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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1장 : 사면장(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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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2:8-9절 개역개정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오늘은 3부 11장입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에 관한 말씀이지요. 그것을 ‘사면장’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오늘은 영상으로 묵상하기도 함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글에서 다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들에게 최대의 ‘복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오늘 아침 식사에 고기 국을 준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일부터는 산책 시간을 한 시간 더 늘려 주겠다는 소식일까요? 아니겠지요? 최고의 기쁜 소식은 아마 ‘네 죄를 무조건 용서해서 사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도저히 믿지 못할, 그러나 너무나 갈망하던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면장은 누가 발행해 줍니까? 죄수 자신일까요? 부모입니까? 교도소 소장입니까? 아닙니다. 사형수의 죄를 사면해서 사형을 면하게 해줄 수 있는 힘은 오직 대통령에게만 있습니다. 대통령만이 사면, 감형, 복권의 권세를 갖고 있으니까요. 대통령의 사면권은 옛날 전제시대에 군주 은전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날 그것은 행정부가 사법부를 견제하는 방편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사형수가 사면장을 받는 순간 모든 죄는 탕감받아 죄인은 의인이 되고 사형수에서 자유시민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면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시킨 영원한 사면입니다. 즉,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도중에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다음 두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첫째,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지요. 둘째,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날마다 더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순결한 생활을 점점 더 키워 나갈 수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첫번째 화목의 은혜를 ‘칭의’라고 그러고 두 번째 성화의 은혜를 ‘중생(Regeneration)’이라고 그럽니다. 오늘은 ‘칭의’ 문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칭의를 다루면서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의 선행이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좀더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칭의’라는 말을 쉽게 표현하면 ‘의롭다고 칭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분명히 죄인인 사람을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형의 집행만 기다리던 죄수가 사면장을 받았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왜 칭의가 필요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칭의를 받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칭의 교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중심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으로 말하자면 돌쩌귀(경첩)와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구원과 경건은 다음 두 가지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입니다. 칭의 교리가 바로 그 두 가지 지식을 올바르게 아는 토대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칭의란 무엇일까요? 칭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므로 받는 은혜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임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용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이지요. 칭의는 사랑 때문에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사면장입니다. 칭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성경의 증언들을 몇 개만 찾아 봅니다. 우선 바울의 증언입니다.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참조 갈3:8; 롬3:26)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런 식이지요. ‘하나님이 사면해 주신 자들을 누가 다시 고소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변호하시는 자들을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가?’하나님의 사면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호하시는 자들은 누구도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 사도행전의 말씀은 죄의 용서가 곧 칭의라는 것과, 이런 은혜는 율법을 지키는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증거 해 줍니다.“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참조 눅18:14).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어 되는 것이란 말씀이지요.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그리스도를 힘입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말한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또 에베소서1:5-6에서 바울은 칭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5-7)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면서 칭의를 거저 얻는 죄의 용서에 포함시킵니다. “6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참조 시32:1-2)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의인으로 인정된다’는 말과 ‘화해된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씁니다.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18-21). 칭의가 곧 화해이며 화해가 곧 죄의 용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엉뚱한 말로 성경의 가르침을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컨데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 종교개혁 시대 독일의 루터파 신학자)는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외적으로 전가된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신자의 본질에 내재하여 신자의 존재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킨다.’며 ‘본질적 의’를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됨으로써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지요. ‘칭의’를 하나님의 선언으로 보지 않고 신자의 거룩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지요. 그것은 교묘하게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을 섞는 악한 짓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단순히 제공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는 엉터리 주장입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순종과 희생의 죽음으로 죄인들을 위한 복음의 의가 되셨다는 성경의 분명한 진리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귀한 칭의 사역은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그 공로를 오직 신성에 돌릴 수 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럴 듯한 소리 같지만 그런 주장은 중보자의 공로를 멸시하는 망상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롬5:19; 고후5:21)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에 있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를 ‘본질적 의’로 이해를 하기에 오시안더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여전히 악을 행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질색하여 싫어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그가 죄의 용서(칭의)와 중생(성화)을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칭의는 신자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며, 성화는 이 선언 이후에 신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점진적인 변화입니다. 