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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19장 : 자유의 여신상(그리스도인의 자유)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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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9:19절 개역개정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9월 3일 화요일

 

오늘은 319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문제이지요. 그것을 자유의 여신상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 뉴욕만 연안의 리버티(자유) 섬에 있는 거대한 여신상입니다. 오른손에는 횃불, 왼손에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지요. 받침대 높이가 47m, 신상의 높이 46m, 무게 250톤에 달하는 엄청난 동상입니다. 이 동상은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온 국민이 모금으로 만들어 기증한 것이랍니다. 프랑스에서 15년 동안 214개의 부분으로 만들어져 미국으로 운반되었는데, 미국 독립 기념 100주년인 1886년에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답니다. 그 대역사의 기획과 모금, 제작을 담당한 사람은 프랑스의 조각가 F.A.바르톨디인데 그는 자기 어머니를 모델로 하여 그 여신상을 만들었답니다. 자유의 여신상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8:32).그렇기에 자유를 제대로 모르면 진리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좋은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진리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 바르게 누리는 사람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바로 알지 못해서 자유를 구실로 사악한 방탕에 뛰어 들든지, 아니면 반대로 극단적인 절제로 모든 자유를 거부하고 삽니다. 자유에 대한 바른 지식은 칭의의 힘을 이해하고 또 실제로 그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입니다. , 우리가 의로워지는데 있어서 율법이나 우리의 행위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누리는 것이지요. 칭의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의를 성취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의롭다고 인정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율법을 통해 의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은 우리를 정죄해서 죄인으로 남게 해 주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완전히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율법은 99가지를 잘 지켜도 1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죄의식을 심어주고, 죄로부터 양심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양심이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얻으려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의로 내세워야 합니다(5:1-4). 그래야 우리의 양심은 율법과 상관 없이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안에서 완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3:13; 4:5).

다음 두 번째는 율법의 강요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것은 율법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 우리 양심이 율법의 강요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그와 비슷하지요? 또 종과 아들의 차이가 그렇지요? 종은 주인이 명령한 일을 행하느라고 하루 종일 수고하고도 다 못한 부분 때문에 항상 죄송스러워하고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혹시 부족하고 잘 못한 일까지라도 자비로운 아버지 앞에 주저하지 않고 내어 놓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봉사와 순종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불완전할지라도 지극히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기쁨으로 받아 주신다고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3: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여전히 죄와 더불어 살지만 그 죄들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5:8)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죄를 지라는 말이 아니지만, 하여튼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끝없이 노여워 하시거나 진노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 자녀들은 굳게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무해무익한 일들’(아디아포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디아포라는 헬라어인데, 해롭지도 않고 이롭지도 않은 것이란 말입니다. 무해무익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명이 이것은 악하다 선하다 말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롭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 자체로서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들이 많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성일(holydays) 문제 등등 때에 따라 우리가 취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것들이지요. 흔히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문제들을 일일이 따지면 쓸데 없는 짓을 한다며 멸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사소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의 양심은 일단 한번 함정에 빠지면 금방 미로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고 평생을 그 속에서 삽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커피를 마시는 일이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고 합니다.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서 기업이 돈을 버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커피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하면 다음엔 홍차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고 결국 수도물 외에는 못 마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러다 보면 나중엔, 속담에 있듯이, 길에 있는 짚을 밟아도 나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일단 죄의식과 의심에 휘말린 사람은 무엇을 보아도 다 양심에 거리끼는 것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금욕의 멍에를 매고 살면서도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결국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면서도 이런 저런 유혹이나 강요에 못이겨 양심이 허락하지않는 일들을 합니다. 이럴 때는 죄가 됩니다(14:14, 22-23). 금욕을 하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건 모두 결국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데,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4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4:4-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은 믿음으로 감사히 받아 그것들을 주신 목적에 따라 양심의 거리낌 없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 모든 의식(儀式)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런 의식들을 반드시 지킬 필요는 없지만 교육적 목적으로 사용되도록 선하신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의 자유는 전적으로 영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육신의 즐거움을 위해 사치와 탐욕과 방탕을 위해 쓰지 말라는 것이지요. 풍족한 가운데서 게으른 돼지처럼 뒹굴며, 넘치게 먹고 지나치게 마시며, 너무 돈 버는 일에 집착하고, 피곤하여 지칠 정도로 오락과 쾌락을 즐기면 틀림없이 경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방종의 덫에 걸린 것이지요. 절제가 없으면 평범한 모든 것이 지나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절제를 모르는 평범은 우리의 믿음에 백해무익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처럼 우리도 절제와 자족의 비결을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4:11-12).

