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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4장 : 가짜 열쇠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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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6:13-20절 개역개정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은 3부 4장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엉터리 회개론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가짜 열쇠’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자물쇠와 열쇠는 인간이 만든 탁월한 발명품 중 하나이지요. 요즘에는 다양한 형태의 자물쇠를 만들고, 또 그것을 여는 독특한 열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번호를 눌러 여는 열쇠에서부터 카드 모양의 열쇠도 있고, 지문으로 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눈동자로, 어떤 것은 목소리로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열쇠 중의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천국 열쇠’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열쇠이지요.(마16:19; 18:18). 로마 카톨릭은 오래 전부터 부지런히 그 유사품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 회개는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닌 스콜라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엉터리 회개론이지요. 곧 회개에 관한 가짜 열쇠입니다. 스콜라 신학이란 수백년 동안 천주교 신학에 영양분을 공급해 온 스콜라 철학자들이 만든 신학으로 8세기~17세기까지 번성했습니다. 특히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지요. 천주교의 교리가 성경에서 멀리 떠난 이유가 바로 이 스콜라 철학에 있습니다. 천주교는 스콜라 철학이 교회의 옷을 입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그러면 스콜라 철학이 뭘까요? 간단히 소개합니다. AD.800년 경에 서유럽을 통일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AD.768~814 재위)가 서유럽 몇 곳에 신학원을 설립합니다. 그 이름이 스콜라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위에 신앙과 이성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신학과 철학을 발전시켜 왔는데,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어라’고 외쳤던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안셀무스까지(AD.1033~1109)가 제 1기입니다. 그 다음, 13세기에 와서 큰 변화를 맞습니다. 토마스의 아퀴나스라는 대학자가 스콜라 철학에 아라비아 철학을 끌어 들인 겁니다. 아라비아 철학은 이슬람의 철학을 말하는데, 이슬람 철학은 서아시아 등을 정복한 이슬람이 옛날 동방정교에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 등 기독교 이단들이 퍼뜨린 그리스(헬라) 사상을 받아 들이면서 발전시킨 철학입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플라톤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라비아 철학을 12세기에 서유럽의 학자들이 받아들이면서 기독교 신학의 짬봉 르네상스가 시작됩니다. 곧 토마스의 아퀴나스는 그 헬라 철학과 이단 사상, 그리고 이슬람 철학이 버무려진 요상한 사상을 성경해석과 교회에 적용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 철학과 이단 사상과 이슬람의 철학 등을 성경의 가르침과 섞어서 교회의 권위를 세워갔다는 말입니다. 그 짬뽕의 대가들인 스콜라 학자들이 만든 회개의 교리가 바로 천주교의 엉터리 회개론입니다. 그들은 회개를 이렇게 구분하여 정의합니다. 첫째는 심령으로 하는 통회이고, 둘째는 입으로 하는 고백(고해성사)이고, 그리고 셋째는 행위로 하는 보속(補贖)이라는 것이지요. 이미 어제 배운대로 회개에 관한 교리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회개와 죄의 용서는 복음의 전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정확할수록 좋은 것이 아니라 꼭 정확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에 관한 지식이 확실하지 않으면 우리 양심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항상 불안해 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 도망 다니게 됩니다. 하지만 회개에 관한 가짜 열쇠인 스콜라의 교리는 양심에 평안을 줄 수 없습니다. 이제, 회개에 관한 가짜 열쇠인 그들의 삼중 개념을 하나씩 생각해봅니다. 우선 통회입니다. 통회란 사람이 자기 죄를 심령으로 완벽하게 통회해야 용서를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즉 통회는 죄 용서를 얻기 위한 첫 걸음으로서 충분하고, 완전하고, 공정한 통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죄를 마음으로든 행위로든 완벽하게 고백하고 통회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회개가 우리가 용서받는 조건이 되고 공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죄 용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이나 공로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습니다. 물론 회개를 낳는 통곡이나 슬픔은 유익합니다(고후7:10). 그러나 우리 중 누가 단 한번이라도 완벽한 통회를 했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저 힘 닿는대로 해 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을 믿고 통회하려 몸부림을 쳐도 결국 후회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양심은 결단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공로(통회, 눈물)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용서 받습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사명은 회개하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눈을 은혜로 용서하시는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눅4:18; 마11:28). 다음은 고백(고해성사)입니다. 신자들이 일년에 한두 번 씩 반드시 신부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입으로 고백해야 회개가 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도 고백 문제는 스콜라 신학자들과 교회 법학자들 사이에 있는 가장 큰 논쟁 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훈에서 나왔느냐 교회의 법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들어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하나는 주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마8:4; 막1:44).