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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11장 : 붕어빵과 틀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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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0:1절 개역개정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23일 화요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11장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이번엔 붕어빵과 틀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길거리에 어김없이 붕어빵 장수가 등장하지요. 붕어 모양의 틀에 밀가루 물을 부으면 어김없이 똑같은 모양의 붕어빵이 구워져 나옵니다.

신약과 구약이 같은 언약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서로 붕어빵과 붕어빵의 관계이지만, 그 언약을 처리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붕어빵과 틀의 관계입니다. 구약은 신약이라는 붕어빵을 찍어내는 이고 신약은 구약이란 이 찍어 내는 붕어빵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이런 차이를 다음 다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약은 신약의 신령한 복을 현세적 복으로 예표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을 통해 주시려 했던 복도 신약의 그것과 똑 같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맛보기로 주신 것이 바로 구약이지요. 하나님은 구약 백성들에게 현세적이과 물질적인 지상의 복을 거울 삼아 그것에 비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바라보게 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단자 세르베투스는 율법의 약속들을 둘로 나누어 버립니다. 그 약속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으로 실현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얻는 것으로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처음부터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15:1-6; 11:8-11).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위대한 약속에 대한 보증과 예표로서 현세적인 복을 덧붙여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장들이 받았던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최종 목표도 궁극적인 소망도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로 하여금 줄기차게 하늘의 신령한 복인 천국을 바라보도록 훈련시켜 주는 은혜의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족장들은 물론 가나안 땅 바로 코 앞에서 죽어버려야 했던 모세 등은 실패자라 불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명기에 모세가 죽을 때를 보면 그가 죽은 이유가 늙고 힘이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늙었어도 기력이 청청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죽을 때가 아닌데도 죽임 당했다는 것이지요. 왜요?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으로는 죄인들이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지도자 여호수아가 나타나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를 예표합니까? 누구를 찍어내는 붕어빵틀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여호수아와 예수는 똑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식 발음이고 예수는 헬라어식 발음입니다. 죄인들이 구원 받아 천국 시민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많은 시편을 보십시오. 그의 수많은 고백들은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초월하는 더 위대하고 영원한 복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73:26; 84:2; 16:5; 142:5). 다른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현세적 복이라는 예표와 상징을 통해 부지런히 내세의 행복을 갈망하며 사모하고 있습니다(35:10; 52:1이하; 60:4이하; 62; 133:3; 참조, 65:17; 66:22; 벧후3:10-14; 21:1-3; 6:5-8).

또 구약의 하나님은 모든 범행에 대하여 빼놓지 않고 신속하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신약의 하나님은 그 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인내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마니교도들처럼, 신구약의 하나님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보여졌던 것이지요. 구약에서의 현세적이고 지상적인 복이 하늘의 영원하고 신령한 복과 은총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처럼, 구약에 가득찬 엄격한 신체적 형벌은 미래의 영적 죽음의 심각성에 대한 상징과 예표로 사용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설명한 것처럼 구약의 교회는 아직 신약의 복을 누릴 정도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표상징이라는 가정교사에 맡겨져야 했던 것입니다(4:1-5).

둘째, 구약은 진리를 형상과 의식들을 통해 전달하면서 그리스도를 예표 했습니다. 히브리서에 분명하게 설명된 것처럼 하늘의 실체가 구약에서는 형상과 그림자로만 나타났다가 신약에 오면 비로소 그 진리의 실체 자체가 현재의 것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 직분이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영원한 대 제사장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는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으로만 나타나셨다가 신약에서는 직접 우리들에게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110:4과 히7:11,28). 그래서 이젠 더 이상 우리에게 레위인의 제사장 직분도 매일 드리던 제사들도 필요 없는 것이지요(7:23-24,27). 온전한 하늘의 실체 자체가 우리 가운데 직접 나타났기 때문에 그림자에 불과했던 옛 것들은 당연히 폐하여 진 것입니다(7:12; 8:6-13). 이와 같이 구약의 율법에는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있고 장차 올 좋은 일들의 참 형상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10:1; 9:10). 그러므로 언약의 실현이 곧 그리스도신데, 이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가지 구약의 의식들을 만드셨고, 그 상징들을 통하여 언약을 시행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수많은 짐승들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기다리는 예표였습니다(22:20). 오늘 제목으로 설명한다면 구약의 피는 신약의 피(붕어빵)를 찍어내는 붕어빵의 틀과도 같은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 그 시대적인 제한을 넘어 설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고 우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습니다.’(10:24; 13:16; 16:16; 벧전1:12). 그들은 붕어빵이 아니라 붕어빵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셋째, 구약은 문자적이고 신약은 영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종종 율법과 새 언약을 아주 강렬한 표현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을 중심으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약은 문자적이고 신약은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이 문자적인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 없이 돌판에 기록되었기 때문이고 신약이 영적인 이유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구약은 죽이는 것이고 신약은 살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아담의 모든 후손의 죄를 고발하여 정죄하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 시켜주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구약은 문자적이고 신약은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구약의 의식에 관련된 것으로 구약은 본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때가 되면 사라져 없어지지만 신약은 곧 본체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것입니다(고후3:10-11). 율법의 무력한 의식들이 언제 사라집니까? 그 의식들이 예표하고 있는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입니다. ‘붕어빵 틀의 사명은 붕어빵을 찍어 내는 것이지요. 물론 율법이 문자적이라고 해서 구약이 백성 중에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선 자가 하나도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 백성만 놓고 보면 그 중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참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신약의 그것과 비교해 본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는 얘기입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 주님이 모든 민족 사이에서 불러 모으셔서 교회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신 사람들의 수가 그만큼 놀라울 정도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신구약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정도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구약은 노예의 언약이고 신약은 자유의 언약입니다. 구약은 문자적이고 죽이는 것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만을 일으킵니다. 이런 식이지요. 우선 율법은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말라고 명령 하면서,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상을 약속하고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벌로 위협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타고난 우리 마음 속의 오염과 부패를 결코 없애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계속 죄 아래 있을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율법의 정죄와 위협을 벗어 날 수가 없지요. 자연히 율법은 사람의 양심을 노예의 멍에로 얽어 매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을 노예의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이고 살리는 언약인 신약은 우리의 양심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합니다(4:22-31).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과 용서의 확신을 갖게 해줍니다. 그래서 신약을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릅니다(8:15). 마치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계집 종 하갈의 후손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의 여인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이 된 것처럼, 우리는 시내산의 율법이 아니라 하늘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상속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율법을 구약으로 복음을 신약이란 이름으로 표현했습니다(16:16). 그런데 이 이름들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은 사실 율법이 발표 되기 이전 창세 이후로부터 있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구약 시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참 성도들은 우리와 똑같이 그 약속을 바라고, 똑같은 믿음으로 중생에 참여하며, 또 똑같은 영적 영구적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러므로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모든 참 자녀들은 다 같은 새 언약에 속하여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거스틴은 율법 이전에 발표된 약속들을 구약이란 이름 안에 넣지 말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 아래 살던 거룩한 성도들은 현재의 붕어빵 틀로 만족하지 않고 항상 미래에 얻을 붕어빵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짐승의 피로 만족하지 않고 장차 오실 참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를 바라 보았던 것이지요.

