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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7장 : 가족 밥상(성례로서 성만찬이 주는 유익)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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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11:23-26절 개역개정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10월 9일 수요일

오늘은 제 417장입니다. 성만찬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리스도의 성만찬은 천국 가족이 함께 하는 신령한 밥상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된 한 가족이 아니라면 결코 받을 수 없는 밥상입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의 식구는 누구나 그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때마다 힘을 얻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이것을 가족 밥상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가족을 흔히 식구(食口)’라고 합니다. 한 솥의 밥을 먹는 관계라는 뜻이지요. 옛날 우리 선조들은 아무한테나 한 솥의 밥을 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집안에 살아도 한 솥의 밥을 먹는 식구와 딴 솥의 밥을 먹는 생구(生口)’를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친척이라도 한 솥의 밥을 먹을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문에 따라 그 한계가 달라질 수도 있지만 대체로 친계는 오등친까지만, 외계는 삼등친까지, 그리고 처계는 이등친까지만 한솥밥을 먹였다’(이규태,한국인의 버릇:신원문화사)고 합니다. 또 당시 사랑방을 찾는 행상 등을 대접하는 밥상에도 밥은 빼고 주었답니다. 밥만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 먹었어야 했지요. 이렇게 가족의 밥상은 곧 혈연으로 맺어진 생명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만찬은 천국 가족이 함께 하는 신령한 밥상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된 한 가족이 아니라면 결코 받을 수 없는 밥상이지요.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식구는 누구나 그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때마다 힘을 얻고 건강하게 자랍니다. 주의 만찬은 성도들이 떡과 포도주를 표징으로 삼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적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로서 우리를 평생 먹여 주십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가 그 사랑을 항상 확신할 수 있도록 독생자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한 담보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찬식입니다. 곧 성찬식은 우리의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양식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신비는 정말 신비하고 숭고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사탄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기 위해 갖은 술책을 다 써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찬식의 바른 의미와 바른 사용에 대해 분명히 알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선 성찬식이 표징으로 쓰는 물질은 떡과 포도주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은 오직 그리스도시라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영적으로 먹고 마시며 힘을 얻는다는 것은 매우 신비한 것이라서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표징을 우리 손에 들려 주셔서 마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 같이 그 신비를 확실히 알게 하시려고 성찬을 주셨습니다. 밥이 우리 육체에 영양을 공급해 주고, 또 포도주가 우리 몸에 기쁨과 힘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혼에 그런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을 얻는다는 뜻으로(6:48-55),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바로 그 약속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전체 사역을 통해 우리의 생명 떡이 되셨다는 것 아닙니까(6:48-55)? 성찬식은 그 복음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을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 떡이 되심을 생각하게 되며, 그 맛과 향기를 느끼게 되고, 또 그 떡의 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입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표징이 가리키고 있는 그리스도를 내면적으로 받아 누리며, 매일 먹고 마십니다.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비유적 표현을 쓰는 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밥을 먹듯 그 안에 깊이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그리스도는 밥과 포도주가 우리의 육체에 그러하듯 실제로 우리의 영혼에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의 몸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 먼저 자신이 취하셨던 몸에 자신의 생명을 부으셨고, 거기로부터 생명이 흘러 나와 우리에게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취하신 그리스도의 살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늘에 오르신 그 몸 자체에서 그 생명이 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몸 속에는 우리에게 나누어줄 생명이 충만하므로, 그의 몸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설명을 듣고도 아직 감이 잡히지 않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성찬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성령의 은밀한 역사와 전능한 능력을 뺀다면 그것은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비밀스런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와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고, 또 우리에게서 분리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물질적 표징들은 상징이지만 동시에 상징 이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받을 때 그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고 확인하는 바 본체인 그리스도의 몸도 받았다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성찬에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 임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실제로 임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유한한 인성을 가지신 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의 몸은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이것은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으면 우리의 문제는 쉽게 해결 됩니다. 또 별로 복잡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대답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 안에 속해 있고, 자체의 부피와 형태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24:39, 요일1:1). ‘이란 말에서 그런 특성들을 빼면 도대체 어떤 이란 말입니까? ‘이 아니고 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때 진짜 육신을 취하셨고, 그 참 육신으로 고난을 당하셨고, 부활하실 때에도 동일한 참 육신을 받으셨고, 또 그 육신을 갖고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만큼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리스도의 몸은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14:12,28; 16:28; 3:21). 하늘에 계신 몸에는, 어거스틴의 설명처럼, 부패하지 않는 성질과 영광이 주어졌지만, 그 살에서 자연과 진리가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 영광을 받으셨지만 여전히 유한한 인성(人性)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셔야 할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우리의 성찬식에 임재한다는 루터의 공재설이나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의 소망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로 그리스도의 몸에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설명을 보태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한 인성을 가진 몸으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성경이 충분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라고 여러 번 예고하셨습니다(14:12; 16:7, 28).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11; 12:8). 대신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그러셨지요(16:7; 14:26:15:26). 그리고 제자들의 눈 앞에서 하늘로 오르신 것은 그런 척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고 하신 마지막 약속은 몸으로 임재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며(14:16), 세상에 남겨져 사탄과 싸워야 할 제자들에게 무조건적인 원조와 틀림없는 보호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또 부활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신 여러 경우를 보십시오. 그의 몸은 분명한 인성을 가지셨습니다(24:39; 20:27). 유령처럼 아무데나 통과하고 여기 저기 동시에 나타나고 이동하는 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숨어 있는 집에 들어 가실 때에도 몸이 닫힌 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문이 그 몸 앞에서 열린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스데반이나 엠마오의 제자들이 그의 몸을 보기도 하고 못 보기도 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나타난 조화가 아니라 그들의 눈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몸은 하늘로 올리우셨으며(1:9; 16:19; 24:51), 우리는 하늘로부터 그의 오실 것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지요(3:20; 1:11).

