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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14장 : 이인 삼각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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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빌립보서2:5-8절 개역개정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부 14장입니다. 어제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이인 삼각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이인 삼각 경기는 운동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경기입니다. 아빠와 엄마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달리기 하는 것인데, 아빠 엄마의 다리 하나씩을 묶어 세 다리를 만들어 뛰는 것입니다. 그 때, 두 사람의 다리 하나씩을 하나로 묶은 그 다리는 누구의 다리일까요? 주인 없는 다리일까요? 아빠 다리 하나는 아빠 것이고, 엄마 다리 하나는 분명히 엄마 것이지만, 끈으로 하나 되게 묶었기 때문에 그 다리는 엄마 아빠 둘 모두의 다리입니다. 곧 그 두 다리는 서로 섞여서 전혀 몰라보게 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둘이 하나로 연합 된 독특한 다리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신성이고 인성은 인성입니다. 그 두 본성은 혼합될 수도 없고, 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두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두 본성은 완벽하게 구별되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연합되어 하나의 통일된 위격을 이룹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 말씀이 육신과 하나로 혼합되어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신성)과 육신(인성)은 각각 두 본성에 아무런 손해 봄이 없이 서로 연합하여 한 그리스도를 이룬 것입니다. 본질(substance)의 혼합이 아니라 위격(person)의 연합과 통일이 있었다는 말씀이지요. 2인 3각의 세 다리처럼 말입니다. 물론 두 본성의 결합은 지극히 신비하고 위대한 사건이라서 어떤 비유로든 완벽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한번 예로 들어보지요. 사람은 영과 육이라는 두 본질이 신비하게 결합되어 한 위격(인간 아무개)을 이루고 있습니다. 곧 사람은 영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가 아니며 육체는 영혼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을 같은 방에 넣어 두었다고 빛과 어둠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영혼과 육신은 절대 섞이지 않습니다. 영혼은 영혼이고 육체는 육체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하나로 묶여서 임병욱이라는 하나의 인격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예컨데 여러분이 저에게 와서 인사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임병욱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하지요? 임병욱의 영혼은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하지 않지요? 나에게 와서 ‘임병욱님의 영혼 계십니까? 육체는 가만 있고 영혼만 나와 보시오.’그러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임병욱 안에 영혼과 육신이 하나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임병욱에게 말하면 그것은 곧 내 영혼과 육체에 동시에 말하는 겁니다. 사람에게서 영혼과 육체는 도저히 서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또 예컨데 누가 나의 빰을 때렸다고 한다면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니고, 영혼까지 심한 모욕감을 느낍니다. 또 나에게 얼굴이 잘 생겼다고 하면 영혼이 기뻐 춤춥니다. 이렇듯 영혼과 육체는 뗄레야 뗄 수 없으면서도 서로 독립된 존재로 나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 내 영혼과 육체는 도저히 서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진흙 두 덩어리가 섞이듯 그 둘이 섞여서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하나님의 성품과 인간의 성품을 모두 갖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두 성품은 하나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 분명하게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로 묶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독특한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인 삼각의 그 묶인 다리처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여 이 땅에서 33년간을 먹고 자고 복음을 전하고 웃고 울다가 십자가에 처형 당하셨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우리의 중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표현과 소개들을 보면 아주 다양합니다. 대략 4가지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신성만으로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인성으로만 예수님을 표현합니다. 셋째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 모두로 표현합니다. 넷째는 ‘속성의 교통’이라고 하는데 신성으로 인성을 표현하고 인성으로 신성을 표현합니다. 직접 성경의 증거들을 예로 들어 봅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해당될 수 있는 표현들입니다. (요8:58).“58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골로새서1:15-17)“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또 주께서는 창세 전에 아버지 앞에서 영광을 가지셨고(요17:5), 아버지와 함께 일하신다(요5:17)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인성에만 적용되는 표현들입니다. (누가복음2:52)“52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며’(요8:50). ‘최후의 날을 모르며’(막13:32; 마24:36).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요14:10; 6:38). 또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만졌다고 합니다(눅24:39). 이 모든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관한 것들입니다. 셋째,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통일체에만 해당되는 표현입니다. (누가복음24:31)“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제자들 눈에 보이셨던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표현은 신성 혹은 인성 어느 한쪽에 대해서만은 사용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넷째, 두 속성이 상호 교통하는 경우에 대한 표현입니다. (사도행전20:2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2:8)“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요일1:1)“1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복음3:16)“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피도 없으시고 죽으실 수도, 또 우리가 만질 수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인간성으로 하신 그의 일들을 그의 신성에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표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서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시며(요1:29; 참조 막2:10), 원하는 사람을 살리시며, 의와 성결과 구원을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또 그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임명되어 아버지와 같이 공경을 받게 되셨다고 하십니다(요5:21-23). 또 그는 ‘세상의 빛’이요(요9:5; 8:12), ‘선한 목자’요, ‘양의 문’이며(요10:11,9), ‘참 포도나무’라 하십니다(요15:1). 그리스도는 사람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셨기에 그런 권세를 가지셨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은 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부활한 몸이지만 여전히 육체를 갖고 계신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해변에서 생선도 잡수시고 그랬습니다. 