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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0장 : 자유 이용권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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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디모데전서4:1-5절 개역개정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오늘은 3부 10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지요. 그것을 ‘자유 이용권’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디즈니랜드, 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놀이 동산에 가면 얼마나 즐길 것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이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참 재미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놀이 동산에서 하루 놀려면 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놀이 기구 한가지 이용할 때마다 몇 천원씩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놀이 동산 측에서는 ‘자유 이용권’이라는 것을 개발했습니다. 일단 그 자유 이용권을 사면 놀이 동산에 있는 모든 놀이 기구를 얼마든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 종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 이용권’은 놀이 기구들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용권이지요. 자유 소유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세’의 모든 것을 다 누리게 하십니다. 하늘도, 땅도, 별들도, 바람도, 산들도, 바다도, 꽃들도, 동물들도, 생명도, 시간도, 건강도, 재능도, 지식도, 재물도, 의술도, 예술도, 정부도, 가족도, 학교도, 일터도, 다 주셨습니다. 결코 어느 하나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껏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성도들의 마음과 삶을 내세로 향하게 해주는 보조물’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이 세상에서 너무나 좋은 것들을 너무나 많이 누리고 삽니다. 그 대부분은 거저 받아 거저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린 그 좋은 것들을 어떤 태도로 소유하고 관리하며, 또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까요? 세상에 있는 것들은 아무리 좋아도 실제로는 다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죄 짓게 만드는 것들이니까 아주 무시하고 외면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기왕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들이니까 가능하면 많이, 가능하면 더 많이 취하고 누리면서 살아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현세의 좋은 것들에 대해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합니다. 테베 사람 크라테스(Crates)는 재물이야 말로 자기를 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을 금욕주의자라고 합니다. 결혼도 안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실 줄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반대쪽으로 돌진합니다. 얼마를 취하든, 무엇을 취하든, 어떻게 취하든 한계가 없습니다. 계속 더 가지려고 합니다. 끝이 없이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답을 얻으려면 우선 하나님이 그것들을 우리에게 왜 주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 주셨을까요? 첫째는 우리에게 그것들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 나라와 가정 등 모두 우리의 생존에 필요를 채우려고 주신 것들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꼭 우리의 필요만 채우려고 그 모든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둘째로, 우리 삶의 즐거움과 재미를 위해서도 주십니다.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꼭 배 고픔만 면하라는 것이 아니지요. 양식은 우리에게 그 이상입니다. 우리를 즐겁게 하고 유쾌하게 해주지요. 옷도 그렇습니다. 꼭 부끄러운 데를 겨우 가리려고 입는 것이 아닙니다. 단정하고 상쾌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위해 입습니다. 풀과 나무와 열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 일차적인 이용 가치가 있지만, 그런 목적과는 아무 상관 없이 각자 아름다운 모양과 향기 등을 가졌습니다(창2:9 참조). 음악은 또 어떻습니까? 사실 음악을 모르고 노래를 못해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음악의 가치는 금은 보석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합니다. 음악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배에서도 아름다운 찬양을 빼보세요. 너무나 섭섭하고 삭막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세’의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꼭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 만이 아닌, 삶을 즐겁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한마디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만 만들지 않으시고, 그런 필요에 더하여, 혹은 필요와 상관없이 단순히 우리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도 수없이 많이 만드셨습니다. 만물은 단순한 유용성의 가치뿐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미(美)의 가치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든 즐거움이든 무엇을 위해서든 현세의 선물들을 깨끗한 양심으로 이용할 수 있으려면 일정한 원칙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원칙:주신 분을 항상 우러러 보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을 이용할 때 꼭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를 깎아 내리고 거절하는 몰인정하고도 악의에 찬 철학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미친 짐승처럼 항상 날 뛸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의 정욕을 절제하는 일에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육신의 정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한 없이 흘러 넘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것을 구실로 무엇이든 자기의 육욕을 위해 허락합니다. 방종의 길로 빠져 버리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위험한 정욕을 억제하는 첫째 비결이 바로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누릴 때마다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분을 늘 인식하고, 그의 인자 하심에 항상 감사하는 것이지요. 노는 것도 좋고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먹고 마시고 놀다가 우리의 마음이 둔하게 되어 경건의 능력을 잃어 버리고 우리를 불러 주신 사명을 잊어 버리게 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의 육욕은 우리가 양보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한정으로 끓어 오릅니다(롬13:14). 둘째 원칙:‘현세’를 누리면서도 나그네로서 항상 영생의 나라를 열망해야 합니다. 뭐니 뭐니 해도 육의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는 가장 좋은 길은 ‘현세’의 것들을 누리면서 ‘내세’의 것들을 떠 올려 보는 겁니다. 좋은 옷을 입을 때마다 천국에서 입을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하게 한 세마포를 생각해 보는 겁니다. 