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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5장 : 캄캄 먹구름(하나님의 은혜와 자기 공로의 자랑)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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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1:28-31절 개역개정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 오늘은 3부 15장입니다. 자기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도적질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린다는 말씀이지요. 그 내용을 ‘캄캄 먹구름’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옛 시조 중에 이런 시조가 있습니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 중천에 떠 임의로 다니면서 /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조집, ‘청구영언’(1728)에 나오는 유명한 시조로 고려 공민왕 때 이존오(1341-1371)가 지은 시조이지요. 사랑하는 임금을 둘러싸고 임금의 총명과 공정함을 흐리게 하는 간신배 신돈을 구름에 비유한 노래입니다. ‘따라 가며 덮나니’라는 대목이 특히 가슴에 남습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도, 찬란하게 부서지는 별빛도 먹구름이 잔뜩 끼면 허사가 됩니다. 먹구름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공로에 대한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리는 먹구름일 뿐입니다. 손바닥만한 먹구름이라도 다 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공로’란 말은 성경에 있지도 않고 또 대단히 위험한 말입니다. 우리의 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무엇입니까?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위라면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집니다. 여기까지는 이미 여러 번 힘주어 말한 것이지요. 그런데도 포기할 줄 모르는 저쪽 사람들은 집요하게 또 다른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칭의를 얻는데는 좀 부족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는 조금이라도 공로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공로’란 말은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흔히 사용한 말입니다. 그들이 무심코 사용한 이 작은 말 한 마디가 후세에 얼마나 많은 해독을 끼쳤는지를 생각하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공로’라는 개념을 사람의 행위에 처음 적용한 사람은 터툴리안(Tertullian)입니다. 우리의 선행의 가치는 ‘공로’란 말을 쓰지 않고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데 구태여 그런 말을 썼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공로’란 말은 스스로 대단한 자존심을 포함한 말이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심히 해로운 자만심을 불어 넣을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어거스틴도 그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는 먹구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가끔씩 주의를 환기시켜줍니다. ‘아담으로 인해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잠잠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 것도 돌리지 말고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릴 것이다.’ ‘--- 성도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모든 것이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사람에게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습니다. 또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다음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은혜와 자비심과 위대한 관용이다.’ 또 베르나르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공로가 있는 체 하지 않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이 도리어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또 그는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라고 물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이 충분한 공로가 된다.(겔36:22,32)’ 그렇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구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눈꼽만큼의 의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의 정성이나 착한 행위 등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 덕분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맞다. 우리가 의인이 되고 천국에 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그것을 칭의라고 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의인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점점 더 거룩해지는 성화의 과정에서는 선을 행해야 그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쉬운 말로 고치면 이런 말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지만, 복을 받고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성도들의 행위에 따른 것이다.’ 많이 들어 본 이야기 아닙니까?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칭의를 받고, 구원받는 장면에서는 인간의 공로가 큰 역할을 못하지만, 그 뒤로 이런 저런 복을 받고 상을 받고 더 큰 은혜를 받는 데에서는 인간의 공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듣기에 그럴 싸한 말 같지만 바로 이런 생각이 광명한 햇빛을 가리는 캄캄 먹구름입니다. 구원은 물론 우리의 모든 선행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따라 해 보십시오. ‘구원도 은혜, 선행도 은혜, 오직 은혜, 모든 것이 은혜, sola gratia!’ 인간의 선행의 가치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은혜입니다. 여전히 롬바르드나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은 선행의 공로를 하나님과 사람이 나누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담의 죄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덤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좀 심하게 다치기는 했어도 병원에 입원한 상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 아래 있지만 인간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하나님도 찾을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결정할 수 있고, 선을 행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그럴 수 있고, 사람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은혜는 상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죄와 죄에 종이 된 사람의 모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죄 아래 종 노릇 하는 인간은 무덤에 누운 시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임해야 그 시체에 생기가 들어 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부활하여 산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믿기도 하고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자랑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가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커먼 구름을 만들어 광명한 햇빛을 가리는 것이지요. 이미 여러 번 밝히 말한 것처럼,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와 어깨를 겨루려면 율법 준수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어림없지요. 아마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보시면 두 가지가 보일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의이며, 또 하나는 사람의 더러움과 위선과 부끄러움 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라도 그 곳에서 우리의 것을 내세운다면 죄와 악밖에 없습니다. 