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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6장 : 바늘 가는데 실 간다(믿음과 행위의 관계)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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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야고보서2:14-26절 개역개정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8월 22일 목요일

 

오늘은 316장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이지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바늘 가는데 실 간다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림자처럼 꼭 함께 따라 다니는 사이를 말합니다.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요. 믿음과 선행은 바늘과 실의 관계와 같습니다. 믿음이 가면 반드시 선행도 따릅니다.

우리가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어떤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말에 대해 굉장히 기분 나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우리가 선행 파괴주의자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 부칩니다. 저들의 터무니 없는 거짓 비방들은 간단한 말 한 마디로도 충분히 반박될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선행을 폐기한다는 저들의 비방에 대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비방하는 저들이 솔직히 선행에 대해 얼마나 열성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들은 실제로는 온갖 추악한 생활로 세상 구석구석을 마음대로 더럽히면서 세상에서 제일 선행을 사랑하고, 선행을 위하여 제일 염려하고 슬퍼하는 체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믿음을 찬양하면, 그것 때문에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펄쩍 펄쩍 뜁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 없이 성립되는 칭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신칭의 교리를 요약하면 이런 것입니다. 곧 바늘과 실같이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처럼 참 믿음에는 참 선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도 물론 여전히 칭의의 근거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만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르고 얼마나 명쾌한 말입니까? 만약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집중하면 그 말이 얼마나 정당한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제외하고는 세상 어떤 의도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선행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우리의 칭의나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았다는 말은 동시에 또한 그의 거룩함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때문입니다.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동시에 반드시 거룩하게도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은혜는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줄로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을 구속하시며, 그 구속하신 자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며, 그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29-30) 그러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은혜의 수단이신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거룩함에 이를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의와 거룩 두 가지 모두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의와 거룩그 둘은 구별은 할 수 있어도 분리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고전1:13). 만약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면 마땅히 그의 거룩함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것 처럼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 비방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는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정을 억누르고 포기하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선행이 아무 공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심이 식어버릴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이 아무 공로나 가치가 없다고 믿는 사람과 우리의 행위가 보상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 과연 어떤 사람이 훨씬 더 선행을 열망하게 될까요? 우리의 대적자들은 사람들이 자기의 행위에 값을 매길 수 있어야만 선행을 더 갈망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들은 아마 우리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또 그 주신 힘으로 행한 우리의 선행에 상을 주시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그 엄청난 은혜와 너그러우심을 도저히 믿지 못하는 듯 합니다

아무튼 저들의 비방은 다음 두 가지 이유만 갖고도 부끄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무슨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거나, 사람이 하나님께 자기 노동에 값을 매겨 팔려고 하는 짓은 참으로 어리석고 쓸데 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사람의 선행은 그럴만한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드리는 경배와 사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상 받을 소망이 전혀 없음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둘째,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자극하는 가장 강렬한 충동은 보상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 자기 행동에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할 때 훨씬 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정이 불타 오르는 법입니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이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9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0,19)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했는데(9:14), 그렇게 깨끗함을 얻은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악에 물들어 그 거룩한 피를 모독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10:29). 은혜로 죄에서 해방되었는데 이제 우리가 참 자유를 가지고 마땅히 의를 실천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6:1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니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하늘의 나그네로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3:1-3; 6:20; 2:11-13). 우리는 이미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었으니 거룩하지 못한 행동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고전3:16-17; 고후6:16; 2:21). 우리는 이제 빛의 자녀이니 어둠의 일을 벗어 버리고 빛의 자녀답게 살자는 것입니다(5:8-9; 살전5:4-5). 하나님이 우리를 이같이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13:34 참조).’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요한의 이 말보다 더 강력한 동기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아버지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요일3:3), 그리고 우리의 주 예수께서 우리의 모범이 되셨기 때문에(벧전2:21; 15:10; 13:15) 우리는 넘치는 열정을 품고 선을 행하는 길로 달려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형수가 사면장을 받고도 여전히 감옥에서 사형 날짜만을 기다리겠다고 고집한다면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겠습니까? 기뻐 뛰며 다시는 감옥에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었다는 이 진리를 온전히 깨닫는 사람은 기뻐 뛰며 이제는 죄가 아닌 사랑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치며 사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내 행위는 아무 가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거저 의로워졌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감격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확신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선에 대한 열정의 불을 던져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우리 마음에는 보상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아무 가치없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는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달은 것입니다.

