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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3장 : 유턴 행진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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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Ⅰ서1:8-10절 개역개정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오늘은 3부 3장입니다. 믿음에 의한 중생인 회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유턴 행진’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봅니다. ‘U-턴’이 뭘까요? 운전할 때 가던 길에서 차를 돌려 돌아가는 것이지요. 운전자들은 무엇보다도 교통 표지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주의표지, 규제표지, 지시표지 보조표지, 노면표지 등을 말하지요. 만약 이런 표지의 내용들을 잘 모르거나 무시하면 큰일 납니다. 그 중 ‘U-턴’ 표시를 본적이 있으시지요? 모든 인생은 특히 이 ‘U-턴’ 표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U-턴’ 표시는 회개하라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믿음과 회개의 관계를 살펴 봅니다. 회개와 믿음은 어떤 관계일까요? 회개와 용서는 복음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눅24:47;행5:31), 그것들은 믿음의 나무에 열리는 열매들과 같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 4:17)라는 말은 재세례파나 예수회 사람들의 주장처럼 천국보다 회개가 먼저라는 것이 아니고, 의미적으로 볼 때 그 말은 ‘천국이 임했으니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천국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고 회개할 사람은 없으니까요(참조,사40:1-3). 이 말은 믿음에서 회개까지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시130:3-4). 곧 회개는 믿음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회개하면 천국이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이미 내게 임했기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가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멜랑크톤(Melanchthon)의 말은 맞습니다. ‘죽임’이란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된 영혼이 슬퍼하며 무서워 하는 것이지요. 자신을 진정으로 싫어하게 되고, 따라서 딴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을 회개의 시초로 보는데, 보통 이것을 ‘통회’(contrition)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살림’은 믿음에서 생긴 위로입니다. 즉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신 구원을 바라보고 정신을 차리고 용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때 ‘살림’은 부쳐(Bucer.칼빈 시대의 종교개혁자)가 말한대로 마음이 진정되고 행복감을 얻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 속에 거룩하고 헌신된 삶에 대한 전혀 새로운 소원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회개에 대한 정의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회개는 하나님께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Bucer, Melanchthon)은 회개를 ‘율법의 회개’와 ‘복음의 회개’로 나누었습니다. 즉 ‘율법의 회개’란 가인, 사울, 유다 등의 경우처럼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하며 양심의 가책과 공포에 사로잡히는 상태에 이르지만 결국 구원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회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회개’는 지옥으로 향하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반면 ‘복음의 회개’는 히스기아나 니느웨 백성들, 다윗, 혹은 베드로 등처럼 죄의 가시에 찔려 아파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생기를 얻어 다시 일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과 회개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한 것은 상당히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믿음을 회개 아래 완전히 집어 넣어 그 둘을 하나로 섞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둘은 그렇게 혼동시키기 보다는 확실히 서로를 구별한 채 하나로 결합 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구원 받는 회개로 진행되는 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열매로 봐야 합니다. 항상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이미 내게 구원의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뻐해야 합니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돌아 서다’ 혹은 ‘전환하다’라는 뜻이고, 헬라 말로는 마음과 의도를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우리 생활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적인 전향입니다(마3:2; 삼상7:2-3; 눅3:8; 행26:20; 롬6:4). 그리고 회개의 요소는 우리의 육과 옛사람을 죽이는 것과 성령의 살리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이러한 정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첫째 회개는 외면적 행위가 아니라 내면적, 영혼 자체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렘4:1-4; 겔18:31; 신6:5; 10:16;삭제(사58:6) 약1:8). 그리고 둘째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 하는 데서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회개의 원인이라고 말하지요(고후7:10; 렘4:4; 행17:30-31). 셋째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살리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시37:3,8,37; 사1:16-17). 우리의 육적인 본성은 철저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롬8:7) 만약 하나님의 칼이 우리의 본성을 쳐 죽이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경건 생활의 초보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들은 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할 때 이루어집니다(롬6:6). 그러므로 회개는 한 마디로 중생입니다.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것이지요(엡4:23-24; 골3:10; 고후3:18). 그리고 이 회복은 단 한 순간이나 하루 혹은 한 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평생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평생토록 회개의 경주를 달리도록 하신 것이지요. 다음으로 회개와 완전성입니다. 어떻습니까? 한번 회개한 성도는 다시는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회개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의 상태는 여전히 죄인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여전히 악을 촉발 시키는 불씨가 남아 있습니다. 그 정욕의 불길은 끊임없이 튀어 나와서 죄를 짓도록 자극합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성도들은 육욕(concupiscience)의 질병에 감염되어 있어서 자주 자주 정욕이나 탐욕이나 야심이나 그 밖의 죄악을 저지르도록 충동이나 자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신자들은 중생했지만 여전히 죄인인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그 육욕의 질병을 ‘죄’라고 부르지 않고 ‘연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연약’에 우리의 의지가 굴복하고 동의할 때 비로소 ‘죄’가 된다는 것이지요(참조. 약1:15).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욕망의 충동을 느끼기만 해도 그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악한 욕망을 생기게 하는 패악성 자체를 ‘죄’라고 부르는 것이니까요.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죄가 그 지배력을 잃지만, 여전히 그들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흔적’은 성도들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기력을 의식하게 하고 겸손하게 만듭니다. 하여튼 율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신6:5; 마22:37).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육의 모든 욕망은 죄입니다. 암부로우스도 ‘세례로 말미암아 죄책은 제거되지만 죄의 법(불법)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대의 재세례파 사람들은 완전성이라는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중생한 사람은 완전히 순결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육의 정욕 때문에 안절부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며, 그저 지도자인 성령을 따르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악을 명령하지 않을테니까 성도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참으로 해괴망측한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성령은 살인, 음행, 술취함, 자만, 투쟁, 탐욕, 사기 등을 부추기고 수호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쌓여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죄와 싸우며 행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돌이키는 우리의 ‘U-턴’ 행진은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계속해야 싸워야 하는 군인들처럼 일평생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의 열매는 무엇일까요? 