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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20장 : 행복한 거지(기도의 법칙-주기도문 해설)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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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6:9-13절 개역개정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3부 20장입니다. 성도의 기도에 관한 내용이지요.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께만 구걸하며 평생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행복한 거지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거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거지는 구걸이 곧 생계 수단인 사람이지요. 비렁뱅이, 동냥아치, 걸뱅이, 걸인, 유걸 등으로도 불리웁니다. 거지가 사회에 언제 출현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꽤 오래 된 것으로 보이며, 구걸에 관한 한국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도미부부 이야기라고 합니다. 구걸의 대가로 음악을 연주 해주는 풍습은 고려 중엽 이후로 보여진다고 조선 초엽의 문인 양성지의 ‘눌재가’(訥齋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음악들이 풍각쟁이나 각설이의 모태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구걸로 끝나지 않고, 걸식의 대가로 기예(技藝)를 파는 풍각쟁이, 초라니, 광대, 걸립패, 남사당, 사당패 등 다양한 유랑인들도 있었답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거지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거지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구걸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구걸을 한다는 의미에서 본다면 성도 역시 거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매일매일 하나님께 구걸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구걸이 곧 생활 방식이고, 기도가 바로 구절의 방식입니다. 성도는 기도없인 살 수 없고, 하나님은 성도의 구걸을 거절하지 않고 반드시 응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행복한 거지’들 입니다. 사람에게는 선이란게 전혀 없고 또 자기를 구원할 힘이 도무지 없기 때문에 어차피 바르고 행복하게 살려면 그 힘을 자기 밖에서만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불행과 절망 밖에 가진 것이 없던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부요한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 보물창고를 우리에게 활짝 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녀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러 보게 하시고, 오직 그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며 참 생명과 안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저 세속 철학자들이 삼단논법으로 이끌어낼 수 없는 비밀한 철학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을 뜨게 하신 자들만 그 비밀의 커튼을 열어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지요. “9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9)” 그런데 우리는 오직 기도의 손으로만 그 하늘 보물 창고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오직 기도의 그릇으로만 그 신비한 샘의 물을 길어 먹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믿음은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을 줍니다(롬10:14-17). 우리 마음 속에 복음을 인치는 ‘양자의 영’(롬8:16)은 또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는 ‘기도의 영’이 되십니다(롬8:26,15). 기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익한 지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기도는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 실제로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약속하신 것을 기대하며, 그것을 받기 위해 기도하며, 소망 중에 기뻐하며, 주실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삶을 삽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정신 나간 소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기도를 빼면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소리는 사탄의 사주를 받은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데, 기도로 믿음에 생기와 열정을 계속 얻으며(왕상18:42), 기도로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을 증명합니다. 성도가 기도할 이유는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향한 소원과 열의가 항상 불일 듯 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말씀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생각이나 욕망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셋째 모든 것을 감사로 받기 위해서 입니다(시145:15-16). 넷째 응답의 확신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섯째 응답하심에 더욱 더 큰 기쁨으로 반응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여섯째 우리의 습관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좋은 이유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훈련 시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끔 응답없이 침묵하는 척 하기도 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올바른 기도를 하려면 다음 네 가지 법칙을 따라야 합니다. 첫째 경외의 법칙입니다. 하나님 앞에 대화하러 나가는 자들은 그 대화에 전심전력하여 집중해야 합니다. 보통 우리는 큰 근심의 가시에 찔려야 비로소 기도하기 시작하지만 하나님께 나갈 때에는 육신의 모든 염려와 근심과 원망과 욕망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원래 떠돌기를 좋아하는 산만한 우리 정신을 하나님 보좌 앞에 꽉 붙들어 매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 이상의 것을 구하거나, 합당치 못한 일을 무례한 태도로 구하거나, 추악한 욕망을 겁 없이 막 내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항상 실패하는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기도의 교사로 주십니다(롬8:26). 둘째 필요와 회개의 법칙입니다. 