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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7장 : 주인과 하인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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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6:24-25절 개역개정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8월 9일 금요일

 

오늘은 37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 자기 부정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주인과 하인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오래전에 읽은 글이라 가물가물하여 이름도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조선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지요. 어떤 사람이 도박을 하다가 온 집과 가족들까지 다 팔아 먹었답니다. 순식간에 그 집과 창고, 옷과 가구, 논 밭 등이 남이 손에 넘어가고 본인은 물론 가족들 마저 모두 노비가 되었답니다. 고통스럽게 살고 있던 어느 날 그의 동생이 몰래 큰 돈을 들여 형님과 그 가족들을 다시 샀답니다. 그리고는 새 주인이 된 동생이 노비인 자기 형님에게 그 집과 가족들을 다시 맡겼답니다. ‘이 집과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길 테니 꼭 원래 너의 것이었을 때처럼 잘 관리를 해 주거라.’ 형님은 자기 새 주인이 동생인지도 모르고 열심히 새 주인을 위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것을 관리하며 새 사람이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꾸며낸 이야기인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야기를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이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주인이 바뀐 사람입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완전히 망해서 사탄에게 팔렸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의 새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다 새 주인에게서 받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내 삶의 출발점이 되고 평생의 안내자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순간,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냐 하인이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기 신분이 무엇이냐에 따라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할 일은 바로 주인과 하인의 문제, 곧 신분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하지만 분명하지요.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인생의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주신 말씀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12:1). 그러기 위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우리를 권면하십니다(12:2).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고전6:19),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게 하거나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도록 하고 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14:8; 고전6:1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첫 걸음은 내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내 모든 삶의 목적과 방향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생각을 깨끗이 버리고, 빈 마음으로 성령이 명령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3). 이것이 바로 생명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지요. 철학자들은 그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이성의 소리를 따르라고 주장했지만, 기독교 신앙은 이성이 아닌 성령을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의 이성이 성령에게 자신을 양보하고 항복하며 복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지배하시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2:20).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다 그리스도께 넘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욕망은 물론 염려와 두려움까지도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이미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삶은 새 주인을 모시는 하인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주권을 그 새 주인께 맡기고, 어떤 일을 하든 어떤 형편에서든 그를 우러러 보며, 항상 최선을 다해 그를 섬기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걸으려는 새 삶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첫 일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16:24).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우리가 일단 이런 자기 부정으로 우리 마음을 채울 때 비로소 모든 죄인들에게서 예외없이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죄악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딤후3:2-5).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무장하지 못한 인간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넘치는 욕망을 갖고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 보기에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실제 속으로는 자기 칭찬과 자랑을 위한 것이며 자기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다고 한 옛말처럼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6:2,5,16; 21:31).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제자도의 첫 걸음입니다. 자기는 자기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하인일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충성스런 하인으로 그 새 주인께 복종 시킬 때 우리는 우리의 나그네 길을 성공적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근신경건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2:11-14). 그러나 만약 우리가 철저히 하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불경건과 세상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요일2:16; 2:3; 벧후2:18; 5:16).

자기 부정의 중요한 표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그래서 리는 마땅히 우리 주인의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새 주인으로 모시는 사건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지배하고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크게 보면 우리 인생은 십계명처럼 두 부분으로 나뉘지요.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 사람과 관계된 것입니다. ,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삶은 일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주고, 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나머지 일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 줍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살펴보지요.