그렇다면 우리의 성찬식에 그리스도의 몸은 공간적으로 임재하실까요? 그리스도께서 실제의 몸으로 우리에게 내려 오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늘에 계신 그에게로 끌어 올리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설명한대로 그것들은 상징 이상의 것입니다. 또 반대로 로마 교황청 사람들은 지나치게 과장합니다. 떡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씹을 수 있고, 위 속 깊은 곳으로 삼킬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스콜라 학자들 조차 두려움을 느끼는 야만적인 불경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신중 해보려고 했습니다만 역시 속이는 궤변을 되풀이 했을 뿐입니다. 이들은 자기들도 이해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표현을 조작해 냅니다. 그것은 떡의 형태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롬바르드의 말을 보면 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 자체가 보이는 것이며 성별 후에 떡의 형태 아래 숨어 있으며 덮여 있다.’ 여기에서 저 가공할 괴물인 화체설이 생겼고, 이런 종류의 미신은 과거 수 백년 동안 일반 신도 뿐 아니라 지도자들까지 사로 잡아 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과 상관 없이도 효력 있는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임재를 조작하고, 그런 임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저들은 또 교묘한 말장난을 합니다.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것은 떡이 재료가 되어 몸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떡의 형상 밑에 숨기 위해서 떡의 본질을 없애신다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중요한 점은 화체설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 땅으로 끌어 내린다는 것입니다. 성찬의 떡을 들고 요술 같은 주문으로 성별하는 순간 하늘에 계셔야 할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상의 떡 조각 밑으로 내려 오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황당무개한 주장입니다.