별 필요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냥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희롱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고, 창고에 가득 찬 쌀 어느 한 톨도 그 은혜가 계속되지 않으면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와 시험과의 전쟁은 휴전이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가 많고 얼마나 많은 시험 앞에 직면해 있습니까? 거지가 아무리 무식해도 두 가지는 압니다. 하나는 당장 구걸로 채워야 할 필요와 자기 몸이 지독하게 더럽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법칙을 떠난 기도는 효력이 없습니니다(사1:15; 렘11:7,8,11). 셋째 겸손의 법칙입니다. 평생을 구걸로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이 확신해야 하는 한가지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은 자기 죄를 성실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문은 회개의 열쇠로 엽니다(시25:7). 단지 벌의 면제 뿐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요일1:9).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오직 이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넷째 소망의 법칙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기도의 두 기둥인데 회개는 공포심을 주고 믿음은 기쁨을 줍니다. 우리는 보통 부족을 느끼고 시련과 환난으로 지독히 아플 때에야 비로소 뜨겁게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믿음의 인도로 그 모든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대신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지요. 이처럼 기도의 인도자인 믿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우리에게 확실한 소망을 줍니다(마11:24; 약1:5-6; 롬10:14). 그러므로 참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계시 받은 자들만의 것입니다(롬10:17). 만약 믿음이 있다면 소망을 붙들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가면 됩니다(히4:16; 엡3:12). 이런 소망을 외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죄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보다도 기도를 더 원하셨습니다(시50:7-13,15). 성경에는 기도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장이 끊임 없이 발행되고 있습니다(사65:24; 시91:15; 145:18). 그런데 불신자들의 기도나 사악한 기도도 들어 주실까요? 성경에는 가끔 사악한 기도가 응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삿9:20; 삿16:28). 하나님은 불신자들의 기도나 악한 의도로 드린 기도라도 그것들에 응답하시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시행하십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으라는 것이며 또한 불신자의 기도도 응답하신다면 자녀들의 기도에는 얼마나 더 기뻐 응답하시겠냐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예,왕상21:29; 마5:45). 그러나 보편적인 법칙은 그러한 특수한 예외적 법칙에 의해 파기되지 않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창18:23)과 사무엘(삼상15:11), 혹은 예레미야(렘32:16이하)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을 구하는 기도도 믿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거스틴의 현명한 말처럼 물론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은 아주 깊이 감추어져 있고, 또 변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 속에 영감으로 불어 넣어 주신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충동과 영감을 따라 기도하는 저들의 기도에 다른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계획에 따라 사건들의 결과를 조정하셔서 믿음과 과오가 섞여 있는 성도들의 기도까지도 허사가 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가 있어야 응답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여름 더위에 쉽게 상해 버리는 숙주나물이나 고기 덩어리처럼 우리들의 기도는 항상 불신앙과 죄악 때문에 오염되고 썩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표준에 맞는 기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의 그 부족하고 연약한 기도를 기뻐하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보다 완전한 기도를 드리려는 분투노력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홀로 성소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던 제사장처럼(출28:9-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그의 어깨에 메고 가슴에 달고 자기의 피와 육체를 제물 삼아 아버지께 나아가 우리의 모든 기도가 응답 되도록 중보하십니다. 유일한 중보자이시지요(요일2:1; 롬8:34; 딤전2:1-2, 5). 하나님은 이 아들을 기뻐하시는 것이고, 이 아들을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요14:6; 요일2:1; 딤전2:5; 히8:6; 9:15). 기도 응답에 대한 모든 성경의 약속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되는 것입니다(고후1:20; 요14:13; 16:24; 히4:16). 또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 상호간에 있어서도 중보자이십니다. 우리가 모두 한 주에게로 묶여 한 지체를 이루고 있다면 우린 서로 위하여 중보 할 수 있습니다(고전11:3; 12:25-26; 엡1:22). 그래서 바울도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롬15:30; 엡6:19). 그러나 성자(聖者)들을 우리의 중보자로 삼는 것은 어리석고 사악한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불러내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만 돌아가게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 되기를 원하십니다(골1:20; 엡1:10). 그런데 교황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항상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거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엔 너무 엄하시다는 분위기가 압도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유일한 중보자라는 칭호를 찬탈하는 행위이며, 십자가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부끄럽게 하고,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기시는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내던지는 악행입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처럼 ‘우리의 눈과 입과 오른손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성자(聖者)들에게 정신이 빼앗긴 교황주의자들은 성자(聖者)들에게 중재를 기원하기도 하고, 각 사람마다 성자(聖者)를 자기 수호신으로 삼아 기도하고, 도시의 수에 따라 혹은 인구 수에 따라 신으로 세웠습니다(참조 렘2:28; 11:13). 