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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8장 : 십자가의 행렬들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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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6:24-25절 개역개정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8월 12일 월요일

 

 

오늘은 38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걸음은 자기 부정이며, ‘자기 부정에 성공한 성도는 누구나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십자가의 행렬들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요즘 분쟁과 전쟁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붉은 십자가를 가슴과 등에 달고 전쟁터를 누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제 적십자사(1963년 창립) 단원들이지요. ‘전쟁 속에서도 사랑을이란 표어를 갖고 일하는 그들은 제 3의 군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각국 적십자사들의 연합체인 적십자사연맹(현재,192개국)은 평화시에도 건강 증진과 질병 예방, 고통 경감 활동 등을 위해 눈부시게 일하고 있습니다. 비종교적 단체라고는 말하지만 그 십자가의 행렬은 참 보기 좋습니다. 적십자사는 J.H.뒤낭의 저서 솔페리노의 회상(1863)이 계기가 된 것으로, 그 책은 크림전쟁(1853-6)F.나이팅게일의 눈부신 구호활동에 자극 받은 것이지요. 이슬람권의 여러 나라는 적십자 휘장 대신 적신월(赤新月;빨간색의 초승달)을 사용하고 있고, 이름도 <적신월사>라고 부릅니다. 이상하지요? 이상하고 말고요. 십자가가 아니라면 전쟁 속에서도 사랑을이란 표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에 하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초승달의 행렬이 아니라 십자가의 행렬이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한마디로 하늘 사랑의 표식이요, 예수 믿는 사람임을 나타내 주는 표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행렬은 예수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와 찬송, 예배가 예수믿는 사람들의 표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절에 다니는 사람들도 합니다.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찬불가라고 합니다만, 세상 모든 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찬미하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예불이라고 합니다만,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자기 신을 섬기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직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독교의 표시입니다. 물론 아주 먼 옛날에 저 남미의 어떤 지방에서 우상으로 섬겼던 형상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십자가처럼 사람들을 사형시키던 사형틀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의 십자가, 예수믿는 사람들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십자가는 죄인들을 매달고 못 박아 죽이던 사형틀이었습니다. 왜 그런 무시무시한 사형틀을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사랑하는 걸까요? 그 이유를 알면 바로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 복음을 아는 겁니다. 그걸 모르면 교회에 다니면서도 헛 다니는 것이지요. 가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기왕이면 편안하고 부유한 삶을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할 수 있으면 고난과 가난과 재난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지요. 그것이 우리 육신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단단히 마음 먹어야 합니다. 많은 고난과 치욕과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왜요?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황금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와 땀으로 얼룩지고, 고통의 신음이 베인 고난의 기둥입니다. 우리의 스승이 지고 가셨던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당연히 스승의 뒤를 이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면서 고난을 무서워 하거나 평안만을 구하는 것은 마치 전쟁터에 나가서 놀며 자며 쉬겠다는 겁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전쟁터에서 하늘 사랑을 나타내려면 싸워야 합니다.

십자가는 누가 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6:24)“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면 스승처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의 스승이요 모범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8:29; 5:8).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자기 부정의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3:17). 그렇기에 하나님의 양자된 우리들도 예외 없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둘째, 우리는 스승되신 예수님의 발 뒤꿈치도 못 따라가는 형편없는 제자들이기 때문에 더욱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로 인내와 순종을 배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에 비하면 우린 너무나 연약하고 또 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가 없으면 곧 교만해지고, 하나님을 떠나 부패합니다. 순식간에 인내도 순종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저 훌륭한 선배 다윗도 금방 자만심에 사로잡혀 큰 소리를 쳤지만, 신속한 주님의 보응에 즉시 깨닫고 회개합니다(30:6-10). 하나님이 십자가의 고통으로 찌르면 항복하지 않을 자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누르시면 견딜 자가 없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기 신뢰에서 탈출하여 겸손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면 틀림없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여러 가지 재난과 전쟁과 실패와 빈곤과 이별, 그리고 질병 등으로 괴롭히십니다. 그러니 그런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지극히 마땅하다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기에 성도에게 십자가는 좋은 약입니다. 약 중에는 예방약이 있고 또 치료약도 있고 또 보약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그 모든 것이 됩니다.

우선 십자가는 예방약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부패하여 잠시만 방심하면 곧 겸손의 멍에를 벗어 던집니다. 길들이지 않고 먹이기만한 말처럼 길길이 뜁니다. 기운이 좋은 말일수록 더 그렇겠지요. 어떤 때는 자기 기수조차 알아 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주 광분하는 육욕을 제압하는 예방약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늘 의사께서 잘 아시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다 병자라는 것입니다. 무슨 병입니까? 교만 병입니다. 기회만 오면 발작합니다. 조금만 잘 되면 곧 다 자기가 잘 나서 된 것이라고 떠듭니다(32:15). 그 병은 십자가 약을 계속 먹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합니다.

또 십자가는 치료약입니다. 고통의 십자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없애 줍니다. 자기의 무능을 더 잘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자기 신뢰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죄에 빠져 있는 자기를 보게 해 줍니다. 정신이 드는 것이지요. 대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비로소 인내하고 버틸 용기가 생깁니다. 인내는 하나님과 우리가 사랑으로 만나는 만남의 광장입니다. 인내라는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그만큼 소망이 더욱 견고해져 갑니다(5:3-4). 이 얼마나 위대한 치료약입니까? 그러므로 ! 이것이 내 십자가로구나라고 깨달아지면 곧 지나간 내 죄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러면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잘못을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징계는 우리의 죄만 다루고 끝나지 않습니다. 항상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십자가는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십니다(고전11:32). 그래서 십자가의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시려고 아버지가 때리시는 사랑의 매입니다(3:11-12; 12:8 ).