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고침 받았음을 확인받으라 하신 것을 풍유적으로 해석해 냈지요. 즉 제사장들은 영적 나병 환자들의 고백을 듣기 위해 임명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허무맹랑한 해석입니다. 언제 레위 제사장들이 신자들의 고백을 들으라고 임명된 적이 있단 말입니까?(신17:8-9) 그리고 제사장의 모든 직분은 다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히7:12) 그래서 우리 모두의 죄는 신부에게가 아닌 직접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지고 나가면 됩니다. 또 그들은 나사로 사건을 예로 들면서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를 풀어주실 때 그 영적 매임을 ‘풀어주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다고 주장합니다.(요11:44). 또 그들은 세례 요한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와서 죄를 고백한 것처럼 신자들은 사제들에게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세례를 위한 고백이지요. 또 그들은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을 예로 듭니다. ‘죄를 서로 고하며’(약5:16)라고 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죄를 ‘서로’ 고해야 합니다. 신자가 신부에게만이 아닌 ‘서로’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서로 기도하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고 또 서로 위해 기도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역시 신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처럼 천주교는 자기들의 엉터리 교리를 떠 받치려고 성경을 어거지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들은 일단 교황을 인정해놓고, 고해성사를 인정해 놓고, 신부를 제사장이라고 해 놓고, 사람의 죄를 대죄와 소죄로 나누어 놓고 그 엉터리들을 보존하려니까 여기저기서 성경을 막 갖다 붙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고해성사를 교회법으로 확정한 것은 이노센트 3세에 와서입니다(AD.1198-1216년). AD.1251년 제4차 라테란 종교회의지요. 그렇다면 그 전에는 아무도 죄 용서 받은 사람이 없었단 말입니까? 5세기 경의 사람 소조메노스(Sozomenos)의 글을 보면, 당시 감독들이 정한 이 법이 서방, 특히 로마에서만 열심히 지켜졌다고 말합니다. 당시 존경 받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는 어떤 부도덕한 사건을 계기로 고해성사를 아주 폐지 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역시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었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하는 고백을 수시로 반대했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하나님께 들고 가십시오. 가장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 여러분의 상처를 보이고 그에게서 약을 얻으십시오. 사람에게 고백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스콜라 학자들은 한 시편(7:17)의 ‘찬송하다’는 말을 ‘고백하다’란 말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불가타역). 성경이 이 회개의 문제에 대해 가르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 죄를 그리스도께 고백하라는 것입니다(히4:12; 시32:5; 요일1:9). 그리고 이렇게 주님께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의 죄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온 세상 앞에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밝히 보이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입니다(삼하12:13; 레16:21). 또 온 회중이 공통적인 죄를 범했을 때는 함께 고백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느1:7; 9:1-2). 전염병이나 재앙이 올 때 온 교회가 함께 회개하고 고백하는 것도 마땅한 것이지요. 또 주일마다 목사가 자신과 교인들의 사악함을 지적하며 주의 용서를 간구하는 것도 회중의 기도의 문을 여는 좋은 열쇠가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다음 두 종류의 개인적인 고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란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경우입니다(약5:16). 이 때 성도들은 목사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목사는 성경 말씀으로 죄를 이기게 하고, 용서에 대한 확신을 줌으로써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모두가 서로 그럴 수 있지만 목사는 그런 일에 특별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 목사는 성경의 근거 없이 어떤 멍에로든 교인의 양심을 속박하면 안됩니다. 완전한 고백을 강요하지도 말고 또 모두에게 원해서도 안됩니다. 목사는 죄를 용서하는 복음의 약속을 증언하는 것이지요. 다음 이웃을 위한 고백은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마5:23-24). 이웃에게 지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음으로써 깨어졌던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교회 전체에 해를 입힌 사람들이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키프리아누스의 증언처럼 초대교회의 고백형식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적으로도 완전한 고백은 불가능합니다. 자기 죄를 낱낱이 완전히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윗도 포기한 일입니다(시19:11; 38:4; 18:5; 69:2-3, 15-16). 힘 닿는대로 완전히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저들은 도살자와 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절망에 빠뜨리거나 진정한 회개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일년에 한 두 번씩 사제에게 나와 쓰레기 통을 비우듯 생각해 낸 죄들을 지껄이고 다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년동안 담대하게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께서는 분명히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성경 두 곳에서 말씀하고 있지요. 첫번 말씀에서는 복음 전도에 대한 것입니다(마16:19).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으면 죄에서 용서 받고 구원 얻으며, 믿지 않으면 심판 당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두 번째 말씀은 교회의 권징(파문)에 대한 것입니다(마18:15-18. 