바늘과 실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그리고 바늘이 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실이 바늘을 따릅니다. 항상 믿음이 먼저이고 행위가 그 뒤를 따릅니다. 믿음과 선행은 항상 그렇게 함께 다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선행은 자신의 공로나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 감격했기 때문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선행을 격려하고 충고할 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권고합니다(12:1; 딤후3:16-17 참조).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2:6-7; 16:27; 고전3:8, 14-15; 고후5:10). 그러나 이 말씀은 선행에 대한 유일한 충고라든지, 선을 행하지 않으면 버려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의 믿음과 선행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출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들은 저들이 선전하는 그러한 공로를 전혀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들은 거룩한 삶을 살라는 강력한 표현의 명령이지요. 다윗의 고백은 우리의 교리를 아름다운 표현으로 지지해줍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130:4).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교황주의자들이 공로가 있는 일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일은 오직 죄의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혀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다 말입니다. 진정 우리가 선을 행하는 유일한 동기는 우리의 그 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5:16). 그래서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말합니다.‘혹시 하나님의 영광에도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는 사람일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하고 회상해 보면 아마 선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넉넉히 생길 것이다.’ 정말 무가치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기를 구원하신(의롭다 여겨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생각해 보면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고 싶어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비방하려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황송하게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뭐라고 조금 보태야하지 않겠느냐고 떠들지만 이는 결국 자기 의와 공로를 자랑하고 싶은 것 일뿐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비방입니다.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는 죄인들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선동할까요? 행위랑 상관없이 믿음으로만 의로워질 수 있다는 교리는 우리들로 하여금 마음껏 죄를 짓게 충동질 할까요?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여겨 주시니까 마음대로 죄 지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지요. 그럴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이런 비방이야말로 비방 중에서도 가장 쓸데없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어떻게, 무엇으로 구원 받았는지를 모르는 미련함을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어떻게 의롭게 여김을 받았습니까? 의와 구원이 우리에게는 값 없이 받는 것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그리스도 편에서는 자신의 가장 거룩하고 귀한 피를 흘려 이루 말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자신의 피 밖에는 아버지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대속물이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지요. 사람들의 선행이라는 것은 아무리 거룩해 보여도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배설물에 불과합니다(3:8). 우리의 죄책은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그런 배설물, 쓰레기 같은 것으로는 결코 대속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도, 심판을 피할 길을 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의를 회복하기 위한 피난처는 하나님의 자비에서만 얻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의 공로를 삼고 그것으로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그 보배로운 대속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감격과 감사가 마음에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죄를 미워하고 다시 죄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바르고 거룩한 행동이 뒤 따른다는 말이지요.

정리해 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이신칭의를 붙잡는 사람은 선행의 공로를 주장하는 자들보다 훨씬 더 선행에 열심을 냅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또한 동시에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동시에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은혜로만 구원 받았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힘을 보태 구원 받았다고 믿는 사람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감격하고 더 열심히 거룩하게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다시는 죄의 종 노릇 하지않고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되어 거룩한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선물은 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 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아내려고 몸부림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부모에게 효도합니까? 부모를 기쁘게 할 때 마다 천원씩 만원씩 현금으로 돌려받는 자식들이 효도할까요? 아니면 아무 보상이 없어도 그저 아버지 어머니의 은혜가 고마워서, 아빠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효도하는 자식들이 더 열심히 효도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바르게 사는 내 행위에 아무 보상이 없어도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 순종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더 열심히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바늘에선 실이 빠져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실 없는 바늘로는 옷을 만들거나 기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바늘에 선행의 실이 빠져 달아나지 않습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는 법입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선행이 따릅니다. 자기의 공로를 철저히 부인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확신과 감격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선을 행합니다. 혹시 실이 빠졌는지 살펴 보십시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았음을 기뻐하고 감격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솟구쳐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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