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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8장 : 달님의 자랑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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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1:1-6절 개역개정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9월 2일 월요일

 

 

오늘은 318장입니다. 성경이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약속하고 있는 이유에 대한 문제이지요. 그것을 달님의 자랑이라는 제목으로 배워봅니다.

달은 지구의 유일한 위성(衛星)이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입니다. 크기로 하면 태양에 비해 보잘 것 없지만, 달은 사람들로부터 태양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태양과는 달리 달빛은 마음껏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일까요? 눈부신 것 같으면서도 은은하고, 강렬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달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상을 주고 영감을 주고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달빛은 사실 햇빛입니다. 스스로 내는 빛이 아니라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햇빛이 사라지면 달빛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달빛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우쭐댈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켜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은 정말 아름답고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런 선한 행위는 사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달빛이 태양빛을 반사한 빛인 것처럼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로우심을 반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인간의 선행에 대해 보상을 약속하는 구절들은 우리의 선행에 대해 칭찬해 주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주시겠다는 식의 말씀들이 참 많습니다(16:27; 고후5:10; 2:9-10; 5:29; 25:34-36; 고전3:8; 2:6). 그러나 그 말씀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쉽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바르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제 그런 말씀들을 해석하는 몇 가지 원칙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우선 그런 식의 표현은 보상의 원인이 아니라 일의 순서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데는 다음 몇 단계의 순서를 따르십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8:30).’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로 하여금 순서를 밟게 하시는데 특히 선행의 경주를 통해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의 상급과 은혜를 얻는 조건이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향하여 걸어가도록 준비하신 길이라는 것입니다(1:6).

다음 원칙은 보상이란 말을 기업이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그렇지 않습니까? 천국은 우리가 종으로서 선행의 삯으로 받는 보상이 아니라 자녀로서 거저 받는 기업입니다(1:18; 4:7,30).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업을 받는 길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1:5-6). 특히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마지막 심판 날 우리가 각각 자기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5:35-37). 그러나 사실 그 상은 이미 창세로부터 그것을 상속받기로 예비된자들에게 주시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달님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태양 빛을 받아 비치는 것처럼, 사람의 선행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미 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설교 중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언제부터 예비된 것입니까? 창세로부터, 창세란하늘과 땅을 지을 그 때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천국을 기업으로 주시기로 창세에 작정하신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동안 선하게 사는 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회개하고 선을 행하고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위해 사는 것은 그렇게 했기 때문에 복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어떤 조건이 아니라, 증거입니다. 무슨 증거요?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그렇게 살다 천국에 들어가도록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장차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22:16-18). 그러나 그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전에 받은 것입니다(15:5; 17:1이하). 약속이 명령보다 앞선다는 것이지요.

세 번째 원칙은 보상을 은혜로 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보면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20:1이하). 빈둥빈둥 거리에서 노는 자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또 풍성한 삯을 준다는 그 비유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이방인들을 부르심’)처럼 은혜의 탁월성을 가르칩니다. 일군들이 받은 삯은 자기 일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주인이 처음부터 은혜로 주려고 작정한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원칙입니다. 그것은 보상에 대한 약속을 만날 때마다 항상 그렇게 약속하시는 목적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왜 하나님은 회개하라 믿어라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구원해주고 상을 부고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리가 받을 보상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왜 구태여 상을 약속하고 그것을 얻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희롱하시는 것일까요? 말도 안 되지요.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위로와 훈련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지극히 높이고 반대로 우리를 거꾸러뜨려 완전히 낮추십니다. 그러나 보상의 약속은 그렇게 부숴지고 낮아진 우리에게 위로와 힘과 용기를 줍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복된 소망을 얻으려고 노력하도록 이끄셔서 선행을 통해 훈련 받도록 하십니다. 이런 훈련은 첫 단계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자신까지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 십자가 훈련으로 연단하십니다. 십자가 훈련을 요약하면 그 첫째가 절망 훈련입니다. 성도들은 사방을 보면서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소망 훈련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는 구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복을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복을 ’, ‘’, 또는 보상이라고 부릅니다(5:12; 6:1이하). 우리의 행위를 따져 보고 주신다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의 절망과 고난과 고통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입니다(고후6:13; 10:35; 11:26). 그런 의미에서 영생도 일종의 보상인 셈이지요. , 하나님은 현세에서 우리의 선행과 사랑을 격려하기 위해 마치 우리의 선행이 내세에 복을 받을 조건과 공로가 되는 것처럼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세에 안식과 영생을 복으로 받아 누리도록 작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처럼 고난을 받더라도, 손해를 보더라도 참고 선을 행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도록 격려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은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는 길은 아니지만, 선택된 자들을 인도해서 천국을 엿보게 하는 길이라 해도 잘못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행과 행위에 대한 보상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행위가 보상을 받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용서의 은혜입니다.