, 아디아포라의 자유를 누릴 때는 반드시 약한 형제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자유에 너무 취해서 주변의 약한 사람들을 마구 실족하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정말 민망하고 불행한 일입니다. 한 예로, 술과 담배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술과 담배가 죄라는 말이 없으니까 얼마든지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명적 측면에서는 술이나 담배도 아디아포라로 입니다. 그러나 담배의 경우는 요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담배도 기호식품 중 하나로 보았습니다만, 요즘은 거의 마약 취급하고 있습니다. 무해무익이 아니라 백해무익하다는 것이지요.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술 때문에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 얼마나 많습니까? 술로 인한 질병, 술로 인한 사고, 술로 인한 싸움 등 실로 그 비용이 천문학적 숫자라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해무익, 아디아포라가 아닙니다. 아디아포라는 무해무익한 것입니다. 백해무익하다면 아디아포라가 아니라 나쁜 것이지요.

아디아포라의 문제는 사회적인 윤리.도덕적 측면이나 혹은 사회 문제적 측면 뿐만 아니라 다음 두 가지가 걸리면 죄가 됩니다. 첫째 양심에 꺼릴 때입니다. ‘술 마시면 죄인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친구들의 유혹에 빠져서 양심의 찔림을 느끼면서 술을 마실 경우는 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믿음과 달리 행동하면 죄가 된다는 겁니다. 또 둘째는 자기가 술 마시는 것 때문에 믿음이 약한 형제가 시험에 들면 죄가 됩니다. 교회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사나 장로나 목사가 술 마시는 것을 보면 덜커덕 시험에 빠집니다. 이럴 땐 술 마신 사람이 죄를 짓는 겁니다. 술 때문에 형제를 넘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마시지 말든지, 아니면 몰래 숨어서 마셔야 합니다. 그 때도 물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친구들이 일부러 믿음을 시험하려고 술을 권할 때는 거절해야 합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문제는 항상 약한 마음을 가진 형제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혹시 내 자유로 약한 형제가 실족하게 된다면 그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술을 마시는 교인들을 보면 육체의 즐거움을 채우려고 스스로 마시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십니다. 그리곤 자기도 넘어지고 다른 형제들도 넘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유를 행사할 때 그것 때문에 문제되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이 약한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악하고 교만한 성품을 가진 바리새인 같은 악한 자들입니다. ‘약한 자들이 내 행동 때문에 넘어질 때는 내가 그들에게 걸림을 준 것이고, ‘악한 자들이 내 행동 때문에 넘어질 때는 그들 스스로 내 행동을 사악하게 해석하여 걸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둘 다 우리가 신경쓰고 조심해야 할 자들입니다.(15:12,14).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를 행사하려 할 때 적어도 두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범사에 사랑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덕을 구하는 것이지요(고전10:23-24; 15:1-2). 바울도 그 원칙에 따라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하고(16:3), 또 디도에게는 할례를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2:3; 고전9:19-20,22). 그러나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에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자유 위에 사랑이 있고 , 사랑 위에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웃을 사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두 종류의 법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곧 영적인 법정과 육적인 법정입니다. 항상 이 두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법정과 육적인 법정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세상 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면 안 됩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만 상대합니다. 그러나 몸은 세상 법을 지켜야 합니다. 이 말을 거꾸로 설명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우리의 몸은 세상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자의 양심은 모든 인간의 전통이나 법으로부터 자유 합니다(벧전1:18-19; 2:21; 5:1,4).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전통이나 법과 규칙들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람에게는 이중의 통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영적 통치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회적 통치입니다. 영적 통치는 양심의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적 통치는 외면의 행동을 다스립니다. 우리는 양심의 나라에서 경건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배우며, 외면의 행동을 통해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배웁니다. 보통 양심의 영역을 영적(spiritual) 관할권이라고 부르고, 사회적 영역을 세속적(temporal) 관할권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항상 각각 별도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세계가 각각 다른 임금과 다른 법률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모두 두 개의 법정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는 양심의 법정이고 다른 하나는 외부의 법정입니다. 그 두개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면 사회생활이 그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고, 또 영적 생활이 그의 사회생활을 방해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영적 자유에 대한 복음의 교훈을 사회 생활에 잘못 적용하면 안됩니다. 세속정치나, 교회법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습니다(420).

바울은 ‘---양심을 위해서도 정부에 복종하라(13:1,5)고 명령합니다. 이것 때문에 양심도 세속 법에 매인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심이 무엇인지 알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양심지식’(안다)이란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일종의 감각입니다. 사람 속에 숨어 있는 모든 감정과 지식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법정으로 끌고 나갑니다. ‘검사라고도 할 수 있지요(2:15-16).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이다라는 옛 격언도 그래서 나왔습니다. 행동은 사람을 상대하지만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합니다. 가끔 양심을 사회법이나 사람에게도 연관시키지만(24:16), 그것은 양심이 그것들을 상대한다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결과가 그것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해무익한 일들에 대해 무절제하게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쁜 모범이 되기 때문에 죄를 지을 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죄책으로 그 양심이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약한 형제를 위해 자기를 절제하는 사람들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속박하지만, 그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늘 자유를 누리지요. 바울의 명령도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자유를 모르는 신앙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이 항상 건조하고 지치고 피곤할 뿐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역시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믿음에서 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양심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늘 평안을 누리고, 그 행동으로는 항상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며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셔서 늘 기쁨과 감동이 충만하고 평안으로 풍성한 삶을 사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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