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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2장 : 하늘나라 법정(칭의가 은혜일 수 밖에 없는 이유)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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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30:3-4절 개역개정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오늘은 3부 12장입니다. 칭의가 은혜일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말씀이지요. 그것을 ‘하늘나라 법정’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오늘도 영상으로 묵상하기를 함께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법정은 법원에서 소송 절차의 심리 및 재판을 통해 공의를 세우는 곳입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 법정이건 실수와 불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곧 죄가 없는데 죄인이 되거나, 죄인인데 죄가 없다고 판결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유전 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입니다. 그래서 공개 재판 원칙과 민.형사 재판의 경우 삼심제를 두어 최대한의 공정성을 보장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요. 때로는 증인들의 엉터리 증거와 변호사의 실력 등에 의해 판결이 정반대로 뒤집히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 판결에 따라 재판에서 이기면 의인이 되고 지면 죄인이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9:27) 곧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서야 할 법정이 있다는 말이지요. 어디입니까? 하늘나라 법정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법정에서는 세상 법정처럼 절대로 재판의 결과가 뒤바뀌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이 되고, 어떤 죄라도 가볍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간혹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를 어느 정도라도 자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겁없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저들이 세상 법정과 하나님의 법정을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완전무결한 하늘나라 법정을 잔꾀와 요행이 통하거나 혹은 실수가 있을 수 있는 세상 법정과 엇비슷하게 보려는 위험한 착각 때문이지요. 또 그들은 하늘나라 법정에서는 죄의 본질과 몸통을 다룬다는 사실을 잊고 세상 법정처럼 죄의 주변과 깃털이나 다루고 말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 법정에서는 머리카락만큼의 빈틈이나 실수도 없습니다. 또 하나님의 재판은 눈에 보이는 죄의 깃털 정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고 또 본인 스스로도 잘 모를 수 있는 죄의 본질과 몸통을 다루십니다. 그렇기에 하늘 법정에 서는 인간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인간은 과거에도 없었고 또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다 완전한 죄인이요, 타락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의 죄성과 타락은 전적이며 심각한 수준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마음, 의지, 지성이 모두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 순종하거나 그분의 의로운 기준을 따를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인간은 “전적 타락”한 존재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늘 재판관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이나 말장난도 통하지 않습니다(욥9:2-3).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130:3).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이는 곧 칭의가 은혜일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가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거나 의롭다 함을 얻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율법을 다 지키면 곧 의인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의 저주를 벗어난 사람도 없습니다(갈3:10; 신27:26). 아니 혹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하늘 법정에서 통할 수 없습니다. 욥은 율법에 대해서 자기 양심에 아무 부끄러움이 없었지만 하늘의 천사들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기겁을 하며 놀랍니다(욥4:17-20; 15:15-16). 하늘나라 법정이 요구하는 의는 욥이 생각했던 율법의 의를 훨씬 넘어섰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욥 만큼 율법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곧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나도 높기 때문에, 인간은 그 기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거룩함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로 인해 율법을 완전히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죄의 실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맛 3:20) 그렇기에 칭의는 결코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우쭐해집니다. ‘너 보다는 내가 낫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의 조차도 하늘나라 법정에는 내 놓을 수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우리의 의라는 것 태양 앞에 있는 반딧불 만큼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와 비교할 때 자신의 의 때문에 제법 우쭐해질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그런 확신을 잃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의를 자랑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의 의를 미워하십니다(눅16:15).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의 의를 만족 시킬 수 없습니다(고전4:4). 이런 사실은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AD.354-430)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반드시 썩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간에게 한가지 유일한 희망은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이다’(딤전2:5-6 참조). 이것이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은 타락한 인간에게 그 희망 외에는 다른 희망이 결코 없다고 증언합니다. 또 베르나르드(AD.1090-1153/중세 신학자)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셨던 상처를 제외하면 나의 쉴 곳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때론 내가 중대한 죄를 짓고 양심이 혼란스러워 지지만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아주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오직 주의 자비만이 나의 공로이다. 주님께 자비가 있는 한 그것은 분명 나에게도 공로가 있는 것이다. 주의 의가 곧 나의 의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의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분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라고 말합니다. 곧 우리의 공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만이 우리의 넉넉한 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베르나르드가 이렇게 선행에 대해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아무 공로없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공로가 있는 체하는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의 공로가 공로가 되는 이유는 오직 주의 풍성한 자비 뿐이다. 그외에는 어떤 것도 우리의 공로가 되지 못한다.’ 곧 인간은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로워진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칭의는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너무나 쉽게 자기를 찬양하고 자기 만족에 빠지며 교만에 사로잡힙니다. 베르나르드는 그런 자들을 교만하고 불량한 하인 같은 인간들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은 자기 위에 덮이는 은혜를 마치 자기의 것처럼 여겨 아주 사소한 일에도 우쭐거리며 자기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벽에 달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밤에 그토록 찬란했던 별들도 태양 앞에서는 빛을 잃는 것처럼, 사람 중에서는 특별한 순결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순결 앞에서는 그 빛을 신속하게 잃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있던 것들까지도 다 드러날 것입니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4:5). 이렇게 되면 거들먹거리며 뒤에 숨어 있던 우리의 양심은 이미 잊어버렸던 일들까지도 모조리 실토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를 미혹하여 짓게 한 모든 죄를 알고 있는 마귀는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공격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존중하며 자랑하는 눈에 보이는 선행들이 그 곳에서는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나라 법정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진정하고도 근본적인 순결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 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날 봉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하는 위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까지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위선도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결국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잠시동안은 자아 도취에 빠져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자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금방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입니다. 꿈에 많은 재물을 벌었다가도 꿈이 깨면 다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진지하게 하나님의 법정에서 요구되는 의를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은 우리들의 모든 행위가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이 완전히 부패이며, 영광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전적으로 치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잠16:2; 21:2; 욥9:20).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에 스스로 속아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 속에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십니다.(욥25:4,6)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바르게 검토하려면 반드시 자기 양심을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어 내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에 대한 일체의 찬양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교만의 술에 취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벧전5:5; 약4:6; 잠3:34). 그리고 또한 우리가 하늘나라 법정에 서기 전에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세리는 자기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감사했습니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했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함을 받았지만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의한 자가 되었습니다(눅18:13-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마11:28; 사61:1-3; 마9:1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면 우리의 모든 교만과 자기 만족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가 의롭다 칭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신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를 용서하실 때도 그 공의가 만족되어야 합니다. 이 만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받으신 진노는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기에 우리는 그 분의 공로를 입어 의롭게 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인간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됨으로써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서 5장 19절에 나타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에 기초합니다. 우리에 대한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나라 법정에 서는 모든 인간이 다만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은 반드시 하늘나라 법정에 설 날이 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법정은 그 어떠한 죄도 간과하거나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실수도 없습니다. 또 죄의 깃털만 보는 것이 아닌 몸통까지 살피기 때문에 사형 선고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살벌한 법정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 법정에서 우리를 위한 유일하고, 위대한 변호사이십니다. 나에게는 죄 밖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애통해 하며, 오직 그리스도께 자기의 변호를 의뢰하는 자들만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부끄러움을 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가 은혜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한낮 소각장에 던져져 불태워지는 쓰레기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TV에 나오는 악당들과 비교하여 자기는 의롭다고 우쭐대는 미련하고 아둔한 인간이 바로 나 자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면서 비판하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나 한테서 무슨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 뿐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죽어 너를 살리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삶이지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혜를 인해서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한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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