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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4장 : 오염된 그릇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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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10-27절 개역개정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오늘은 3부 14장입니다. 칭의는 오직 은혜로만 주어지며, 모든 인간의 선행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며, 중생인의 선행은 칭의의 결과라는 말씀이지요. 그 내용을 ‘오염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오염’이란 말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그릇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그릇으로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오염된 그릇을 본 이후로는 쉽게 그 그릇에 물이나 음식물을 담아 먹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오염된 그릇과 같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선행을 해도 그것은 결코 그 사람을 착한 사람이나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자건 불신자건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그 어떤 선행도 인간을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의 선행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중생한 사람에게 있어서의 선행은 성령에 의한 칭의의 결과일 뿐이며 계속 날마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집니다. 먼저 아담의 타락 이후 죄로 죽은 인간의 모습을 살펴 봅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다음 네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인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우상 숭배 등에 파 묻혀 있는 사람이지요. 둘째는 이중 생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례전(예배)에도 참여하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셋째는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나 위선으로 사악한 마음을 감추었습니다. 마지막 넷째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에 힘을 다 하는 자들이지요. 이상 네 종류의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착한 일도 하고, 선을 행하고 의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다 자기의 착한 일과 그 선행으로 의로워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의 선행은 정말 그들 속에서 나온 선행일까요? 인간은 정말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기는 한 걸까요? 먼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입니다. 자연인은 더럽고 타락한 상태이기에 오염된 그릇이지요. 성경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은 절대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렘17:9; 창8:21; 시94;11; 롬3:18; 시14:2-3; 갈5:19-21). 로마서 3: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칩니다.“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되어 있기에 세상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자연인도 얼마든지 착한 일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의 선행은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세상을 유지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이 얼마나 정의와 사랑을 귀하게 여기시는지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하기 위하신 것입니다. 곧 자연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선행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서 나온 선물이란 말이지요.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인 자연인들에게도 재능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선행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 중 누가 하는 선행이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이 착한 일을 하든, 이단 교인이 하든, 깡패가 하든 다 하나님이 선에 대한 지식도 주시고, 하고 싶은 마음도 주시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주시기 때문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은혜가 아니면 사람은 절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왜요? 사람은 선에 대해서는 무덤에 누운 시체와 같기 때문입니다. 열린 무덤처럼 그 속에는 오직 악하고 더러운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손을 살짝 거두시면 사람은 누구든 즉시 이기심으로 충만해집니다. 오직 자기만 알고 자기만 사랑하게 됩니다. 남을 위해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심지어 살인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 주시면 깡패도 착한 일을 하게 됩니다. 테러리스트도 남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쏟아 줄 수 있습니다.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한다고요? 스스로 도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의 손을 펼쳐서 악하고 더러운 자들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유지시키고, 정의로 인간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선을 행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심으로 인간의 삶에 선과 의가 필요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하기시 위함입니다. 그래야 이 사회가 숨 쉬고 살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을 행했다고 해서 그 선이 그들을 결코 의롭게 하거나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행의 동기나 목표 때문입니다. 자연인이 어쩌다 선을 행하는 것은 선행에 대한 열망보다는 단순한 야심이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이지요. 인간에게 있어서 ‘바른 행동’이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자연인들의 행동은 아무리 착한 것도 그 목적과는 상관 없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섬기려고 선을 행한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 그런 행동을 어느 하나라도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들은 길을 벗어나서 달음질을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힘을 다해 달릴수록 목표에서 멀어지며 더욱 더 불행해 지는 것이지요. 차라리 바른 길에서 절며 가는 편이 길 밖에서 잘 달리는 것보다 훨씬 더 낫지 않겠느냐고 어거스틴은 묻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자연인은 아무리 덕망이 높더라도 그 마음이 부패하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망칠 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 평생 멸망과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요일5:12).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자들은 나쁜 나무와 같아서 결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지요.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없이 자연인이 선을 행한다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고, 엉겅퀴에서 포도 열매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노골적인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롬5:10; 골1:21).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의 피로 죄가 용서 받기 전에는 아무리 인격을 수양하고 도를 닦아도 스스로 의로워 질 수도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인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되기 전에는 아무리 도를 닦고 선을 행해도 결코 그 선행으로 의로워 질 수 없습니다(엡2:4-5, 8-9; 딤후1:9;딛3:4-5,7; 롬11:6).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 그의 선행도 결코 자신에게 아무 공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은 이중생활을 그리스도인과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인이고 교회 밖에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과 교회 안 밖에서 모두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 역시 철저히 오염된 그릇이지요. 안팍이 다르거나 겉만 예쁜 색으로 단장한 그릇인 셈이지요. 이들 역시도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선을 행하고, 의로운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선행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서 나온 선물입니다. 불신자들을 통해서 선을 행하게 하시는 목적과 같지요. 그렇기에 이들도 역시 자기들의 선행으로 의로워 질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비극적인 사실은 그들의 불결한 양심이 증명합니다. 