참조. 요20:23). 역시 비밀스런 고해성사와는 아무 상관 없지요. 곧 교회가 받은 열쇠는 고해성사와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단지 교회에 대한 공적 범행을 제거하기 위해 교회의 규율에 의지해 시행하는 징계에 대한 교훈입니다. 그런데 교활한 거짓말장이들은 교훈을 예식으로 바꾸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말씀에 의지해서 고해성사라는 황당한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모든 신자는 누구든지 적어도 일년에 한번 자기 죄를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런 의도가 없으면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되었을 때 이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힌다. 이렇게 사제에게는 죄인을 매고 푸는 열쇠의 권한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양심을 사람의 손에서 풀어 말씀에 매시려 했지만 저 거짓말장이들은 그 반대가 되게 했습니다. 사제들은 죄인의 고백을 듣고 선고하는 분별의 열쇠와 그 선고를 실행하는 권한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제들의 손에 정말 그런 권세가 들려졌다면 사실 얼마나 불안한 일입니까? 사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의 양심을 매고 풉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상담역 정도로 푸대접하는 저들은 결국 죄를 고백하는 자의 공로와 진실성에 의존해서 천국 문의 그 열쇠를 돌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너무 애매하고 너무 불안합니다. 그런데도 한 술 더 떠서 이제 저들은 새로운 용서 방법을 첨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벌과 보속이란 제도이지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의 자비에 따라 죄책은 용서 받지만,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따라 그 벌은 받아야 되는데, 눈물이나 금식이나 예물이나 자선 행위 등 행위의 공로로 대신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의 공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보속을 이루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기막힌 망언입니까!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값 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사52:3; 롬3:24-25, 5:8; 골2:13-14; 딛3:5). 그 값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치루셨기 때문이지요(행10:43; 고후5:19).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어린 양이시기 때문에 죄를 대신하는 유일한 제물과 화목제물과 보속물이 되십니다. 심히 미련해진 저들은 그리스도의 그 은혜가 처음 세례 받을 때만 효력 있는 일이며 그 다음부터는 그 피가 교회의 열쇠를 통해 계속 나누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말이 도대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단 한 분이시며 영원하신 대제사장이 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히4:14-16; 요일1:1-2). 저 염치 없는 자들은 다윗을 예로 들어 죄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대가를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고해 주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은 자기 죄에 대해 아무 벌을 받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눅22:61; 마9:2).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를 표현한 문장들을 보십시오. 우리 죄를 아주 잊어버리시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겔18:21-22; 사38:17; 미7:19; 욥14:17). 아주 잊어서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를 벌 주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치루신 대가는 바로 우리가 받을 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구약에서 죄에 대한 속전으로 어떤 배상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속죄의 제물만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보속의 제물이 되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벧전2:24; 사53:5; 롬3:24) 그리고 다윗이 받은 벌은 버림받은 자들에게 행하시는 보복의 벌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주시는 징계의 벌이었습니다(삼하7:14). 처벌이 아니라 교정을 위한 것이지요(욥5:17; 시89:30-33; 히12:5-6). 스콜라의 교만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의지하고 있는 스승이 바로 롬바르드입니다. 그는 고대 교부들의 글들을 집대성한(명제론집) 12세기 초의 거장이지요. 그러나 그가 긁어 모은 교부들의 글들은 대부분이 그 출처가 가짜입니다. 어거스틴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회개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인데 본 장에서 그들이 어거스틴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다 그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콜라의 말장이들은 회개에 대하여 부지런히 열쇠들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으로 되레 수많은 영혼들을 괴롭히고 있을 뿐입니다. 문도 안 열리는 가짜 열쇠를 돌리려니 얼마나 분통이 터집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십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로 다 치러 주십니다. 우리의 회개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믿음으로만 됩니다. 여러분의 모든 죄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용서받은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십시다. 지옥의 문이 아닌 천국의 문이 열려 여러분의 주소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긴 것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인 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충성합시다. 배반하지 말고 끝까지 그의 말씀에 순종합시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평생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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