회개의 열매는 외면적 회개와 내면적 회개, 회개와 용서 등의 관계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선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 사람에 대한 사랑,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상대로 할 때에는 마음의 내면적인 태도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욜2:13; 약4:8). 물론 육체의 훈련이나 징벌도 회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 권장해서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내면적 문제를 가볍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또 그런 징벌들은 교회의 온유한 특성을 위협할 정도로 엄격한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요엘서(2:12)를 예로 들면서 회개는 울며 금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오해하는 것이지요. 그런 것은 회개에 항상 따르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만으로 제한되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의 생활은 검소와 절제로 조절되어 그 평생이 일종의 항구적인 금식 같아야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회개와 공적인 고백을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죄책에 대한 고백이라기 보다는 실제로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고 심판대 앞에 서는 일을 피할 수 있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짓는 지를 고백할 뿐 아니라 중대한 죄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잊은 것이라도 회상해서 고백해야 합니다(시51:3-5; 25:7). 또 회개는 죽음에서 생명에로의 회개도 있고 날마다 끊임 없이 실천해야 하는 회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와 용서라는 단 두 마디 말로도 복음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마3:2; 4:17;막1:4,15; 눅3:3; 24:26, 46-47; 행5:30-31).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회개를 목표로 삼고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몸을 바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 그 목적은 바로 회개 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마9:13). 플라톤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이 철학자의 생활이라고 그랬지만, 우리 신자들의 생활은 육욕을 죽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며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용서의 조건이지만, 그러나 회개가 우리의 자격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회개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결정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말이지요(딤후2:25-26; 행11:18; 고후7:10; 엡2:10). 그런데 성경은 두렵게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히6:4-6; 10:26-29). 옛날 노바티아누스(Novatianus)파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그 말씀을 이유로 그 책은 성경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과 일치합니다(마12:31-32; 막3:28-29; 눅12:10). 그렇다면 이 무서운 죄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이제 더 이상 모른다고 잡아 뗄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계속 하나님의 진리에 대항 하는 죄를 말합니다(눅12:10; 막3:29; 행6:10; 마9:34; 12:24). 간단히 요약하면,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지은 죄는 용서를 받아도(딤전1:13), 지식과 불신앙이 합해서 지은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두 번째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짐짓’(고의적,계획적)으로 하는 전인격적인 배교를 의미합니다(히6:4-5; 10:26). 그러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이란 곧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의미하지요. 예를 들어 에서 같은 자들의 통곡과 눈물은 회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입니다.(히12:16-17; 슥7:13 ). 또 아합 같은 이들의 회개는 가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거짓 회개는 얼마동안 용서를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의 평생에는 하나님의 저주가 머물렀습니다(왕상21:27-29; 시78:36-37). 하나님이 거짓 회개들을 잠시 용서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죄인들로 하여금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변명할 여지를 없게 하시려는 것이며, 또한 나중에 벌을 더 하셔서 거짓 회개를 싫어하심을 보이시려 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회개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고 교만한 자들로는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회개는 ‘U-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좇아 행하던 길에서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죄의 용서를 약속하는 복음을 믿는 자들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즉,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회개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가 구원 받는 조건이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다 고백할 수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그래도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만약 회개로 구원 받는다면 세상에 구원 받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회개는 구원이 아니라, 새 사람이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산 사람이 되어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신실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와 악한 습관에서 해방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인인 것 같지 않은 사람은 죄와 나쁜 버릇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자유가 적습니다. 항상 이런 저런 일에 얽매여 종 노릇하다 맙니다. 그래서 회개가 중요한 겁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신자들 속에도 죄의 불꽃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할 회개의 행진은 평생토록 하는 것입니다. 옛날 재세례파나 최근의 박옥수 등은 성도가 한 번 회개하면 더 이상 회개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도가 한번 회개하면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회개하고 받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이제 성령의 지도에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명한 팜송 가수 존 덴버도 그런 믿음을 가졌었지요. 황당한 주장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성도들이 짓는 모든 악한 죄악들의 대장이 되야 한단말입니까? 다윗이 한번 회개한 다음 천사처럼 살았습니까? 굳이 구분한다면, 회개는 단번에 끝나는 회개와 매일 계속되어야 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사탄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회개는 단번에 일어나는 것이고 영원히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는 자꾸 하면 안됩니다. 이미 안방에 들어간 사람이 자꾸 안방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매일 계속 해야 하는 회개가 있습니다. 우리 속에 죄의 불꽃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그런 죄의 불꽃이 있다는 것, 평생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매일 불조심하지 않으면 그 작은 불꽃이 내 인생 전체에 확 옮겨 붙어 낭패 보는 수가 있습니다. 늘 겸손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며 회개를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자들은 모두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회개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해줍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 은혜를 힘 입어 여러분의 죄를 회개하고, 담대히 용기를 내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십시오. 기도하고, 힘을 얻어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다니고, 전도하고 봉사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멋있게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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