그냥 영이라면 먹고 마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신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먹으셨던 겁니다. 이런 표현은 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 되심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이 그의 신성만을 이야기하거나 혹은 인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은 그의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통일성을 두고 말하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심판이 있은 후에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전15:24)는 바울의 말도 그리스도를 그런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2:7), 잠시 순종의 생활을 하셨고(빌2:8), 순종의 생활을 마치신 후에 ‘드디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으며’(히2:9), 최고의 주권자로 높아지셔서 모든 무릎을 그의 발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빌2:10). 그리고 그는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 아버지께 도로 바쳐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앞에 계시게’ 하실 것입니다(고전15:28).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중보자로 주신 목적은 그의 손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막16:19; 롬8:34). 그러나 장차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뵙고 즐길 때가 오면 그리스도께서도 중보자의 직책을 끝내시고 창조 이전에 즐기시던 그 영광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는 것도 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로 계시는 동안에만 불려지는 칭호입니다. (고전8:6)“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적인 영광을 직접 보게 되는 날이 오면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았던 그 주권을 아버지께 도로 돌려 드릴 것이고, 아버지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머리가 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그 동안 잠시 휘장으로 가리워졌던 그리스도의 신성이 스스로 충만하게 빛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계신 중보자는 신성과 인성이 각각 아무 손상됨이 없이 연합되어 하나의 통일된 위격을 가지십니다. 그러나 정신 나간 이단들의 천박한 상상들을 보면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미친듯이 날 뛰는 이단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붙잡고 신성을 제거하며, 신성을 붙들고 인성을 제거하며, 또 통일된 양성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 어느 한 쪽에 적용되지 않는 속성들을 붙잡고 두 본성을 다 부인해 버립니다. 마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므로 하나님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므로 사람이 아니시며, 또한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시니까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는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그리고 세르베투스가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될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어떻게 신의 속성이 인성의 속성과 함께 묶일 수 있냐는 것이지요. 너무 염려한 나머지 그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분리시켜버렸지요. 두 본성의 ‘연합’을 ‘혼합’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머니를 가질 수 없고, 어떤 피조물이라도 신성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신성)을 낳으셨다는 말(눅1:32)과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눅1:43)을 끔찍이 싫어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신성과 인성은 절대 연합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그리스도는 이중인격(二重人格)자라는 것이지요. 그는 결국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분리시킨 죄목으로 431년, 에베소 교회 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Cyril)의 주도로 이단으로 정죄되어 페르시아로 도망갔다 리비아에서 죽었는데 그의 가르침은 중국으로 전파되어서 경교란 이름으로 오래 동안 이어졌습니다. 또 우리는 유티케스의 미친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와 달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하나로 꼭 붙어야 된다면서 네스토리우스를 욕하다가 신성을 너무 강조하고 인성을 무시하는 실수를 했습니다. 키릴로스의 가르침을 과장한 유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의 부정할 정도로 무시하다가 448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 회의에서 역시 정죄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또 그들 못지 않은 괴물 세르베투스(1511-1533)가 나타나 삼위일체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과 영과 육, 그리고 창조되지 않은 세가지 요소(로고스,지혜,말씀)로 혼성된 허구라는 것이지요.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단지 그가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의 태중에서 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시면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또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하나님과 똑같은 본질로 되어있으며, 그 육이 하나님으로 변함으로써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주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또한 동시에 ‘사람의 아들’로 나셨음을 줄기차게 증거합니다(골1:15이하; 롬1:1-4; 고후13:4; 롬9:5). *(세베르투스,Miguel Servet. 1511-1553 : 스페인의 의학자이며 신학자, 오늘날 생리학의 중요한 기초인 혈액이 폐를 통해 순환하며 산소를 얻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밝힘, 1531년에 ‘삼위일체의 오류’를 출간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하다가 카톨릭과 개신교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 1533년 제네바에서 화형 당함)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생명의 말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사실을 부인하려는 거짓 선생들의 노력은 옛날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도 주변에서 보면 예수님을 단지 훌륭한 사람으로만 보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을 비롯하여 가수 조영남, 이미 죽었습니다만 감신대의 변선환교수 등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옛날 이단들의 후예가 되어 그들의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되셨을 때에도 하나님이 아니셨던 적이 없고, 그렇다고 사람이 아니셨던 적도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실 때도 그리스도의 인성만 당하신 것이 아니고, 두 본성의 통일된 위격으로 계신 중보자로서 온전히 당하신 것입니다. 만약 그러실 수 없으셨다면 그는 완전한 중보자가 되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앞으로 어느 날 다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던 자들은 다 거두어 지옥 불에 던질 것입니다. 그 때까지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한분의 중보자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구원의 다리 역할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인 삼각, 이 교리를 가슴에 새기고, 이 진리를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서 세상의 거짓 사상들과 싸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지키고 세상에 전하여 많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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