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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7장 : 맷돌의 조화(율법과 복음의 관계)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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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3:19-31절 개역개정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29.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30.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오늘은 3부 17장입니다. 선행과 행위에 대한 율법의 명령과 복음의 약속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느냐는 문제이지요. 곧 율법은 행위를 요구하고 그에 대한 복을 약속하고 있고, 복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만 복을 누린다고 하니 이 둘이 서로 다른 것을 약속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내용을 ‘맷돌의 조화’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맷돌은 마른 곡물이나 물에 불린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들때에 쓰이는 도구지요. 곰보처럼 얽은 둥글넓적한 두 개의 돌을 위 아래로 겹쳐 놓고 아랫돌의 중심에 박은 중쇠에 윗돌 중심부의 구멍을 맞추어 끼워 놓습니다. 그리고 윗돌의 가장자리에 손잡이를 달아 돌리면서 사용합니다. 아랫돌은 고정되어 있고 윗돌이 회전축을 이용하여 움직이게 한 원리이지요.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은 맷돌 한 짝과 같습니다. 십자가란 중쇠로 하나가 되었지요. 복음의 약속을 아랫돌이라 하고 율법의 약속은 윗돌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 맷돌질을 통해 비로소 먹을 만한 음식으로 변합니다. 곧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서로 조화된다는 말씀이지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지만 인간의 행위로는 율법의 약속들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복을 주신다며 행함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데 “11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 12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신7:12-13; 참조 렘7:5-7,23)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복을 주신다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이런 비슷한 귀절들이 아마 천 개도 넘을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싫어하는 무리들이 얼마나 신이 나겠습니까? 스콜라학자들을 선두로 한 저들은 ‘율법의 그 모든 약속들이 거짓이든지, 아니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가 엉터리든지 둘 중의 하나다’라고 목청을 돋굽니다. 그러나 나는 몇 마디 간단한 말만으로도 저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습니다. 저들은 아직도 율법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친밀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닙니다. 율법의 수많은 창과 칼 끝에는 저주와 사망의 맹독이 묻어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행위가 자기의 기준에 눈꼽만큼이라도 모자라면 사정없이 우리를 찌르고 자릅니다. 그런데 그 잔인한 칼질에서 제외될 사람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성경은 결코 없다고 선언합니다(롬3:9-20). 율법의 조건들은 아무도 능히 지킬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모든 인간을 저주와 진노 아래 가둡니다.“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혀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저주와 진노의 두려움을 충분히 느끼게 하려는 것이 바로 율법이 노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율법의 약속들은 보기에는 좋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요, 율법의 조건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뿐이지요. 물론 이것은 율법 탓이 아니라 순전히 형편없이 타락한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인간의 부패함이 율법의 요구에 절대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율법의 세상에서 우리의 양심을 해방시키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사랑만을 붙잡을 때 비로소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지요. 이 자유는 율법을 떠나 정욕대로 마음대로 행하는 육신의 자유가 아니라, 우리의 양심이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영적인 자유입니다. 이 놀라운 자유는 우리의 행위를 의지하다가는 평생, 아니 영원히 구경 조차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어쨌든 행위로는 율법의 약속들을 전혀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약속들은 정말 우리에게 ‘그림의 떡’입니까?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게 허무할 리가 없지요. 율법의 약속들은 복음의 약속들을 통해서만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모든 약속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 우리 것이 됩니다. 어째서 그러냐고요? 그럴 수 밖에요. 복음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행위로 율법의 길을 달리다가 정죄와 저주의 창에 찔려 신음하며 버둥거리는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가는 길이지요. 자기 행위로 이루려는 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입니다. 믿음이 붙잡는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가 행위로 채우지 못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우리의 불의를 완전히 대신하는 것입니다.“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갈2:16). 하나님은 우리가 붙잡은 그리스도의 그 의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기도 하고, 기쁘게 받아주시기도 하며, 우리의 부족한 행위들을 가치 있게 보아 주시고, 또 그 믿음을 보시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자에게만 주시기로 하신 상과 복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이란 맷돌 하나만으로는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지만, 그 맷돌을 복음이란 맷돌 위에 얹고 돌리면 비로소 율법의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를 예로 들어 사람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조건이 된다고 주장합니다(행10:1-48).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넬료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조건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에게 이중으로 용납을 받습니다. 전혀 아무 선이 없을 때 무조건 용납받는 것이 그 첫째이고,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그의 선행이 또 다시 은혜로 용납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한 자들은 처음 부르심도 용납 하심으로 받고, 후에 또 이 용납에 의해서 그의 행위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벧전2:5 참조). 하나님이 자녀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는 이유는 당신의 자녀들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처음이든 중간이든 나중이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고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율법의 약속들은 사실은 조건이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고, 현상입니다. 곧 믿음 맷돌은 행위 맷돌의 아랫돌(기초)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9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신7:9)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이란 표현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마음으로 주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율법의 엄한 요구들을 대할 때마다, 율법의 목적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시15:1-5; 24:4).