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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16장 : 단 하나의 샘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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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7:37-39절 개역개정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부 16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구속자의 기능을 완수하였으며, 그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에 대한 내용이지요. 그것을 단 하나의 샘에 비유해서 공부해 봅니다. 혹시 사막을 걸어 보신적 있으신가요? 사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아시스 (oasis)라지요. ‘사막의 오아시스’는 곧 ‘생명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 ‘단 하나의 샘’은 그런 의미로 붙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단 하나 밖에 없는 샘’이신가? 어떻게 그 샘이 되셨는가? 그 샘에서 우리는 어떤 물을 마시고 혜택을 누리는가? 오늘 우리가 배울 진리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사막에 버려졌던 불쌍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버려졌던 죽음의 사막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충만했습니다. 불뱀과 전갈이 사방에 깔려 있고, 뜨거운 모래알과 저주의 바람, 그리고 타는 목마름이 가득합니다. 온갖 불의와 방탕, 자랑, 교만, 시기, 미움, 살인, 음란, 배반, 불효, 탐욕, 비방, 불신, 무정, 배약 등 모래알처럼 많은 죄악들만이 득실거립니다(참조. 롬1:18-32). 거기에서는 구원받을 소망이 전혀 없고, 오직 사탄과 죄의 종 노릇하다 영원히 멸망 받을 비참한 운명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처지에 있는 우리 앞에 하나님은 생명의 샘물을 터치신 것입니다. 그 샘물을 마시는 자마다 사망의 독에서 해방되고, 모든 죄의 질병에서 치료되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며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지요. 신비한 샘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하나밖에 없는 구원의 샘입니다. 사망의 사막에서 생명의 오아시스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다른 샘들은 신기루입니다. 신기루가 뭡니까? 뜨거운 복사열 때문에 눈이 착각을 해서 생기는 환상입니다. 꼭 샘물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 보면 그저 모래뿐입니다. 예수님 외에, 자기가 구원의 생수를 주는 생명의 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기루입니다.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면 그 속에 독 뱀이 들어 있는 샘입니다. 그 물을 마시면 죽습니다. 세상은 사막과 같습니다. 온갖 불의와 방탕과 자랑과 교만과 술 취함과 시기와 싸움과 음란과 배반과 불효와 무정함과 비방과 탐욕 등 수 많은 죄악들이 모래알처럼 드글 거립니다. 이러한 사막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야 하는 우리 인생은 소망이 없습니다. 그 사막의 맹렬한 독기와 열기를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아무 소망 없이 그저 걷다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 눈 앞에 하나님은 생명의 샘, 오아시스를 터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의와 해방과 생명과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구해야 합니다(행4:12). ‘예수’란 이름도 괜히 받은 것이 아닙니다(눅1:28-33). 그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에 천사가 하늘로서 가져온 이름입니다(마1:21). 베르나르두스의 경고는 기억해 둘 만 합니다. ‘예수의 이름은 광명일 뿐 아니라 양식이다. 그것은 또 기름이다. 이 기름이 없으면 영혼의 모든 양식은 마른다. 그 이름은 소금이다. 이 소금으로 맛을 내지 않으면 우리 앞의 모든 음식은 맛이 없다. 끝으로,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모든 가르침에는 향기가 없다.’ 그런데 그 샘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사막에서 그 샘물을 터친 것입니다(롬5:8; 요일4:19).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을 보실 때 가증한 미움밖에는 없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사랑하실 만한 것들을 찾아내십니다. 우린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중한 피조물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릴 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엡1:4-5; 요3:16;롬5:10).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항상 순결하고 의롭고 사랑스럽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샘이 되셨을까요? 사도신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요. 한마디로 대답한다면 ‘순종’입니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구속하시는 샘이 되셨습니다(롬5:19).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순종의 삶이었습니다(마3:15; 갈4:4-5).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구원의 길은 죽음의 길이었고 그 길은 곧 순종의 길이었습니다(마20:28; 요1:29; 롬3:24-25; 고후5:21; 빌2:7-8). 