다섯째, 구약은 한 민족을 신약은 모든 민족을 포함합니다. 이 마지막 다섯번째 차이야말로 신약이 구약보다 얼마나 우수한지를 분명히 밝혀줍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마치 이스라엘 한 나라밖에 모르시는 분처럼 이스라엘에게만 모든 약속과 혜택을 다 주십니다(32:8-9; 10:14-15; 14:16). 그러나 때가 차매’(4:4),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라는 그 경계선을 허무시고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2:13-17; 3:28; 3:11; 2:8; 72:8; 9:10). 그 위대한 왕국의 실현은 그리스도의 전도 초기에도 잠시 연기되는 듯 보였으나(15:24; 10:5; 2:9-10), 즉시 모든 족속을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참조. 1:8; 10:35,45; 15:13-18; 12:3; 3:14; 28:18-20). 물론 구약 시대에서도 이방인을 부르신 증거들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신약 시대처럼 공개적이고 풍성하지는 않았습니다(1:26; 3:9; 벧전1:12).

정리해 봅니다. 구약과 신약은 사실 무척 서로 다르게 보입니다. 구약은 맨날 전쟁 이야기, 싸우고 죽이는 내용들, 하나님이 벌을 주실 때에도 땅을 갈라지게 해서 즉사 시키는 이야기, 복을 주셔도 다 땅, , 자식, 부귀영화 등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신약은 전혀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땅 주겠다, 돈 주겠다,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식의 이런 약속이 전혀 없습니다. 순전히 성령을 주겠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겠다, 믿음의 복을 받아라, 천국을 선물로 주겠다, 부활 시켜 주겠다는 등 전부 영적이고 내세적인 것들입니다. 옛날 어거스틴이 빠졌던 이단 마니교에서는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구약의 그 모든 약속과 사건들은 신약에 하나님이 진짜로 주실 영적이고 내세적인 복을 찍어 내려는 붕어빵 틀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우린 구약의 그런 약속과 복과 하나님의 벌과 상을 보면서 신약의 붕어빵을 바라보고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이런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변덕을 부리시냐고 그럽니다. 어리석고 겁이 없습니다. 농부가 철 따라 농사 법을 바꾸고, 부모가 자녀들의 나이에 따라 교육법을 바꾸고, 의사가 환자의 나이와 질병의 정도에 따라 치료법을 바꾼다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습니까? 낮과 밤이, 그리고 여름과 겨울이 교대하게 만드신 하나님은 시대와 인간의 능력에 따라 가장 적절한 구원의 외적 형식과 방법들을 바꾸어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백성들에게는 , 신약 시대의 우리들에게는 실제 붕어빵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구약을 읽을 때 앞으로는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늘의 참 성전의 그림자가 이 땅 위에 내려 온 것으로서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편이고, 예루살렘 성전과 거기서 드리던 모든 제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 언덕 십자가 제사를 예표하는 붕어빵 틀이며, 성전의 제사장들은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성전의 모든 제사와 의식들은 구약 백성의 믿음이 아직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사가 올 때까지 구약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한 몽학선생이다.’ 이 정도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구약을 읽을 때 줄줄줄 무슨 뜻인지 그 속에서 붕어빵을 쏙쏙 빼 먹으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붕어빵 틀이 없었다면 신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우리는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열심히 구약의 붕어빵 틀에 밀가루 물을 부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늘의 참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대로된 붕어빵을 드실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하늘의 참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심으로 신령한 복을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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