어거스틴은 보니파키우스(Bonifacius)에게 보낸 그의 세 번째 편지에서 두 종류의 사람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은 없지만 경탄하리만큼 거룩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은 있지만 앞의 사람만큼 거룩하지도 도덕적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엔 둘 중에 누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 같습니까? 어거스틴은 주저하지 않고 두 번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이 없으면 선행같이 보이는 것도 죄로 변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래서 또 선행에 대해서도 칭찬과 사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물론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그러나 성도의 속에 있는 믿음은 그의 부족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항상 사랑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버림받은 믿음이 아니다’(5:6)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산다는 것입니다(2:4). 분명히 어거스틴도 우리의 선행이 가치 있고 상 받을만한 것이 되는 것은 오직 용서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 두라(16:9; 딤전6:17-19)’는 말씀도 역시 같은 근거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언뜻보면 현세에서의 선행이 내세에서의 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씀 같아 보이지요? 그러나 그 말씀도 우리의 선행 자체에 그런 가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말씀과 약속을 주시는 이유는 우선 우리의 마음이 현세가 아니라 내세에 있게 하기 위함이십니다(6:21).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사랑과 선행을 힘써 행하도록 격려하고 장려 하시려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선행 중에 정말 보잘것 없는 것 하나에라도 상을 약속하시고, 또 실제 현세와 내세에 후히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상에 대한 소망을 품고 열심히 선을 행해야 하고, 또 부지런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현세의 재물들을 내세의 보물로 이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25:40; 19:17; 고후9:6).

환난 받는 너희에게 안식으로 갚으시리라’(살후1:5-7)는 말씀도 우리의 고난에는 원래 보상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석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난에 어떤 공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맏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처럼 같은 길을 가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8:29;24:26; 14:22). 목자가 한 우리에 있는 양들에게 같은 표를 찍듯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고난으로 예수의 흔적을 찍으십니다(6:17;고후4:10;3:10-11). 그러니까 바울은 우리의 고난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또 성경은 자녀들의 봉사를 잊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것’(6:10)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거기에 나타난 공정성도 당연히 줄 것을 준다는 공정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음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실하신 주께서는 스스로 우리에게 채무자가 되어 주셨다. 우리에게서 무엇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스스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소르본느학파 같은 이들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는 말씀을 근거로 사랑이 믿음보다 나음으로 우리는 사랑의 덕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왕이 구두직공보다 훌륭하므로 왕이 구두직공보다 구두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의로워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사랑이 의로움의 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소르본느학파는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하신 말씀 하나를 들어 또 트집을 잡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거든 계명들을 지키라’(19:17).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지요? 정말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여기서 예수님은 율법의 의와 자기 행위에 대한 확신에 눈이 먼 한 율법사를 다시 완전한 율법의 거울 앞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똑똑히 보아라. 네 행위의 의와 율법의 완전한 의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보아라. 네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 어서 빨리 다른 도움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겸손한 자들을 위해 주님이 준비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29).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도 일이다(6:29).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하지만 의와 불의는 같은 기준으로 잴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우리의 믿음을 공로로 만들고 싶어 안달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소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계속 교묘한 말을 지어냅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에 같은 척도를 사용하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들이 각각 우리의 불의가 된다면, 똑같은 기준에 의해 우리의 선행도 각각 우리의 의가 되야한다.’ 그럴 듯하지요? 어쨌든지간에 우리의 선행이 보상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겠지요. 그러나 조금만 신중히 생각해보면 그런 엉터리 말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의 것이 되지만 의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행위에 의한 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것 아닙니까? 아홉 개 지키다가도 한 개 못 지키면 불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를 판정하는 것과 불의를 판정하는 데에는 전혀 다른 기준을 사용해야 합니다. 의로 인정되려면 완전한 율법 준수라는 자로 재서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의로 판정되는 데에는 단 한가지 범행만으로도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이 됩니다(2:10-11). 결코 그 판단 기준이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기 행위를 자랑하려는 자는 자기의 억만 가지 죽을 죄를 한줌밖에 안 되는 선행으로 대신해 보겠다는 파렴치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 봅니다. 달은 그 황홀한 빛으로 인해 칭송받고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제 빛이 아니니까요. 달빛은 그저 햇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햇빛이 없으면 달빛도 존재할 수 없는 법입니다. 우리들은 착한 행실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과 사랑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자랑만은 사양합시다. 원래 우리 빛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 아름다운 빛을 우리에게 날마다 비춰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 중 단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 됩니다. 그렇지요? 지금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도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수천 가지 법을 다 어겨서 죄수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단 한가지에 걸려서 수갑차고 감옥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 되는 길은 그 반대입니다.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하나라도 어기지 말고 다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쉽겠습니까? , 죄인되는 것은 아주 쉽고, 의인 되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둬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남자가 애 낳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십자가 주의 은혜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려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이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평생 이 믿음을 가슴에 품고 항상 계명의 길로 달려 가면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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