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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2부 17장 ; 목수와 연장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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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24-25절 개역개정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7월 31일 수요일

 

오늘은 기독교강요 2부의 마지막 장인 17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의 효력,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그 분의 역할에 대해 다룹니다. 이 장의 핵심 주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는지와 그의 공로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목수와 연장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옛날엔 집 짓는 데 목수가 왕이었지요. 집 주인이 말만하면 목수 혼자서 설계도 하고 자르고 세우면서 집을 지었습니다. 나무를 마름질해서 집을 짓는 목수를 대목(大木)이라 했고, 가구나 문짝 따위를 짜는 이를 소목(小木)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목수가 되는 길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로 스승을 따라 다니며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우야 했는데, 기술을 배우는 동안엔 보수도 없었고 온전한 목수가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승이 연장 한 벌을 쳐주는 것이 고작이었답니다. 연장은 목수에게 생명과 같은 것이니까 아마 그것은 상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아주 값진 보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집을 짓는 데 있어서 목수였을까요, 아니면 단지 연장에 불과했을까요?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리스도의 공로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 보탠 것일까? 아니면 사람의 공로와 협력한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공로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로는 하나님의 은혜보다 한 발 앞섭니다.

어떤 궤변가들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공로를 될 수 있으면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공로라는 말이 하나님의 은총을 가린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원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목수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은총의 손에 들린 연장에 불과하다고 주장합니다. 베드로의 말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요, 인도자와 지배자로 여기지 않으려고 합니다(3:15).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원의 집을 짓는 데 있어서 연장만이 아니라 목수로서 탁월한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그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물론 그 목수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인간으로서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의 가장 밝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세워 은총의 유일한 토대가 되게 하셨고, 이 은총은 그 머리로부터 모든 지체에 각각 그 분량에 따라 확산되어 갑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같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의 시초부터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 말할 때 그 시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입니다. , 그 제 일 원인은 하나님의 결정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오직 자기의 기쁘신 뜻에 따라 그를 우리에게 구원을 얻어 주는 중보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한 구원의 집은 하나님이 짓기로 작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구원의 집을 짓는 목수로 임명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구원의 도구나 연장만이 아니라 친히 목수로서 독특한 공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바로 그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공로는 하나님의 은총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린다거나,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사랑을 대립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상식적으로 어떤 일의 하위(下位)에 있는 것은 그 일과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거저 의롭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보다 하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또한 구원의 은혜를 얻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서로 대립시킬 것이 아니라 그 둘을 동시에 우리의 모든 인간적 의에 대립시켜야 합니다.

성경도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의를 서로 밀접하게 연결합니다.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제일 높은 원인이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둘째, 곧 가장 가까운 원인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구원의 질료가 되신다는 말씀이지요. 형상과 질료는 모양 혹은 구조와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형상(모양,구조)과 질료(내용)의 관계는 집과 벽돌의 관계 같은 것인데, 그리스도는 단순한 구원의 모양이나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구원의 내용과 효과가 되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오직 그를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구원의 질료도 그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여기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는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구원의 화목제물(형상)로 나타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주시는 구원의 내용(질료)이 되어 주신 것이지요.(요일2:2; 1:19-20; 고후5:19,21; 1:4-6; 2:15-16 ).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집을 짓는데 목수이시면서 동시에 연장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성경이 분명히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종하심으로써 아버지의 은총을 얻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우리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지요. , 그는 자기 의로 구원을 얻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점을 확실히 증거하는 성경구절은 상당히 많습니다(5:10-11). 로마서 5:19절의 대조법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 보여 줍니다.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5:19). ‘되리라는 동사는 미래형이지만 문맥으로 보아서 현재의 의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이미 바로 앞절에서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5:18)”고 말했기 때문이지요.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공로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 은총은 그의 피로 우리 죄가 대속 되었다는 뜻입니다.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그의 피가 우리에게 공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참조 눅22:20). 그러니까 그가 흘리신 피의 결과로 우리의 죄가 우리에게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의 피 값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이미 충분히 실시 되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지요. ,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우리가 받을 심판은 없다는 이야기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증언 역시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모세도 여러 번 말했지만(34:7; 16:34), 구약의 상징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권능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지칠지를 잘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에도 같은 내용의 말씀들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9:12-15, 22,28).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3:13)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이사야의 증언도 있습니다.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8). 여기에 24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라는 베드로의 해석을 더 하면 이 점에 관한 모든 의혹이 제거될 것입니다. 즉 베드로의 말을 정리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의 짐을 지셨고 우리는 그의 공로로 정죄를 면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사형에서 구출하시려고 치루신 대가(代價)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3:24-25). 베드로 사도의 발언도 같은 뜻입니다.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해 배상을 치르신 것이며(고전6:20),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딤전2:5-6).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원을 죄의 용서라고 못 박아 표현하는 것입니다.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4).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21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이 말을 다시 설명해 본다면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얻을 것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비교. 18:5; 13:39). 우리가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그리스도께서 다 지키셨고, 우리가 치를 수 없는 율법의 모든 요구를 그리스도께서 대신 완전히 치르셨기 때문이지요(4:4-5).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스도의 그 의를 곧 우리의 의로 인정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의 양식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이유가 뭘까요?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6:54-55). 그것은 우리가 그의 공로 안에서 생명의 본질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힘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로 하여금 의를 얻게 하기 위해 대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에서 생깁니다. “2...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5:2). 정리해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은총에 의해서 날마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습니다. 곧 구원의 집을 짓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의 집이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롬바르드, 스콜라학파 등)은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의 공로가 혹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을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대단히 어리석은 호기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조금이라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자기를 위해 어떤 새로운 것을 얻으려고 이 땅에 내려오실 필요가 전혀 없으십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죽음에 내어 주시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8:32) 것은 오직 세상을 사랑 하셨기 때문입니다(3:16; 참조 롬8:35,3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셨으며 철저히 자기를 잊으셨습니다(2:6-8). 그런데도 어떤 자들은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2:9)고 한 바울 사도의 증언을 오해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수고와 공로로 마침내 높아지신 것이 아니냐고 말 합니다. 어리석습니다. 빌립보서의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이유를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범으로 삼도록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낮아지심 다음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24:26) 라는 누가의 말을 듣고도 모르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이미 자기 영광을 가지고 계셨기에 그의 수고와 공로로 영광을 얻었다는 말은 한마디로 괘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결심에 따라 목수로 임명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연장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목수이면서 동시에 연장이 되셔서 친히 구원을 위하여 수고하시고 값을 치루시어 구원의 공로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공로가 있게 되고, 또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날마다,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구원의 집에 들어가 살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이 구원의 집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마귀가 공격해도, 아무리 죽음의 공포가 공격해도, 아무리 지옥의 권세가 공격해도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교회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다 같은 집에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은 구원에 집에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 어떤 시련과 환난의 풍랑을 이기시는 줄 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임하는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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