만일 혹시 우리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그 선행으로 어떤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못 박습니다. 우리는 명령 받은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도 그저 자기를 ‘무익한 종’이라고 생각해야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행을 선물로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불러 주시며, 또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상까지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선물에 대하여 보너스까지 더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갈6:9; 살후3:13 참조). 우리의 선행이 가치를 갖는다면 오직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선행을 바르게 받아 누리려면 다음 세 가지를 잘 해야 합니다. 첫째,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은인이신 하나님에게 돌아갈 칭찬을 도둑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궤변가들은 ‘선행의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 낸 말씀이 집회서 16:14절과 히브리서 13:16절입니다. 물론 집회서의 정경성을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경 여부를 떠나서 보더라도 그들은 그 말씀을 본래대로 인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집회서의 헬라어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 이 말을 그들은 라틴어로 이렇게 번역합니다.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리라.’ 분명한 오역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는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만한 말씀이 없습니다.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신다’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을 언뜻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행을 요구하시고, 또 우리의 선행을 보시고 그것을 근거로 은혜를 주시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마25:21,29; 눅8:18).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그 모든 복이 다 은혜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요1:16; 사55:1).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공로가 되거나, 우리의 믿음이 구원이란 보상을 얻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또 그 선행에 대한 보상은 선물에 대한 보너스라고 보면 됩니다.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사람의 공로로 대치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신학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다른 생각을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같은 사람은 ‘최초의 은혜’란 말을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 즉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현재 할 일이다’라고 말 합니다. 아,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하고 불경스러운 말입니까!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을 뿐이라고 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시작하셨을 뿐이고 나머지는 우리가 이루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보내진 것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곧 친히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시기 위해서 라고 말씀 합니다.“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능력 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의와 구원을 둘 다 거저 받는 것입니다(요일5:12; 첨가요5:24; 6:40; 딛3:7; 롬5:1-2; 요일3:24; 엡2:6; 골1:13). 아무도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지 않고는 자력으로 의로워지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생명의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요5;12; 롬14:23; 마7:18; 눅6:43) 로마교회의 신학은 성경은 물론 어거스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 어리석은 자들의 어머니라 할 수 있는 소르본느(Sorbonne)학파 사람들은 모든 경건의 요점이라 할 수 있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말을 어디다 팔아먹었나 봅니다. 저들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고백하기는 하지만, 나중에 그 말을 설명하면서 선행은 자유의지의 능력에서 나오고, 모든 선행은 공로가 된다고 주장합니다(토마스 아퀴나스). 물론 영악하게도 그들은 첫째 원인이 은혜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라 할 수 있는 피터 롬바르드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롬바르드는 줄기차게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 마치 소경처럼 어거스틴이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가두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없이 하는 모든 일은 죄입니다(롬14:23).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에게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자랑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엡2:10). 그리고 이렇게 든든한 기초 위에 분명히 섰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선행을 격려하고 또 교훈하고 위로하는 많은 성경 말씀들을 바르게 받을 수가 있습니다(요일3:8-9; 벧전4:3; 딤후2:20-21; 마16:24; 고후4:8-10; 딤후2:11-12; 롬8:38-39; 마7:20).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의롭게 되는 일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우리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광채를 가리는 일이 됩니다. ‘공로’라는 말은 찬란한 햇빛을 가리는 먹구름 떼와 같지요. 구름 한 점 없이 눈부신 가을 하늘처럼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일 점의 자기 자랑 없이 하나님의 영광으로만 충만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퀴즈를 하나 내 드립니다. 잘 맞춰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다음 말들 중 틀린 것을 두 개 고르십시오. 틀린 것, 1.제가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하나님이 큰 돈을 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인색한 마음 없이 십일조를 할 수 있었습니다. 2.이를 악물고 40일 금식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무너졌던 내 건강과 사업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3.자동차 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어 너무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것들을 받았습니다. 4.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예, 답은 1,2번입니다. 왜요? 그 말들 속에는 캄캄 먹구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심히 일했더니’,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머리가 좀 좋아서’, ‘제가 좀 부지런해서’,‘열심히 기도를 좀 했더니’ --- 등등 이런 말들이 사실은 다 캄캄 먹구름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떤 자랑스런 일을 하던지 간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십시오. 대신 우리 자신에 대한 자랑은 무엇을 할까요? 예, 연약한 것, 미련한 것, 악한 것, 교만하고 게으른 것을 자랑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셔서 이런 저런 착하고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캄캄 먹구름 인생이 되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쨍! 하고 비치게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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