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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9장 : 하루살이 메뚜기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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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15:31-34절 개역개정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오늘은 3부 9장입니다.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리스도인은 내일이 없는 자 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세를 명상하여 현세에 대한 집착과 염려와 공포에서 벗어나 절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그것을 ‘하루살이 메뚜기’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 벌써 해가 져서 어두워 졌기 때문입니다. ‘내일---?’ 메뚜기의 말에 하루살이는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내일이 뭔데? 먹는 거야?’ 하루살이의 다그쳐 묻는 말에 이번엔 메뚜기가 깜짝 놀랐습니다. ‘뭐라고? 먹는 것이냐고?’ 기가 막힌다는 듯 하루살이를 쳐다보던 메뚜기가 말 합니다. ‘내일이 내일이지 뭐야, 이 바보야! 넌 내일도 모르니?’ 그러나 하루살이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내일이라고---?’ 하루살이는 평생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루살이처럼 현세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내세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현세의 삶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사랑합니다. 그 애착심은 너무도 강렬해서 도무지 말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은 다음의 세계를 궁금해 하고 또 영생을 갈망합니다. 그것을 얻으려고 나름대로 노력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짐승과 다를 바 없지요. 그러나 우리의 지성은 세상 부귀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너무 쉽게 마비되고 맙니다. 또 우리의 마음도 순식간에 현세에 대한 탐욕과 야심, 그리고 정욕등에 사로잡혀 도저히 하늘을 바라볼 수 여유가 없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신의 각종 유혹에 빠져 마치 미친 짐승처럼 지상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빠질 수 있는 최악의 함정입니다. ‘애착의 늪’에 빠져 ‘내일’을 모르는 하루살이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비참한 함정에 빠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현세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현세에 대한 지나친 애착을 버리게 하십니다. 십자가 침(針)으로 가끔 우리를 깊숙히 찌르십니다. 정신 차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고통의 삶을 끊임없이 허락 하십니다. 예를 들어 가끔씩 전쟁이나 난리, 또는 강탈이나 기타 재난 등으로 우리를 아프고 불안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마음의 닻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또 현세로부터 참 안식을 바라지 못하게 하십니다. 또는 흉작이나 화재, 부도나 갑작스런 실직 등으로 우리를 빈곤에 몰아 넣으시거나, 적어도 풍족한 처지에 있지 못하게 하시고 항상 쪼들리도록 만드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사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또 이미 가진 것을 너무 의지하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또 때로는 우리가 너무 우리의 결혼생활에만 집착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악한 배우자나 불량한 자식, 혹은 사랑하는 가족의 질병이나 죽음 등으로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재난, 고난 등을 보내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다 불완전하고 허무한 것임을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그런 십자가의 훈련을 통해 현세의 참 가치를 깨닫고 또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게 되지 않으면, 우린 아무도 스스로 정신을 차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세를 생각하거나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밝아진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비로소 이 땅에는 절대 순수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마치 결승점 없는 달리기 시합 같아서,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 해 분투노력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아무런 재난이나 고통이나 좌절, 아픔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무 고통 없이도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버릴 수 있을까요? 어림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꼬리를 무는 재앙들로 계속 아파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주 버리지 못합니다. 하물며 만일 우리가 아무 탈없이 계속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면 어떻게 세상의 그 많은 유혹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인생은 연기와 같고(시102:3), 그림자 같다는 것(시102:11)은 세상 유식자들까지도 다 잘 아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식은 장례식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보다 먼저 죽은 자의 영정 앞에서도 ‘일찍 죽어 불쌍한 자’처럼 생각하며, 간혹 ‘인생은 다 죽는 것이지.’라고 생각하다가도 장례식장 밖에만 나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새까맣게 잊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마치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과 최대의 선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현세의 것들에 대해 감탄하고, 그것들에 집착하고, 비열하고도 어리석은 애정을 바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아주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사랑하든지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의 족쇄를 부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세와 내세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세를 바로 알아야 현세를 바로 보고, 또 현세를 바로 알아야 내세를 바로 봅니다. 내세를 열망하기 위해서는 꼭 먼저 현세를 철저히 무시해야만 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이 땅의 것들을 값어치 없게 본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미워하거나 그것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하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봅니다. 우선 현세의 삶도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돕고 촉진시키는 데 전적으로 이바지 합니다. 하나님은 장차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자신이 우리를 구원한 선한 아버지 이심을 증명하시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지금 이 땅에서 그 보다 훨씬 작은 증거들을 통해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을 통해서 받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 자연을 보십시오. 얼마나 좋습니까?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자연은 우리에게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외칩니다. 