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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8장 : 식중독(부패한 로마 교회의 미사)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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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0:11-14절 개역개정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오늘은 제 4부 18장입니다. 로마 교회의 미사 교리에 대한 비판이지요. 로마 교회는 미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성찬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미사는 성체(성찬례 중에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믿는 교리)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죄 사함과 영적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칼빈은 미사 교리가 단번에, 영원히 모든 죄를 충분하고도 완전히 속죄한 그리스도의 속죄 죄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식중독’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식중독은 부패한 음식을 잘못 먹어 생기는 질병이지요. 세균성, 자연독성, 화학성 식중독 등으로 나눕니다. 세균성이 가장 흔하지만 치사율은 가장 낮습니다. 그러나 복어중독, 독버섯 등으로 인한 자연독성 식중독은 흔하지는 않지만 가장 위험합니다. 세균성 식중독은 감염형과 독소형이 있습니다. 주요 증상으로는 발열,구토,복통,설사인데 감염형은 독소형과는 달리 발열이 많이 나타나고 온 몸의 나른 함이나,오한 등도 잘 나타납니다. 세균성 식중독은 대부분 수일 내에 증세가 가벼워지고 회복되지만, 보툴리누스균 식중독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카톨릭의 미사는 부패하고 변질된 성찬입니다. 거룩한 음식이 더러운 균과 치명적인 독에 오염된 것입니다. 미사로 말미암아 수많은 영혼들이 치명적인 영적 식중독에 걸립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은혜를 잃고 죽어 갑니다. 왜 그럴까요? 사탄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빼앗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희미하게 만들거나 약간 변질 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말살해 버리려고 했지요. 결국 사탄은 그 거룩한 음식에 사악한 교리를 주입시켜 ‘미사’라는 괴악한 음식을 만들었고, 그 음모가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습니다. 사탄의 사주를 받은 로마교회의 미사 교리를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예물로 드리는 사제들과, 그 봉헌에 참여하는 신도는 그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 그리고 미사는 참여자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키는 속죄의 희생 제물이다.’ 또한 로마교회는 미사를 산자 뿐 아니라 죽은 자들을 위한 보속의 제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가 미사를 통해 그 때마다 실제로 재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사 교리는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성만찬을 부패한 식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선 미사는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는 사제들을 제사장으로 지정함으로써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그 영예로운 특권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옛날 레위의 제사장들은 죽음 때문에 승계가 필요했습니다(히7:23).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음의 장애물과 상관 없으시기 때문에 누구에게 승계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그것을 좇는다고 말씀합니다(히5:6,10; 7:17,21; 9:11; 10:21; 시110:4; 창14:18). 그것은 시작도 끝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멜기세덱에 대한 성경의 소개가 시작도 끝도 없으신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성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리석은 자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가져 온 것이 미사를 예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창14:18).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말씀이 곧 뒤 따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천박하고 미련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제사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단지 떡과 포도주는 전쟁에 지친 아브라함의 군대에게 주어 기운을 돋우려고 한 것이고, 뒤따르는 그 표현은 그가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레위의 제사장직 보다 더 높은 제사장이라는 점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히7:7). 미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자들은 마치 자기들이 사도보다 더 멋진 해석을 할 수 있는 듯이 자랑하며, 또 사도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은 듯이 말 합니다. 또 미사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제사를 은폐하며 매장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수없이 드려야 했던 제사와 그 때마다 다시 쌓아야 했던 제단을 폐지하셨습니다(히9:12, 26; 10:10,18,26).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제 다시 드릴 제사가 없고, 다시 쌓을 제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제물로 드린 십자가 제사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히10:14). 그의 제사가 완전하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다시 드릴 제사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요19:30). 