칭의는 법적 지위의 변화이고, 성화는 삶의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죄의 용서는 확실하고 완전해야 합니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근거로 하여 신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 자신의 행위나 상태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 선언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도 흔들림 없이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담대한 기도생활에 방해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사면장을 받고 출옥한 사형수가 탈옥수처럼 다시 잡혀갈까 불안해 하며 걱정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지요. 물론 의롭게 된 신자는 동시에 계속 거룩해져야 합니다. 죄책은 사라졌지만(롬4:6-7), 여전히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갈등과 승리의 선포는 그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오시안더가 말한 ‘본질적 의’에 대해서 바울은 비통하게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확신을 품고 승리를 선포합니다.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참조, 8:3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속 거룩해 지는 것이지요.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고, 은혜의 전가를 약화시키며, 칭의의 확실성을 떨어뜨리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칭의는 법적 선언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선언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의로 변호하시는 자들은 누구도 죄를 물을 수 없습니다. 또, 교황주의자들은 ‘칭의’가 믿음과 행위의 협력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수많은 증거들은 거짓이 되어 버려야 할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4:2,4; 참조 롬3:27;10:3). 물론 그들은 말 장난을 합니다. 즉 칭의에 도움이 되는 행위는 자기의 자유 의지에서 나오거나 율법적으로 문자만 지키는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성화)의 결실일 경우의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말로 꾸미든 ‘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됩니다(갈3:11-12; 참조 롬10:5,9). 인간의 선행은 중생한 자의 것이더라도 보잘 것이 없어 결코 칭의의 조건이 못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2:8-9) 또 저들은 이중으로 속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확신이라고 하며, 또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은혜를 전가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을 도와 주시는 성령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저들은 다음 같은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그의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죄의 용서에 있다.’ 또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면서 우리의 의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확정하여 말합니다(롬10:5-6,9). 복음의 약속은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고,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못 됩니다. 성도들은 물론 성자들의 사랑도 불완전하며, 가장 완전한 사람도 율법을 다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어떤 행위든 그 자체로서는 상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보다 확실한 말로 믿음을 행위에서 완전히 분리하고 있습니다. “11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합2:4).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롬4:2-5,16). 하나님의 의는 오직 복음에만 나타나 있고, 그 의는 오직 믿음이란 빈손으로 받는 것입니다(롬1:17; 3:21,24,28). 어떤 이들은 오리겐과 기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사상으로 말장난을 합니다.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이제 필요 없지만 도덕적인 행위는 여전히 우리의 의를 이루는 공로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율법의 이것을 지킨다면 또 저것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지요(갈3:10,12; 레18:5; 신27:26). 율법에는 의롭게 하는 능력이 없습니다(갈3:21-22).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하나님의 조건 없으신 죄의 용서입니다(고후5:19). 사람은 죄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이며(롬5:8-10),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로 받아들이지도 자신과 결합시키시지도 못하십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모세로 말미암아 얻지 못한 의를 이제 그리스도를 힘입어 얻게 되는 것이라는 사도행전의 바울의 설교는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행13:38-39).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얻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중재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만 얻는 것입니다(롬5:19).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 를 옷입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면장에는 완전하여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의인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과 사귐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 하시기를 원하여 자기 의를 우리에게 옷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를 보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은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칭의!’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면장을 받은 것입니다. 그 사면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씌여졌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쓰여진 사면장이 진짜 사면장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기록된 사면장을 훼손하는 것을 용납치 않으십니다. 정리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으면 두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들, 사형수들이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의인이라고 칭한다는 뜻이지요. 이젠 ‘사형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하는 것입니다. 칭의! 기억해두십시오. 다음 둘째는 성화입니다. 거룩하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생이라고도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점점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갑자기 성품까지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 보면 조금씩 성품이 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닮는 것이지요. 그리고 버릇도 변하고 시간표도 변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물론 그러다가 옛 버릇이 나와서 또 죄 짓고 또 죄 짓고 자꾸 넘어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한번 받은 사면장은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면장은 오직 예수님의 의로 만들어졌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면장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비록 여러분의 성화가 너무나 느려서 성품도 버릇도 여전히 악하고 시원찮아도 사면장은 여전히 광채가 나갑니다. 우리가 하나님 면전에 예배 드리러 나갈 때 목에 걸고 나가는 패스포드는 사면장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사면장을 목에 걸고 훗날에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할 것이고, 그리고 지금처럼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서 주의 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 사면장 덕분입니다. 사면장을 받은 우리들은 모두 자유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의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제 그 어떤 악한 세력이 여러분을 정죄해도 죄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하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더욱 닮아 가고, 더욱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키며 사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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