또 육체적 편재설을 근거로 성찬식에 그리스도의 몸이 내려와 함께 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루터).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는 것은 그의 몸을 우리에게로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에게로 끌어 올려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비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하늘 보좌까지 올라 가는 것이지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방법 세가지를 어거스틴의 말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위엄(majesty)으로, 둘째는 섭리로, 그리고 셋째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 임재하십니다. 이 마지막 은혜의 임재 안에 우리가 성령의 권능에 의해 믿음으로 그의 살과 피에 참여 하는 놀라운 일이 포함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세 가지 방법 모두 육체적 임재를 부인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저들이 근거로 내미는 엉터리 성경해석에 대해 잠시 반박합니다. 화체설 옹호자들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에서 이것이라는 대명사와 이다라는 말 때문에 헷갈립니다. 우선 이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실수를 합니다. 또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 하더라도 내 몸이다라고 그러셨지, ‘내 몸이 된다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비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을 환유, 혹은 전유법(轉喩法 metonymy)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흔히 신비한 일들을 표현할 때 사용했습니다. ‘할례는 언약이라’(17:13), ‘어린양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라’(12:11), ‘광야의 반석은 그리스도시라’(17:6; 고전10:4), ‘비둘기 같은 성령’(3:16) 등등이 그 예입니다(17:11; 9:22). 이 때 사용된 물질적, 지상적 상징들은 단지 빈 표가 아니라, 본체를 정확히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다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연결사(copula)로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옛날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論者)들도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표현들을 문자적으로만 풀려다가 하나님도 몸을 갖고 계시다고 헛소리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나 신비한 것들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은 대부분 비유로 해석해야 합니다(11:18; 5:25; 66:1). 만약 이다의 문자적 해석을 계속 고집한다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이다의 과거형)‘라는 말씀 때문에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마치 성령이 그리스도의 승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될 테니까 말입니다. 이 정도면 그리스도의 몸과, 그의 임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충분히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요약한다면, 성찬에 오른 양식은 오직 믿음의 그릇에만 담아 먹습니다. 떡 그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로만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영혼에 주입된다는 식의 말에도 나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살의 본질에서 우리 영혼에 자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그 이상의 복잡하고 교묘한 해석은 다 쓸데 없는 짓입니다. 이런 일에 절제가 없으면 곧 물질 숭배로 빠져듭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일 그것이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그것들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떡에서 그리스도를 예배해야 한다.’ 아퀴나스의 말처럼 성찬에서 떡을 먹을 때 실제적인 동반에 의해서그리스도의 몸 전체(피와 뼈와 신경과 기타 모든 것)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성별된 떡을 들고 행렬을 지어 걸으면서 사람들에게 그것에 경배하며 기도하라고 보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주님은 성찬의 떡을 예배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주신 약속과 동시에 그에 대한 명령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너를 건지리라라는 약속을 붙들 것이라면 동시에 내게 부르짖으라는 명령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신약의 교회도 떡을 예배하지 않고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2:42). 그래서 니케아 회의(AD.325)에서는 우리 마음을 떡에 고정시키지 못하게 금지시켰고, 고대 교회는 떡을 성별하기 전에 회중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마음을 (떡 위로) 들어 올리라고 권고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보이는 물질을 미친듯이 숭배하려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떡을 숭배하는 미신은 하나님께만 드릴 예배를 떡 조각에 이동시키는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떡 조각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행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합당하게 받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은 떡 조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광야 반석에서 흘러 나온 물은 신령한 음료였습니다(고전10:4). 반석은 그리스도셨지요. 그러나 그것은 언약을 맺은 사람들에게만 그랬습니다. 당시에 짐승과 가축들도 함께 그 물을 마셨지만 그것들에게는 그냥 물일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찬의 효력은 관계성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성찬과 성찬의 권능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전적으로 떡을 먹는 것과 실제적으로 먹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도 함께 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떡이 그에게는 저주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먹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실제로 거하는 자에게만 허락됩니다(6:56).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례는 선택된 자들에게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라고 말 한 것입니다. 바위와 돌이 빗물을 받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에서 비를 내리십니다. 그러나 믿음의 그릇을 준비한 자는 그 은혜의 빗물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성찬을 바르게 받는 방법을 살펴 봅니다. 성찬의 기능은 우선 우리의 믿음을 돌보고 강화시켜 주며, 또한 동시에 우리의 사랑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고백하며 선포하고(고전11:26), 또 다 한 떡에 참여함으로 사랑의 끈으로 서로를 더욱 동여 매려는 것입니다(고전10:16-17). 또 성찬에는 꼭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고 약속을 설명해야 합니다. 침묵으로, 혹은 떡에다만 대고 중얼거리며 성찬식을 진행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별을 완성하는 것은 물질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찬을 받기에 합당한 자입니까? 성경은 분명히 성찬을 잘 못 받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합니다(고전11:27,29). 믿음의 흔적도 없고, 사랑의 열의도 없이 그저 돼지같이 성찬에 뛰어 드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형편과 태도와 의무들을 깊이 살펴야 합니다. 물론 완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청 사람들은 이 완전성 때문에 허망한 대책들을 내 놓았습니다. , 힘 닿는데까지 반성하고 통회와 고백과 보속으로 자기의 죄를 속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다룬 내용이기 때문에 되풀이 하지 않습니다(34). 그들은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함으로써 성도들에게서 성찬의 위로를 빼았습니다. 마귀의 오랜 음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잔치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자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 높은 자가 아니라 낮은 자가, 완전한 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가 그리스도께 나와 치료 받고 위로 받고 채움 받고 고침 받는 잔치입니다.