그는 죄만 없으셨다 뿐이지 우리와 똑같은 약점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시기 위해서는 자기 약점과 처절한 싸움을 싸우셔야만 했지요. 우선 그리스도는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통해 정죄를 받으십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기다리는 하늘 심판대를 대신 하시고 우리가 받을 벌을 자기가 도맡으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지요. 또한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정죄뿐 아니라 우리의 죄책도 맡으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를 해방하는 대속의 죽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 대신 죄인의 자격으로 죽으셔야 했습니다(막15:26-27; 사53:12). 그러나 그를 정죄한 빌라도는 거듭 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마27:24; 요18:38; 시69:4). 그렇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우리의 죄가 전가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죄책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사53:12). 십자가는 우리의 몫이었던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갈3:13-14; 신21:23). 죄의 저주가 그리스도의 육신에 덮어 씌워졌을 때 아버지께서는 죄의 세력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속죄 제물(히. 아슈모트)이 되셨고, 죄의 저주를 맡아 짊어지고 광야로 보내지는 속죄 염소(레16:8,10,26)이셨으며, 율법의 희생 제물들로 상징되었던 제사 제물들의 원형이 되셨습니다(예. 사53:10). 그리스도는 죄의 저주에 압도되어 삼켜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를 적극적으로 담당하셔서 그 힘을 전적으로 꺾고 부수어 버리셨습니다(골2:14-15; 히9:14).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정죄당하신 것에서 무죄 사면을 받으며, 그가 저주 받으신 것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는 우리의 죄 값을 배상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부패를 씻어 내는 목욕 대야가 되셨습니다(엡5:26; 딛3:5; 계1:5).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죽음에 내어 주신 것은 우리처럼 죽음에 굴복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벧전3:22. 불가타 역, ‘죽음을 삼키심’). 즉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을 맛 보신 것이지요(히2:9,14-15). 그의 죽으심과 묻히심에서 우리가 얻는 유익 첫째는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유익은 우리 육체의 정욕들을 죽여 ‘무덤에 묻고’, 옛 사람이 번성하거나 결실하지 못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6:4-5; 갈2:19; 6:14; 골3:3). 그렇게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지옥에 내려 가셨습니다. 우리가 쓰는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 가셨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대 사도신경의 사본들에는 있습니다. 곧 교부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에 대해 말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지요. 해석이 다를 뿐이지요. 사도신경에 이 조문을 집어 넣느냐 넣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재 사도신경의 조문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모두 순수한 성경 말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옥’을 ‘무덤’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간결하게 정리된 신경 안에 쓸데 없이, 그것도 모호한 표현으로 반복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지옥은 율법 아래 살다 죽은 영혼들이 갇혀 있는 곳인데, 그들에게 내려가신 그리스도께서 성취된 구속을 발표하고 거기서 그들을 해방시키셨다고 말합니다(아퀴나스. 시107:16, 슥9:11을 인용하여 ‘림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어릴 때 죽은 아이들만 가 있는 ‘림부스 인판뜨룸’, 구약 족장들이 가 있는 ‘림부스 파트로룸’, 시원찮게 믿다가 죽은 영혼들이 가 있는 ‘연옥’ (purgatorium) 등등). 지금도 여러 사람이 참말이라고 열심히 옹호하지만(세르베투스), 그런 주장은 성경과 아무 상관 없는 유치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그가 이미 죽은 경건자와 불신자 모두의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구속의 은혜를 성령의 힘으로 깨닫게 하셨다는 뜻입니다(벧전3:19). 그리고 둘째 그가 직접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상대로 맞붙어 싸우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다만 육체로 죽으신 것 뿐만 아니라 마귀의 권세와 지옥과 죽음의 공포와 싸워 이기셨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도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 다만 죽었을 뿐 아니라 사망의 고통에 붙잡히셨다고 합니다(행2:24). 그리스도께서는 장난스럽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음을 몹시 두려워 하면서도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에 삼켜버리지 않기를 구했습니다(마26:39; 히5:7, ‘경외하심’ 보다 ‘두려움’이란 표현이 더 좋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느낌과도 싸우셔야 했습니다(마27:46; 시22:1). 