또 십자가는 보약입니다. 허약한 체질을 강화 시키고 강한 곳을 더 강하게 해주는 약이지요. 십자가가 때문에 우리가 얻는 유익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내요, 또 하나는 순종입니다. 아마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가장 큰 것들이 바로 이 둘일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땅 속에 묻어둔 달란트처럼 될 뻔한 인내와 순종을 우리 마음 속에서 캐내고 드러내줍니다(5:3-4; 5:8; 벧전1:7). 우리는 너무 악하여 고난 없이는 도저히 인내와 순종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불신자는 징계를 받을수록 완악해져 악의 노예가 되고 또 더욱 죄를 짓습니다. 반면에 자유를 누리는 아들인 신자는 즉시 회개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찾고 순종하여 따릅니다.

그런데, 자기 약점이나 죄와 상관 없이 져야 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희생을 하는 경우이지요. 마치 군인이 나라를 위해 고난과 자기 희생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14:12).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복된 것입니다(5:10). 우리 주께서 그렇게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평가해야 합니다. 주께서 귀하게 보시는 것을 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5:41). 우리가 의를 위해 가족을 잃으면 주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가족을 더 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재산을 잃으면 하늘에 재산을 쌓아 주실 것이고, 잠시 여기서 명예를 잃으면 영원한 명예를 확보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는 정말 우리들이 사모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벧전4:12-13).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신 것들을 현세의 허망하고 일시적인 재산이나 명예 등 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가 이런 십자가를 기쁘게 받지 않으면 배은망덕한 것이지요. 비록 그 십자가 하나 하나가 몹시 아프지만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위로를 받는다면 용기와 인내와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딤전4:10).

그렇기에 십자가는 물론 아프지만 기쁨과 감사로 질 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십자가는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인내도 필요 없지요. 인내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견딘다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의 말처럼 무감각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유체가 이탈된 것처럼, 돌처럼 아무 느낌이 없는상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은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인간 세상에 있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가하여 말을 만들어내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나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 주님도 고난과 슬픔의 가시에 찔릴 때마다 괴로워 하시고 아파하시고 우셨습니다(16:20; 5:4; 22:44; 26:37-38; 14:33). 주님이 그러셨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겠지요. 고통의 가시가 찌르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새어 나오는 신음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늘 살아 있습니다. 십자가 위는 싸움터입니다. 현실의 아픔과 우리의 인내가 충돌하여 싸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의 모든 반항하는 감정과 의지를 길들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려면, 꼭 우리는 십자가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합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아파도 인내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정리해봅니다. 고난 당했을 때 우리는 재수 없어 만난 일이니까 할 수 없이 참는다는 세상 사람들처럼 참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는 공정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참습니다. 모든 십자가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공정하신 일이 아니면 행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실 징벌의 십자가라 할지라도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비하면 그 징벌이 너무나 가벼워 두려울 정도이지요. 또 하나님이 우리의 육이 본성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길들여, 겸손과 순종의 멍에를 쓰는 습관이 생기도록 하시는 것은 정말 공정하신 일입니다. 둘째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됩니다. 이것을 믿으면 십자가를 진 등이 아프더라도 영적인 기쁨으로 가슴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십자가의 고통은 영적인 깨달음과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감사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벧전2:19).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평생 십자가를 지고 걷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믿는다는 표식이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표식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인내와 순종으로 가는 겁니다. 인내가 뭡니까? 참는 겁니다. 예수 믿다가, 교회 다니다가 이런 저런 시험과 핍박과 손해 보는 일이 생겼을 때 참는 겁니다. 교회를 섬기다가 혹 시험당하고, 혹 배반 당하고 아무리 힘이 들어도 참는 겁니다. 예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리 미움을 받아도 참는 겁니다. 예수 정의를 위해 학교에서 일터에서 핍박을 받는다고 해도 참는 겁니다. 예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해도 참는 겁니다. 그렇게 참아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참지 못하면 우린 순종하지 않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참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며 믿음 생활 하다가 쉽게 삐지고 쉽게 떨어져 나가고 쉽게 시험에 드는 이유는 십자가를 지고 참는 법을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기분 나쁘고 조금만 어렵고 조그만 억울해도 금방 십자가를 내려 놓습니다. ‘아이, 무거워, 아이 힘들어!’ 그러면 끝내 진짜 순종이 뭔지를 못 배우고 맙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과 죽음과 손해들을 보면 혀를 찰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눈에는 그 죽음과 고난과 손해들이 아름답게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들은 군인이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사랑하는 전우들을 위해 참으며 감당해 내는 희생과 고통과 두려움과 외로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 땀 한 방울, 피 한 방울을 절대 잊지 않으실 겁니다. 반드시 백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잠시 받은 그 고난에 영원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겁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내 죄와 상관 없이도 져야 하는 십자가들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피하고 외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는 군인들입니다. 비겁자요 탈영병들입니다. 기왕에 십자가를 질 것이라면, 자기 죄 때문에 지지 말고, 그리스도의 군인으로서 싸움과 승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천국 십자가 행진에 참여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라면 전쟁터의 살벌함 속에서 견뎌야 하는 것처럼, 성도도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야 합니다. 당연히 십자가는 아픈 겁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도 십자가는 아픕니다. 눈물과 신음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공정하시다고 외치십시오. 내 죄보다 무거운 징벌을 내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훨씬 가벼운 매를 드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의 고난은 잠시입니다. 백배도 넘는 복과 예측하지 못한 은혜로 갚아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믿음으로 주님 주신 십자가를 언제 어디서나 인내로 잘 지고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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