이제 성찬식의 진행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신자들이 떡을 손에 받을 것인가 아니면 서로 나눌 것인가, 아니면 각자 받아 먹을 것인가? 잔은 집사들이 돌릴 것인가, 아니면 서로 나눌 것인가? 떡에 누룩을 넣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색이어야 하는가? 이런 외형적인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형편에 따라 결정할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런 문제에 더 신경을 쓰고, 너절한 연극과 복잡한 예식에 더 감동을 받습니다. 포도주가 붉으면 어떻고 하야면 어떻습니까? 집사들이 잔을 돌리면 어떻습니까? 그렇다고 우리의 믿음에 손상이 간단 말입니까? 앞서 말한대로 그런 행위들이 바로 물질 숭배일 뿐입니다.

간단히 바람직한 성찬식 순서를 소개합니다. 우선 공중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다음엔 설교,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고 이어 목사가 성찬에 대한 말씀을 반복합니다. 다음, 목사가 성찬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읽어주고 주께서 금지한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 시켜야 합니다. 곧 세례를 받지 아니했거나 심각한 범죄로 근신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성찬을 합당하게 받도록 가르쳐 주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여 기도합니다. 또 시편을 노래하든지 주님의 약속의 말씀에 관한 무엇을 읽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순서로 떡과 잔을 돌리고 난 다음 믿음과 사랑과 성도다운 삶에 대한 권고를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합니다.

성찬을 일년에 한번만 하는 습관은 누가 시작 했든지 간에 분명히 마귀적입니다. 성찬은 매주 한번씩, 혹은 할 수 있는 한 자주 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와 구제와 함께 성찬은 매주 초대 교회의 습관이었습니다(2:42; 고전11:20). 모든 성도는 마치 굶주린 사람들처럼 매주 한번씩 이 영적 식탁에 몰려들어야 합니다. 육신의 밥은 하루 세끼씩 매일 먹어도 매일 또 찾으면서, 성찬을 영적 식사라고 하면서도 자주하면 안 좋다고 말 하는 것은 분명 제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평신도들에게는 떡만 돌리는 행위도 가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마시라고 한 잔을 왜 빼앗는다는 말입니까? 교황주의자들은 희생 드리는 자들로 선택된 사도들만이 잔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헛된 주장입니다. 또 몸은 피를 포함한다는 병존의 논리를 가지고 떡만 먹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떡은 떡이고 피는 피라고 분리합니다. 그리고 그 둘을 구별없이 모두에게 마시라고 주셨습니다(14:22-23; 26:26-27). 초대 교회로부터 수 백년동안 그렇게 했습니다.

성찬은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의 손을 붙잡고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게 하는 예식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 임재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지요. 이 정도면 성찬의 유익과 성찬의 의미, 그리고 성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 부족하지 않게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찬은 가족 밥상입니다. 성찬식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한 솥의 밥을 나누어 양식을 삼는 시간이지요. 우리는 성찬을 통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주는 생명을 먹고 마십니다. 또 같은 성찬을 통해 우리는 옆에 있는 교우들과 사랑의 끈으로 더욱 단단히 묶입니다. 밥 잘 먹는 사람이 건강한 것처럼 성찬을 잘 받는 성도가 바르고 건강하게 성숙하는 법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물질 숭배하듯 성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찬의 예식을 통해 영적으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성숙을 통해 날마다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을 누리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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