자연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총을 가득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현세는 내세의 영광을 위한 준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하늘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들마다 우선 이 땅에서 싸워 이기도록 정하셨지요. 또 우리가 현세에 받는 여러 가지 은혜들을 통해 계속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맛보게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인자하심이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갈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름답고 의미 있는 현세가 아닙니까? 그러나 아무리 현세의 삶이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세의 삶에 비교하면 아주 무시해도 괜찮고 완전히 멸시해도 되고, 지독히 싫어할 만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현세의 삶이 아름다운 것은 내세와 비교하기 전까지만 그렇습니다.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라면 땅은 타향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죽음에 잠겨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육신에서 놓이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는 것이라면, 육신은 곧 감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리가 ‘주와 따로 거하는 것’이라면(고후5:6),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이 땅에서의 삶은 불행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현세의 생활이 우리를 죄로 사로잡지 않는 한 그것을 결코 미워해서는 안되지만, 이 땅에서의 삶을 하늘의 삶과 비교한다면 곧 그것을 무시하고 짓밟아 버려도 됩니다. 물론 현세는 주께서 우리를 배치하신 초소와 같습니다. 그곳에서의 삶이 아무리 고되고 지루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소환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그곳을 지켜야 합니다(롬7:24; 빌1:23-24; 롬14:8). 바울처럼 아무리 죽기를 열망하더라도 그 ‘때’는 하나님의 결정에 맡기고 하루하루 기쁨과 감사로 자기의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늘 죽음을 뜨겁게 사모하며 항상 그것을 명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죄로 얽매이기 쉬운 현세의 삶을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내세를 열망하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일까요?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흔들리지 않는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사모하기는 커녕, 반대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죽을까봐 벌벌 떠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죽음이란 말을 들을 때 우리의 본성의 지각이 두려움으로 흥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죽음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소망으로 그 공포심을 억제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차마 말하기 조차 부끄러운 일입니다. 영생에 대한 그 정도의 경건의 광명이 마음 속에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대 명령 받은 군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 보았습니까? 감옥에서 드디어 해방시켜 주겠다는 데 통곡하는 죄수를 보았습니까? 이제 결혼하자는 데 슬퍼하는 애인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썩어질 육체 장막이 무너지면 곧 새롭고 영원한 영광의 장막을 덧입을 것이라는 소망이 죽음에 아무 위로가 안 될 수 있습니까?(고후5:2-3) 죽음을 통해서 드디어 우리가 나그네의 유랑 생활을 끝내고 기쁨과 행복으로만 가득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우리의 본성이 가장 무서워 하는 그 죽음을 오히려 가장 열렬히 사모하여 구하게 만들 수 없단 말입니까? 짐승들과 나무나 돌같은 무생물까지도 자기들의 현재 상태를 허무하게 보고, 부활의 날을 동경하며,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그 허무함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합니다(롬8:19이하). 그런데 오성의 빛에다 하나님의 영의 조명까지 받고 있는 우리가 죽음의 공포를 초월하지 못한다면 말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자기의 죽는 날과 마지막 부활의 날을 기쁨으로 기다리지 못한다면, 그는 믿음에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려도 됩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잣대로 신자들을 구분했습니다(딛2:12-13; 딤후4:8). 이제 성도의 죽음은 주께서 성도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준비하신 거룩한 수단인데,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하고 당황하게 만들뿐이라면 어디 이것이 이치에나 맞는 말입니까?(참조. 시116:15; 딤후4:8; 계21:4) 그리고 신자들은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도살할 양 같이’(롬8:36)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셨으므로 우리도 또한 분명히 그러할 것입니다(참조. 딤후3:12; 요15:19).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의 것에 전념하여 현세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지 못하면 악인들의 형통 때문에 절망적인 비관에 빠지거나, 아니면 우리도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으로 위안을 삼고 그것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고전15:19). 그러나 우리가 악인들의 처참한 마지막과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내세의 놀라운 행복을 잊지 않고 늘 상상한다면, 현세에 당하는 핍박과 재난과 갖은 고통들을 쉽게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시73:2-3,17; 사66:24; 마24:21-22; 계21:8; 계7:17). 그래서 내세의 소망은 나그네로 이 땅을 걸어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유일하고도 가장 큰 위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으로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죽은 다음에 또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 내세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죽은 다음에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과 지옥이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다는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하루살이가 되려고 합니다. 내일을 잊고 오늘에만 집착하려 들지요. 물론 현세의 삶은 곧 은총이요 아름답고 의미있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내세에 비교하면 그것은 안개와 같고 연기와 같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내일 놀자!’ 메뚜기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오늘’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그로 인한 모든 좌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열망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고전15:31). 그러므로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루살이가 아니고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생할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내세를 묵상하고 바라며, 현세의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내세를 소망하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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