중생(성화)이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되지 못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연인들보다 더욱 불쌍한 것은 자기들의 악함이 지적 받았을 때에 자기들에게 전혀 의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약간이라도 의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의 양심은 심각하게 오염된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오염된 것이고 더러운 것입니다. 더러운 그릇에 담긴 성물과도 같지요(학2:11-14). 도무지 그런 것들로는 자기 의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첫 걸음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것인데 부패한 양심으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경외가 빠진 모든 제사와 선행은 하나님께 도리어 무익하고 역겨운 오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사1:13-17; 잠15:8; 창4:4-7).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참 믿음만이 참 선을 행하고 의로워지는 첫 걸음이 됩니다(행15:9). 마지막으로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중생한 신자들이지요. 참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행은 어떨까요? 그 선행이 그를 의롭게 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입니다. 거듭난 사람들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 선물을 담아 내는 그릇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선행에서도 냄새가 날뿐입니다. 성경에서 성자라고 할 수 있는 위인 한 사람을 골라 그를 살펴보십시오. 그의 삶 구석구석에서 펄펄 나는 육의 부패한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습니까? 율법은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됩니다(약2:10). 율법은 계속 모든 인간을 정죄합니다. 율법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흠과 허물이 없는 선행은 없습니다. 이미 의로워진 그리스도인들의 선행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중생한 신자라 하더라도 자기의 힘으로는 도무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하늘의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욥2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하나님이 계속 의인으로 봐 주시는 것은 믿음으로 얻은 어린 양의 피로 닦여진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컨데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월말고사 보듯 집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여러분의 부모에 대한 효도를 점수 매겨서 집에서 계속 자녀로 살게 할 것이냐 아니면 집에서 쫓아 날 것이냐를 결정한다면 어떨것 같습니까? 아마 여기 있는 여러분 대부분은 집에서 쫓겨났을 겁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이 부모에게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를 따져서 점수 매기고, 그 점수에 따라 집에 둘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자식이기 때문에 용납하고, 사랑하고 함께 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안에서 오직 사랑으로 보십니다. 오염된 그릇이긴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의 피를 발라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감싸 주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거룩해졌다는 사실을 증명하게 하시려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로 하여금 선행을 하게 하고, 의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곧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그가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칭의’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가 외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악인을 의인이라 ‘칭’해 주시고, 그 믿음을 인해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여 점점 더 거룩해지고, 죄로부터 멀어져 가게 하시는 것이지요. 어려운 말로 성화는 칭의의 열매이자 증거입니다. 칭의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면, 성화는 우리가 의롭다 여겨진 증거요, 구원받은 표시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칭의 따로, 성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구원이 단지 법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믿는 자의 삶이 변화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지요. 그러므로 신자들도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만 계속 정화되고, 보속되고, 모든 불의를 가리움 받고 또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히4:14-16; 엡2:8-9). 이처럼 참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몇 가지 독특한 유익이 있습니다. 우선 성도들은 자기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 안에 거하시며, 자기를 통하여 선을 행하신다는 자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큰 힘과 위로를 얻는 것이지요. 그런 행위들을 하나님의 선물로 볼 때 그것들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 볼 수 있게 합니다(참조 롬8:15). 그래서 우리는 선행을 소명의 결과로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우리의 의의 근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불러주신 결과인 것이지요. 여기서 성도의 감사와 힘과 기쁨이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간혹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것 때문에 더 은혜를 베푸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원인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나타내시는 시간적 순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23에서 사망과 영생을 대조 시키지만 죄와 우리의 선행을 대조 시키지 않고 죄와 하나님의 은사를 대조 시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지요. 스콜라철학자들은 교묘한 말 장난을 합니다. 즉, 우리의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충분한 가치가 없기는 하지만 그 선행이 쌓여서 죄인에게 충분한 보상이 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의 의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범죄는 잉여 업적에 의해 충분히 보상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잉여공로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오해 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요구가 얼마나 엄격한지를 잘 모른 것이고 또 하나는 죄가 얼마나 중한 지를 잘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의를 다 합쳐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의 모든 선한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잉여업적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눅17:7-9). 우리가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통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뒷골목이나 동네 마당에서 통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은 똥파리가 빠진 주스와 같기 때문입니다(시143:2). 오직 우리를 구원하신 근거는 모두 우리 밖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의 공로는 아무데도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정리해 봅니다. 일단 오염된 그릇에 담아 내는 것은 다 불결합니다. 선행에 관해서는 자연인이든 중생인이든 모두 오염된 그릇임에는 똑 같습니다. 어떤 선행이든 다 하나님의 요구의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자기의 행위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버릇은 빨리 버릴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면장을 받아 의인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계속 의인으로 있는 것도,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서 의인으로 천국에 들어 가게 되는 것도 우리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피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항상 오염된 그릇을 보지 않고, 그 그릇 안밖에 발라진 예수님의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과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변찮는 의가 되고 공로가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오늘도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 기도하며 그의 은혜를 받아 더욱 더 정의를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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