좋은 집에서 눕고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천국의 내 집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맛있는 밥을 먹을 때 천국에 가서 먹을 영생의 음식들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세상이 이렇게 좋으니 천국은 얼마나 좋을까! 하며 자꾸만 내세, 천국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에 푹 빠져서 천국 생각을 새까맣게 잊어버리면 지금 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하지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사도 바울도 같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29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7:29-31). 우리의 이 세상살이가 나그네로서의 삶이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짐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나그네는 육체보다는 영혼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옛날에 카토(Cato)가 ‘의복에 관심이 많으면 덕에 대한 무관심도 많다’라고 한 말은 정말 맞는 말입니다. 셋째 원칙:부유하면 절제하고 가난하면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자로 삽니다. 어떤 사람은 권세를 누리며, 또 어떤 사람은 낮은 처지에서 삽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어떤 사람은 병 가운데 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명예롭게 살고, 어떤 사람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 살든 우리는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빌4:12). 그래서 부유하면 절제하여 쓰기를 조심할 것이고, 가난하다면 조용히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2:7)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들을 다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언 22:2)는 말씀처럼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손끝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절제하고 잘 인내하지 못하고 억지로 겨우 참는 사람들은 교만해지거나 낙망케 되기 때문입니다. 넷째 원칙:청지기로서 나중에 모든 것을 계산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세’의 물질들을 사용할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청지기가 뭡니까? 주인의 물건을 잠시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주인 앞에 가서 어떻게 관리했는지 일일이 다 보고하고 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인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신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아주 주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잠시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계산하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눅16:2)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면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들로 나를 돌볼 뿐 아니라 힘을 다해 우리 이웃들의 필요와 즐거움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로 이웃들을 섬길 때에 사랑 없이 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이웃에게 나눌 때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란 그릇에 담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럴 때 세상의 물질은 우리의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며, 우리의 경건에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원칙:언제 어디서나 소명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가 무엇을 하든 각각 자기의 소명에 관심을 둘 것을 원하십니다. 소명은 부르심이란 뜻입니다. 그걸 깨닫는 걸 소명의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이 얼마나 경박하고 방탕하며, 또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움켜 잡으려는 야심이 얼마나 맹렬한가를 잘 아십니다. 그로 인해 큰 불안에 사로잡혀 늘 흔들리며 살 것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리석고 경솔한 우리가 ‘현세’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고 망가뜨리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 각 사람에게 독특한 생활 양식을 주시고, 그에 따라 각기 다른 의무를 지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그 한계를 함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자리 그 모양으로 부르셨으니까 그 부르심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거기서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것이지요. 부자로 부르셨으면 부자로서 지고 갈 짐과 의무가 있고, 가난한 자로 부르셨으면 가난한 자로서 지고 갈 의무와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르심에는 의무가 있고 참고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학생이라면 하나님이 학생으로 부르신 겁니다. 부자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신 겁니다. 가난하다면 하나님이 가난하게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 다른 생활 방식을 주시고 그에 따라 또 다 다른 의무를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의무가 있고 또 참고 견뎌야 하는 삶의 무게와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다 자기의 생활 양식이 있고, 또 거기에 따른 의무도 있고, 또 반드시 거기에 따른 불편함과 근심과 지루함과 불안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그 자리에 그렇게 불러 주셨고 또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그렇기에 이 소명의식이야 말로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든 믿음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소명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하거나 소명을 벗어난 일에 한눈 팔지 말아야 합니다. 소명을 받은 자들의 유일한 목표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항상 바르게 살고, 최선을 다해 헌신하며,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은 그 일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십니다. 여러분, 성경은 천국의 모습을 우리에게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시지요. 그 소망을 갖게 하는 방편 중 하나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들입니다. 천국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현세’의 누리는 것들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현세의 좋은 것들을 누릴 때 자유 이용권을 갖고 놀이동산을 이용하는 사람처럼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자유 이용권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고 풍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고 여러분 자신에게 큰 기쁨과 유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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