한 마디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엄격하신 벌을 철저하게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덕분에 우리는 완전하고 철저하게 구원 받은 것이지요(히2:15).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다는 말을 대단히 기분 나빠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러실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절반 이하로 감소시키려는 음모입니다. 오히려 우리와 똑같이 약점을 가지셨던 그리스도는 죽음의 두려움과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음과 지옥의 공포를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경험하셔야 했습니다(히 4:15). 물론 그런 두려움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우리 죄인들과는 전혀 달랐지만요. 그래서 그는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점에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의 비범한 기도가 그것을 증명하잖습니까?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이 헛것입니다. 그가 죽으심으로써 우리 죄가 제거되고 그가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의가 소생하며 회복된 것입니다(롬4:25). 그의 부활 덕택으로 그의 죽으심이 우리 안에서 권능과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빌3:10; 고전15:17). 그러므로 그의 죽음과 부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부활의 혜택 첫째는 중생과 의를 얻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 새로운 생명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고, 셋째는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해 확신을 얻게 된 것입니다(고전15:12-26).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참 영광을 얻으시고 나라를 세우신 것은 그가 승천 하시면서부터입니다(히4:14; 엡4:10). 그는 승천하심으로 육체적 임재를 끝내시고(마26:11),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더욱 직접적인 능력으로 천지를 주관 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승천하심으로 비로소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실현하셨습니다(마28:20).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통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으로 영접하셨습니다. 그 뜻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천지에 대한 주권을 받으셨으며, 심판날까지 통치를 계속하신다는 것입니다(엡1:20-22; 빌2:9; 행2:30-36; 히1:8). 그로 인해 우리 믿음이 받는 혜택은 많습니다. 첫째 천국 길을 여셨습니다(요14:3-4; 엡2:6). 둘째 우리에게 항상 위대한 예언자와 중보자로 계십니다(히7:25; 9:15; 롬8:34). 셋째 날마다 영적 보화를 풍성히 부어 주십니다. 그러다가 원수들을 모두 굴복시키시고(고전15:25; 시110:11), 교회의 건설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그는 승천하신 때처럼 보이는 형태로 영광 중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선택된 자와 버림 받은 자들을 분리하실 것입니다(마25:31-33). 이미 죽었던 자들의 몸도 예수 안에 있던 자는 생명의 부활로 예수 밖에 있던 자들은 사망의 부활로 부활하고(고전15:51-52), 살아 남은 자도 변화하여 주를 맞을 것입니다(살전4:16-17). 그렇기에 우리에게 이제 놀라운 위로만 남습니다. 장차 우리를 심판하실 분이 바로 우리에게 심판하는 영예를 나누어 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마19:28). 참으로 그가 우리를 심판대에서 정죄하실 리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구속주께서 우리를 심판하는 그 심판 자리에 계시리라는 것은 그냥 평범한 보장이 아닙니다(요5:22). 사도신경은 이처럼 우리의 구원이 전체적으로 또 그 모든 부분이 하나 하나 다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행4:12). 그러므로 그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다른 데서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만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모든 갈증들들 해갈하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샘으로부터 마음껏 퍼 마시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의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는 단 하나뿐인 생명의 샘입니다. 사도신경은 그 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들을 순서대로 정리한 표와 같습니다.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묵상하면 할수록 믿음에 큰 유익을 얻게 되고 위대한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는 사도신경의 고백을 믿음의 지표로 삼아 모두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예수님에게서 날마다 생명수를 먹고 마시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할렐루야 천국에 영접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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