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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3장 : 일석이조의 돌(칭의가 은혜일 때 얻는 두 가지 유익)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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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8:35-39절 개역개정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은 3부 13장입니다. 칭의가 오직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사실이 주는 두 가지 유익에 대한 말씀이지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는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의 양심에 는 온전한 평안을 주는 일석이조의 유익이 있습니다. ‘일석이조의 돌’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일석이조란 말이 무슨 뜻일까요? 돌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말이지요. 대단한 실력입니다. 어떻게 하면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두 마리 새 중에 심장이 약한 새의 옆에 앉아 있는 새를 먼저 맞추면 됩니다. 그러면 심장이 약한 새는 자기 친구가 돌에 맞아 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심장이 멎어 떨어질 것입니다. 우스개 소리였습니다. 어쨌든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것은 정말 놀라운 수확이지요. ‘칭의 교리’가 그렇습니다. 칭의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또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므로 받는 은혜라고 그랬지요.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는 칭의는 첫째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둘째로 우리에게 평안의 확신을 줍니다. 일석이조의 효과이지요. 만일 그렇지 못한 ‘칭의 교리’는 ‘일석이조의 돌’이 못 됩니다. 아니 단 한 마리의 새도 잡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칭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꼭 두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완전한 평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칭의’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태도에 따라 이룰수도, 혹은 이루지 못할 수도 있는 목적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칭의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든지,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완전한 평안을 누리지 못한다면 사실 그 칭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이 문제는 칭의가 오직 100%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느냐 아니면 어느 정도 우리의 협조가 보태진 것으로 보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순전히 자기의 노력과 선행으로만 의로워져야 한다는 정신나간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 턱없이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여기서 다룰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칭의를 완전히 은혜의 열매로만 보느냐 아니면 우리의 협조의 결과로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은 충만히 나타날 수도 있고, 큰 손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이 완전한 평안을 얻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양심의 평안은 ‘돌멩이’ 하나로 잡아야 하는 두 마리의 새입니다. 그렇기에 ‘칭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어야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며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의’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꼭 ‘하나님께만 감사 하라’는 권고가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것이 두 마리 새를 잡는 그 ‘돌멩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칭의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한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또 우리 양심도 완전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돌멩이’는 ‘겸손의 돌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성경 말씀들을 몇 개 찾아 보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글부터 봅니다. “이 예수를 ------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롬3:25-28).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만 의로우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예수 안에서 자격없는 죄인들을 거저 용서 하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들을 값없이 의롭다 하지 않으시면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셋째 그러므로 절대 자기의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조건 하나님께 감사만 하면 될 터인데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그 영광을 훔치려 듭니다. 기를 쓰고 자기 의를 자랑하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구원에 관하여 자기도 조금은 공로가 있지 않겠느냐고 우기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관한 성경의 태도는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아무도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고, 어느 누구도 그 속에서 자기 공로를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참조. 롬3:19; 겔20:43-44; 렘9:23-24; 고전1:30-31).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온전히 자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보편적인 원칙으로 취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이사야처럼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해야 합니다.“27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3:27; 사45:25)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맹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겸손한 척 하면서 슬쩍 자신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정도의 재주는 타고 났습니다. 교만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겸손하면서 자기의 의나 공로를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단코 우리의 의나 공로를 자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심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자랑하는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훔치는 것입니다. 자랑은 부스러기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도 우리의 육에 붙어 있는 모든 자만과 자랑을 압도하여 침묵시키려고,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의 칭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절대 거기에 내 자랑과 공로를 섞지 않겠다고 맹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한 쪽 새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칭의’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하면 양심의 견고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양심은 다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심판대 앞에서 눈곱 만치도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평안을 얻든지, 아니면 심판의 두려움에 짓눌려 지옥의 고통에 빠지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칭의가 그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완전하고 영원한 평안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받은 칭의는 우리 양심의 평안에 부족함이 없는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칭의가 100%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우리 힘을 조금이라도 보탠 것으로 얻는 것이라면 우린 양심에 이런 평안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얻는 것이라면 정말 보잘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자의 잠언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9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냐.”(잠20:9).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얻은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의가 필요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홀로 계획하시고, 친히 만드셔서 선물로 주신 의만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우리의 의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의 약속도 다 헛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왜요? 아무도 자기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충족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그리고 당연히 행위를 조건으로 하고 있는 모든 약속은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키지도 못할 조건이라면 그 약속은 장난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믿는 자에게서만 실현 됩니다(고전2:5; 고후13:4).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원래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것이고, 우리가 믿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시119:7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희망을 하나님의 자비 위에 세워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 행위를 완전히 무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양심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도 이렇게 말합니다.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이 일을 선포할 때에 아무도 불안을 느껴서는 안 된다.’ 베르나르도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5-26)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의 모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품는 이유의 전체이다. 믿음이 우리를 돕고 진리가 우리를 구할 때, 비로소 아버지의 가슴 속에 숨겨져 있던 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알려지며, 성령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롬8:16).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 하심으로써 우리를 설득시키실 필요가 있다. 확실히 믿음은 이 일에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중간 통로이다.’ 다시 말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신의 의에 대한 절대 확신이 없으면 결코 완전한 평화와 담대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인이 이제 나는 죄가 없다는 ‘절대 확신’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가 나의 행위가 아닌,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온 것임을 믿기 때문에 그 의가 완벽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롬5:5; 8:35,39). 그리고 이 확신 때문에 우리는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습니다. “12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또한 하나님을 ‘아바 아바지’라 부르며 담대히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갈4:6; 롬8:15; 히4:16). 그래도 육신에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불안하여 하고 의심하며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우리는 천국 기업에 대한 우리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물론 이 때의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일에 어떤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을 담아 주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로 만들어 주신 그릇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십시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정리해 봅니다. 칭의란 죄인을 의인이라고 불러준다는 말인데, 거기에는 전혀 죄인의 공로가 들어 갈 자리가 없습니다. 사형 집행만 기다리던 죄수가 갑자기 용서 받고 완전한 자유시민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에는 오직 대통령의 사면장 밖에 없듯이,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의롭다 여겨주시는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이고 은혜입니다. 칭의에 관한 한 사람이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00%,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 홀로 결정하시고 하나님이 홀로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한번 주신 사면장은 결코 취소하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대통령의 사면장을 받고 감옥에서 해방되어 사회로 학교로 직장으로 가정으로 돌아 갔는데 다시 죄를 지으면 즉시 다시 감옥으로 잡혀 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큰 죄를 지었으면 다시 사형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사면장을 받고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다시 죄를 짓고 또 짓더라도 다시 감옥으로 잡혀와 다시 사형수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죄를 짓고 계속 못되게 놀면 하나님한테 매를 맞고 징계를 당합니다. 하지만 사형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으면서 매도 맞고 벌도 받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갑니다. 절대로 다시 사망과 죄의 감옥으로 돌아가거나 다시 사형수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힘을 줄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줄 것입니다. 더욱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칭의 교리는 두 마리 새를 동시에 잡습니다. 하나는 오직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께만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바른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 새는 우리 마음에 흔들리지 않은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사면장을 주시고 의롭다고 해 주셨기 때문에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하고 나 하고 50:50으로 계약을 맺은 것이라면 내게 적어도 50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의 계약은 나랑은 아무 상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100% 마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 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아주 잃어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도 칭의 계약서에 담겨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영원토록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받았기에 우린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이 믿음으로 점점 더 멋진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고 하나님께 헌신하여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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