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과 선행들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서는 근거나 기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도들을 자신과의 교제 안으로 인도하시며 저들을 교제 안에서 보호하시며 강하게 하시는 통로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25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신6:25)는 말씀을 우리의 행위로부터 의가 나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모든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모든 명령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면 그래도 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살인과 강도에 사기를 일삼는 악당이 어쩌다 한번 거지에게 후히 동냥했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의인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롬3:20 참조) 안타깝게도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단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 받아 의로워진 다음에는 역시 같은 믿음 안에서 행하는 선행들은 의롭다고 간주됩니다.(롬4:22) 우리의 선행은 더럽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예수님의 피가 그 모든 행위를 거룩하게 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사람의 행위는 거기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렸느냐 안 발렸느냐에 따라 이중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죄가 용서 된 후에야 용납됩니다. 죄의 용서야말로 복중의 복이며 또 유일한 복이지요. 따라서 당연히 행위는 믿음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믿음 때문에 비로소 우리의 행위는 칭찬과 의를 얻습니다. 믿음의 맷돌이 있기에 율법의 맷돌이 비로소 유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그러고(약2:21,24), 바울은 ‘믿음으로만 의를 얻는다’고 강조합니다(롬4:3; 갈3:6). 우리의 원수들은 야고보와 바울의 말이 다른 것을 발견하고서는 신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와 바울은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야고보에게 계시하신 영이나 바울에게 말씀하신 영이나 다 그리스도의 영 한 분이신 것을 인정한다면 야고보와 바울을 싸우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시켜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자면 우선 야고보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믿음이 있노라’하면서 ‘행함이 전혀 없는’ 엉터리 교인들을 향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약2:14, 19-20). 그리고 다음으로, 야고보는 ‘의롭다 함’이란 말을 바울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물론 그것이 우리의 불의가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를 뜻했지만, 야고보는 그것을 ‘이미 믿음으로 의로워진 자가 순종과 선행으로 그 의를 증명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로 의를 얻었다고 말한 후 곧 이어 아브라함이 이미 믿음으로 의를 얻었던 옛날의 사건을 서둘러 밝혀주고 있습니다(약2:21,23). 즉, 야고보의 의도는 우리가 어떻게 의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하려는 것이란 말입니다. 또 열성있는 우리의 대적 중 하나는 바울의 말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2:13)는 말씀입니다. 이 문제 역시 바울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면 쉽게 해결됩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에 전문가인 체 하면서도 실제로는 누구보다도 더 율법을 경멸하고 있는 유대의 위선자들을 향하여 외치고 있습니다(롬2:10-12). 이런 표현을 반대논법(opposite argument)이라고 하지요. 만약 야고보와 바울을 서로 싸우게 만들거나, 스스로 모순되게 만들면 정말 성경은 농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성경에는 신자들이 자기의 의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내 놓으면서 은혜를 구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8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시7:8; 18:20-23; 26:1,10-11). 그렇다면 그들의 행위가 정말 그럴만 해서 그랬을까요? 그들은 다음 두 가지 경우에 그랬습니다. 하나는 저들의 생활 전체가 아니라 특별한 어떤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들의 의를 하나님의 그것에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의 것과 비교하는 것이었습니다(삼상26:23; 고후1:12). 하나님만을 상대로 한다면 자기 입을 가리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시130:3; 143:2; 63:3) 사람의 행위는 어느 것이든 하나님하고 거래할 만큼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더럽고 추합니다. 하늘의 천사라도 하나님 눈 앞에서는 부끄럽습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무섭고 악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하고 큰지 몰라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신자들도 완전성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콜라학자들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받아주시는 은혜’ 덕분에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가치를 얻게 된다고 가르치지만, 우리의 행위는 언제나 실수와 오점 투성이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대신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콜레스티우스( coelestius)의 추종자들은 성도들에게 완전성을 촉구하는 사도들의 말을 빌려 현세에서 성도들의 의는 완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우리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우리가 성도들의 덕을 완전하다고 할 때에도, 이 완전성에는 성실하고 겸손하게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맷돌은 아랫돌과 윗돌이 짝이 되어야 비로소 효과가 있는 것처럼, 율법의 맷돌도 복음의 맷돌 위에 얹혀져야 비로소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복음의 맷돌도 율법의 맷돌과 짝을 이루어야 거룩한 삶의 열매들을 생산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들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칭찬을 받으려면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어야 하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 거짓 없는 것으로 인정 받으려면 오직 율법의 선한 가르침들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대로 지켜 살면 복을 주겠다’라는 식의 말씀들을 행함과 연결해서 우리의 행위를 귀히 여기고 부추기는 것은 다음 몇 가지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명들이 얼마나 거룩하고 큰지를 모르는 겁니다. 둘째,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악한 죄인이고 연약한지 모르는 겁니다. 지키면 복을 주고 못 지키면 벌을 주겠다고 하시는 건데 우리는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들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저주가 되고 화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그 계명을 다 지키는 것을 봐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근거로 우리에게 그 계명이 약속하는 복을 다 주시겠다는 겁니다. 믿을 수 없는 사랑이지요. 황송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의 세상입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가득한 약속과 복은 모두 신약과 구약이라는 맷돌에 갈아야 우리가 먹고 누릴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신약 믿음의 복음이 아래짝 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은혜가 중쇠입니다. 윗돌은 계명의 말씀들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맷돌의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들이 우리의 삶에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경에 나온 모든 계명들을 잘 지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준비하신 모든 약속과 복을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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