그런데도 미사에 미친 자들은 그 희생 제사가 반복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은 책잡히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미사는 ‘같은 희생’을 반복하는 것 뿐이라든지, 또 반복이 아니라 적용하는 것이라고 한다든지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사 외에는 다른 제사가 없다고 말씀할 뿐 아니라, 그 제사는 단 한번 드려졌고,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고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의 희생은 매일 새로운 예물로 확인하라는 조건에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의 희생의 혜택을 복음선포와 성찬 집행에 의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라는 조건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원한 희생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지, 매일 새로운 예물로 다시 그의 희생을 재현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은 미사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오리라’(말1:11)는 말라기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정말 이 말씀이 ‘미사를 드릴 때가 온다’는 뜻일까요? 옛 예언자들의 예언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려 한다면 차라리 성경 해석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옛 예언자들은 모두 자기 시대의 표징들을 사용해서 복음에 계시된 진리를 나타내려 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야는 앗수르와 애굽과 유다에 각각 제단이 있으리라고 예언합니다(사19:19,23-24). 그렇다면 정말 그 표현대로 그렇게 그 나라들에 예루살렘의 제단 같은 제단들이 섰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지요? 이 예언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서 성취된 것이 아닙니까? 그 표현은 이제 세계 모든 민족이 차별 없이 그리스도의 복을 받을 것이란 뜻입니다. 또 미사는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왜 그러냐고요? 생각해보십시오. 유언은 유언을 한 자가 죽어야 효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자신의 유언을 죽음으로써 확인하셨습니다(히9:15-17). 그런데 미사는 전혀 새로운 유언이 되었습니다. 미사는 드릴 때마다 새로운 죄의 용서와, 의의 획득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사의 수 만큼 유언도 많아지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도 그만큼 되풀이 해서 돌아가셔야 합니다(히9:16).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분명히 밝혀줍니다(히9:25-26). 그리고 미사에서 그렇게 새로운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는 행위가 더욱 악한 이유는 그것이 결국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그리스도를 아버지께 바칠 때, 우리는 예물을 바치는 이 행위에 의해서 죄의 용서를 얻으며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된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구속자가 되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구속의 한 예 정도로 본다는 말 밖에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그 자체로 충분한 구속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그 미사에 참여하여 스스로 구속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 밖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미사에서 반복적으로 참여하고 바치는 ‘예’에 의해 구속의 효력을 얻는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억지가 도착하는 종착역은 우리에게서 성찬을 제거하고 폐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사의 희생이 하나님에게 우리가 치르는 값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속으로서 받으신다고 말합니다. 정말 이것은 배은망덕 중에서도 가장 파렴치한 배은망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은혜와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매일 다시 희생이 되셔야 한단 말입니까? 미사와 바른 성찬의 차이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성찬으로 아버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찬이 약속하고 나타내는 희생의 유익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런 부패하고 더러운 미사 교리를 만들어 낸 이유가 무엇일까요? 로마 교회는 성찬을 사제들에게 맡겼습니다. 사제가 제사를 드려줄 제사장이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성찬(미사)을 집전할 때 교인들이 필수적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되며, 심지어는 사제 혼자만 성찬을 행하고 성도들은 직접 성찬에 참여하는 대신 관찰자가 되거나 중개된 방식으로 참여하게 되어도 괜찮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의 교제를 위해 주신 성찬의 본래 뜻을 해치는 사악한 짓입니다. 나는 그렇게 사제에게 넘어간 성찬을 ‘사적 미사’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많은 군중이 참석했을지라도 사제 외에는 성찬에 참여 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개인적 미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다 함께 성찬을 받아서 서로 나눈다고 말씀하지만(눅22:17; 고전10:16), 저들은 사제가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받아 먹는다고 말합니다. 저 ‘미사 박사’들(Mass-doctors)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삼상15:22). 미사는 성경에 단 한번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명령하시지도 않은 제사를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저들의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저들이 만든 사제직도 성경에서 전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고대 교부들은 카톨릭이 만든 가짜 제사를 절대 지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도 ‘제사’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그 ‘제사’는 그리스도의 피를 회상하며 감사하는 ‘찬양의 제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 정도에서 그 말을 해석해야 합니다. 또 어거스틴은 주교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음성이라고 말합니다. 또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 4권 24장에는 잊을 수 없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사에 대해서는 네 가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누구에게, 누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 바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목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 그 유일하고도 진정한 중보자는 그가 희생을 드린 분과 여전히 하나이며, 그가 위해서 희생을 바치신 사람들을 자신 안에서 하나로 만드시며, 희생을 바친 이와 희생으로 바친 것도 하나이다.’