먼저 우리가 부정해야 할 우리의 본성을 살펴보지요. 우리 인간의 본성은 맹목적으로 자기를 열렬히 사랑합니다. 남들을 모두 자기보다 못나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작은 은사 하나 때문에도 즉시 우리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그리고는 그 자만심으로 곧 터질 듯 하게 됩니다. 자기의 죄는 기를 쓰고 숨기려 하고, 자기의 실수는 너그럽게 용납하거나 심지어는 정당하다고 꾸며 댑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실수는 물론 맹렬하게 비난하고 추악하게 과장하기 까지 하고 혹시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고 선한 일을 했을 때라도 그것을 깎아 내리려고 온 몸과 마음과 힘을다 합니다. 마치 자기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다 자기보다 아래로 보고, 또 자기는 모든 사람보다 특별하고 월등하다고 여깁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무식자가 유식자에게,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자기 주장을 양보할 때에라도, 그래도 자기가 그들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죄인은 다 자기가 잘 낫다고 생각하며 그 마음 속에 자기 왕국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분이 좋고 서로 의견도 맞고 일들이 잘 될 때면 온화하고 명랑하던 사람들이라도 괴롭고 성가시고 의견이 충돌되었을 때에는 독을 뿜습니다.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도 상관 없이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투쟁욕과 이기심은 인간이 앓고 있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요, 전염병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모든 선과 재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다면(고전4:7),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을 때 기회를 만난 듯 날치지 말아야 하고, 또 잘 했을 때는 마땅한 영광과 호의를 그에게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몇 가지 결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존경해야 할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하고 항상 그것을 유지, 강화 시켜 나가야 합니다.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친절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혹하다 싶을 만큼 강력한 말씀을 합니다. 남을 유익하게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손해 보라는 것이지요. (고전13:4-7).4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그래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 수준에 오르게 하기 위해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는 다 일정한 조건 아래 위탁된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지요?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벧전4:10). 우리 몸을 생각해 보지요. 우리 몸의 지체들은 최우선적으로 그리고 최선을 다해 다른 지체를 섬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도 건강해지는 것이지요. 자연법칙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마찬가지란 말씀이지요(고전12:22-27).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자기의 가진 재능이 어떤 것이든 다른 교우들을 위해서 일해야 하며, 교회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전심전력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자기를 돌보지 않습니다. 아니, 돌볼 수도 없습니다. ‘자기 부정은 그런 태도를 갖기 위해 필수적인 것인데, 그것은 자신을 몸의 한 지체요, 또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주인의 것을 위탁 받은 청지기로 여기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을 위해 살고자 해도 가끔 낙심하는 때가 있지요. 내 도움과 호의를 받는 사람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 줬는데 나에게 이럴수가 있어? 괘씸하게...’ 이런 일은 적지 않게 일어나고 때로는 심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주인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가장 첫째이면서 절대적인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저들의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저들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눈에는 자격이 없어 보이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같이 보여도 하나님이 저들을 가치있게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선행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6:9-106:14; 18:35; 17:3). 이처럼 자기 부정과 남을 섬기는 사랑의 실천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자기를 마땅히 그 일을 해야만 하는 하인으로 여기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지요. 철저히 자기 부정을 하지 못할 경우 남을 도와 주고도 욕을 먹게 됩니다. 남에게 자기 돈이나 시간을 좀 나눠 주고서는 자기가 마치 그 물건들의 주인인 것처럼, 심지어는 자기가 구제받는 그 사람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기 쉽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남을 도울 때 우리는 철저히 하인의 입장에 서서 실망하지도 말고, 또 교만하거나 자랑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는 자기 부정의 훨씬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지요. 이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것이 많기 때문에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고 바르게 살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다 주인께 맡기고 우리는 하인의 자리에 머물며 그 자리를 끈질기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능은 다 같습니다. 재산과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미친 짐승처럼 항상 날뛰려는 기회만 엿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천하고 이름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경탄스러울 만큼 경멸하고 무서워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야심과 탐욕의 정상에 도달하려고 몸부림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빈곤과 비천을 피하려고 눈물겨울 정도로 노력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께서 주시는 복만 받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다른 방법으로는 성공하지도 번영하지도 않겠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몰론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이 다 죄는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면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오직 하나의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입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오직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 출세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열심히 주를 섬기는 좋은 수단 중 하나는 될 수 있을 지언 정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인은 당연히 주인의 뜻만 바라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인이 열심을 내는 이유가 주인처럼 떵떵거리며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 하인은 이미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또 하나님의 뜻에만 충성하고 헌신하겠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바라고 사는 우리들에게도 불통할 때도 있고 형통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을 운명에 돌렸고 운명은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자비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손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나쁜 일과 좋은 일들을 가장 공정하고 적절하게 배치해서 결국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혹시 질병이나, 전쟁이나, 가난이나, 이런 저런 재난에 빠질 때에라도 선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를 우러러 바라보며 참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131:1-2). 그리고 일이 잘 될 때에는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것이니까요.

여러분,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 하려는데서 옵니다. 하인이 주인 노릇을 하려는 순간 그 하인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하인들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은 하인의 행복을 아는 첫 걸음입니다. 그리고 하인은 오직 주인만 바라고 삽니다. 모든 행복이 자기 주인에게만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지금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싶은 마음을 지워 버리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내가 바라고 소망하고 소원하는 것들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길 열망하는 것을 떨쳐 버리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항상 남에게 자랑하고 교만하려는 마음을 억누르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남보다 나를, 주님보다 나를, 교회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은 철저히 종이 되는 것입니다. 겸손한 종이 되어 주님과 또 그의 명령대로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주께서 칭찬하실 겁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착하도다’.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자기 부정에 성공하여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이런 칭찬 받는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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