-막7:32-33, 시종-요8:12, 차부제-요13:4-5, 부제-마26:26, 사제-마27:50;엡5:2). 어떻게 이런 말들을 웃지 않고 할 수 있을까요? 하긴 너무 기가 막혀 웃음도 잘 안 나옵니다. 그들은 굉장히 찬란하고 엄숙한 의식으로 강경사와 성가대원, 문지기와 시종, 그리고 구마사 등을 임명해서 각 직책을 위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낮은 계급의 직분자들은 자기들의 직책을 전혀 수행하지 않습니다. 불쌍한 소년들이나 몇 명의 평신도에게 다 떠 맡깁니다. 같은 성직 계급이라 하면서도 이 낮은 계급들은 철저히 외면 당합니다. 또 이들의 의식을 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머리 꼭대기를 깍아서 왕적 위엄을 나타내게 합니다. 성직자는 자신과 타인들을 지배할 왕이기 때문이랍니다. 성경은 신자 모두가 제사장이라고 하지만(벧전2:9), 그들은 자기들만 독점하려고 합니다. 저들은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저들이 흉내내는 바울의 서원과 삭발은 경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행18:18; 고전9:20).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없는 의식에 미신적인 신비를 덮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예식때 문지기들은 열쇠를 받고, 강경사들은 성경을, 구마사는 학습 교인들과 귀신든 자에게 사용할 주문을, 시종들은 초와 병을, 부제는 기도서와 영대(領帶)를, 차부제는 성작과 성반, 물이 든 병, 기도서와 기타 폐물 등을 받고, 그리고 사제는 성체를 담은 성반과 축성하는 권한의 표로 두 손에 기름을 바릅니다. 그리고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또 이들은 장로와 사제를 같은 뜻으로 쓰며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미 앞장에서 공부한 것처럼 그것은 가증스런 거짓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그것을 완전히 폐지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전파’하며, 감사와 찬미와 선행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도유식은 할례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차라리 기름보다는 피를 뿌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부제가 과연 초대교회의 집사직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옛날에는 빈민 구제를 맡았던 차부제들은 또 어떻습니까? 아무튼 우리는 아무 약속도 없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적이 없는 이런 너절한 것들을 성례 혹은 성사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다섯째 가면:혼인 성사 이제 마지막 성사, 혼인성사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지만(창2:21-24; 마19:4이하), 그레고리우스 시대까지 그것을 성사로 집행한 것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결혼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의 표징이라고말 하면서 에베소서5:28을 그 근거로 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유로 하신 말씀이지요. 만약 성경의 비유를 다 성사로 만든다면 교회는 성사들로 꽉 찰 것입니다(마13:31; 마13:13; 사42:13; 요15:5). 그리고 로마 교회는 그 말씀을 잘 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실현된 영적 연합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적 혼인에 적용하면 안됩니다. 바울도 그런 오해를 피하려고 본문에서 바로 그 점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엡5:32.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리고 그들은 ‘비밀’이란 말은 ‘성례’라고 번역해 놓고는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비교. 딤전3:9. 엡1:9; 3:3,9). 또 저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거룩하다고 강조해 놓은 결혼을 곧 돌아서서 육정과 부패와 육적인 추악이라고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사제들을 그 성사에서 제외시킵니다. 어떤 변명으로도 해결 할 수 없는 모순 아닙니까? 또한 혼인에 관한 여러 가지 제한과 규정들도 역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혼인을 성례로 제정하시거나 특별한 약속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씩 가면을 벗기고 그 본래 얼굴을 보니 어떻습니까? 진짜 성례는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제정하신 증거가 확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 것들에 성례의 가면을 씌우고 성례의 행렬에 동참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성례는 오직 세례와 성만찬 뿐입니다. 기독교는 잡스러운 예식을 만들어서 그 예식에 각종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구원을 얻고 은혜를 누린다고 하는 것은 율법에 사로잡혀 있던 유대인들의 풍습이나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다 가장행렬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세례에 담긴 약속과 은혜, 성찬에 담긴 은혜와 풍성한 복을 누리면서 세상을 이기고 악한 사탄의 미혹을 이기면 신앙 생활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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