오직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만이 참 제사이고, 그 외에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사실 고대 교부들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찬의 정신에서 이탈한 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성찬론에는 희생이 반복된다는, 적어도 새롭게 된다는 듯한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실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정신이나 복음의 성격이 허락하는 정도를 넘어서 유대인들의 제사 제도를 엄격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단순하고도 순수한 제정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만 율법의 그림자 쪽으로 너무 많이 기울어져버렸습니다. 1천년이 넘게 제사를 지내왔던 민족적 전통을 넘어서지 못한 탓이지요. 그러면 구약 모세의 제사와 우리의 성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물론 그 기능과 목적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효과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둘은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제사는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동물을 제물로 구별해 제단에 드림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자신을 제물로 희생을 드린 다음에는 우리에게 다른 방법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찬이지요. 성찬은 자신이 이미 드린 희생 제사의 유익을 믿는 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 대신 잔칫상을 주셨고, 제사장 대신 성직자를 성별하셔서 거룩한 잔치를 분배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제물’이란 말을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에 있는 ‘그림자’(제사 제도)를 통해 제물의 보편적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제물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속의 의미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속죄를 위해 드리는 것인데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책이 면제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상징이고 경건의 증거였습니다. 이 경우의 제물은 간구의 형식이나, 혹은 감사의 형식이나, 혹은 단순히 경건의 표시로서 새롭게 언약을 확인하는 형식을 갖습니다. 여기에 속하는 제사가 번제와 전제와 예물과 첫 이삭과 화목제였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제물도 두 종류로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는 화목 제물, 혹은 속죄 제물입니다. 이 제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제물이 되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드리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가 ‘찬양과 경외의 제물’, 혹은 ‘감사의 제물’입니다. 여기에는 사랑의 의무가 전부 포함됩니다. 그리고 기도와 찬양과 감사 등 우리의 모든 예배 행위를 포함합니다. 또 더욱 확장되어 우리의 몸과 모든 소유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는 모든 행위를 포함합니다(고전3:16; 롬12:1). 이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거나 죄의 용서를 얻거나 공로로 의를 획득하는 것 등과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찬양하며 높이는 것과 관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배는 먼저 하나님과 화해되고 죄를 용서받아 죄책이 면제 된 사람들이 드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감사, 찬양과 선행의 제사’는 교회에 꼭 필요한 제사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말1:11; 히13:15-16; 벧전2:5-6). 주의 만찬에서도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며 감사를 드림으로써 찬미의 제사를 드립니다(고전11:26).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예물을 오직 그리스도를 중재로 해서 드립니다. (히10:20; 13:15). 바로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에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벧전2:9). 그러므로 주님이 교회에 주신 성례는 세례와 성만찬 뿐입니다. 세례는 교회와 신앙생활에 들어가는 문이고. 성찬은 신앙생활을 강하고 풍성하게 하는 양식이요 잔칫상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첨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성례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는 행렬과 의식과 무언극(無言劇)이 너무 많습니다. 성찬은 미사로 변모된 후에 완전히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질된 성찬이 아니면 일년에 한번 보이는 찢기고 잘린 반 조각의 성찬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떠난 성찬은 곧 상한 음식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미사는 부패하고 오염된 성찬과 같습니다. 미사는 결국 교묘한 말장난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강요하는 신성모독의 연극이 되었고,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은혜에서 신자들의 마음을 잘라버리는 사탄의 칼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영적 식중독에 걸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영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찬식이 무엇입니까? 우리 죄인들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기꺼이 자기의 하늘 보좌와 영광을 버리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찬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그 모든 세상 욕망과 근심 걱정을 못 박아 버리고, 믿음으로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 참 희열과 참 보람과 생명이 준비되어 있는 십자가 행진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늘 성찬의 잔칫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고, 감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을 붙들고 누리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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