심지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하여 그녀가 그 아들 예수에게 명령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고대의 3차 칼타고 종교회의(Carthage.AD397년)에서는 ‘기도는 항상 아버지께만 드려라’며 성자(聖者)들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아마 그 덕에 아주 극단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련한 성자(聖者) 숭배자들은 천사와 성자(聖者)들을 혼동 하거나(히1:14; 시 34:7; 91:11), 모세와 사무엘, 노아와 다니엘 등도 하지 못한 일을 성자(聖者)들에게 맡기려 합니다(렘15:1; 겔14:14). 물론 지상의 성도들은 서로를 위해 중보 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촉진합니다. 그리고 거기엔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들(聖者)에게는 우리와 접촉할 여지를 전혀 남겨 놓으시지 않았습니다(전9:5-6). 성경에서 후손들이 족장들의 이름으로 불리게 해달라는 간구도 족장들을 중보자로 삼게 해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언약을 계승하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창48:16). 그러므로 우리는 성자들을 우리 기도의 중보자로 삼을 것이 아니라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다(참조.약5:17-18). 결론을 내린다면, 예배의 중심은 기도이고, 말씀에 든든히 선 믿음은 기도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안에서만 유효합니다. 이제 사기도(私祈禱)와 공기도(公祈禱)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개인기도(私祈禱)에 대해 생각해보지요. 기도는 양면을 갖습니다. 한쪽 면은 탄원과 간구입니다(딤전2:1). 우리는 끊임없이 부족하고 죄책감과 수많은 유혹과 더불어 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또 한쪽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찬양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넘치는 은혜와 끊임없는 응답의 역사에 압도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간구할 이유와 감사할 이유를 일평생 그치지 않고, 넘치도록 보내 주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영웅들은 간구와 동시에 감사와 찬양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시51:15; 116:1; 빌4:6; 살전5:17-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소유와 범사를 항상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약4:14-15). 그리고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 것과 범사를 결정하시는 분이 또한 그 분이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그러한 우리의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과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를 하겠습니까? 다음 공기도(公祈禱)입니다. 공중 기도는 모든 사람이 합의하여 정한 방침에 따르지 않으면 교회에 큰 해를 줄 수 있습니다(고전14:40).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공중 기도를 멸시하지 못하도록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 부르셨습니다(사56:7; 마21:13). 그리고 신약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곧 우리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예배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건물을 가장 합당하게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회중의 합심 기도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기도에는 어떤 용어나 말을 사용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의 공기도는 오직 찬양과 노래만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말이나 노래나 다 신령과 진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요4:24; 마15:8-9). 그런 것들이 바르게만 사용된다면 크게 장려할 것입니다(고전14:15; 골3:16). 그것들은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믿음을 자극하고 강화시키는 대단히 훌륭한 보조 수단들이니까요(쯔빙글리는 노래 사용을 금했다). 어거스틴도 한 때는 아타나시우스처럼 거의 곡조없는 노래를 추천하는 듯했었습니다만 곧 그 반대로 기울어져 음악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우리의 혀는 찬양하라고 지어진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그치면 제사를 멈춘 성전과도 같습니다(히13:15). 그러나 기도의 곡조는 찬양만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언어와 절제된 간구도 역시 필요합니다. 특별히 공적인 대표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시간도 조절하고, 단어도 골라 써야 하고, 표준에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공기도는 온 회중이 아는 언어로 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지성소 앞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언어와 자기 욕망과 욕심을 부끄럽게 하는 표현들이 필요합니다. 공기도는 모두가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문을 특별히 가르쳐 주신 겁니다. 주기도문이지요. 주기도문에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간단명료하지만 뜨끈뜨끈하고 황홀하고 과거와 미래와 오늘과 하늘과 땅과 온 지구를 다 가슴에 품는 위대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혼자 신이 나가지고 예배 대표 기도하면서 길게 하는 것은 주책이 없는 겁니다. 그리고 기도에 조리도 없고 논리도 없고 순서도 없고 내용이 빈약하면 회중들에게 큰 해를 줍니다. 더욱이 세상 일에 대한 편향된 자기 신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성도들을 질척거리는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대표기도하는 자가 그렇게 기도하면 회중은 곧 기도하는 마음을 잃어 버리고 방황하며 예배의 중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대표기도는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문장을 김밥을 싸듯 함축하고 또 함축하고, 명쾌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문장들을 준비해서 순서에 맞추어 힘 있게 또박또박 분명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배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세상 헛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마음으로 충만케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기도든 사기도든 ‘방언’ 등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고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만일 사기도의 경우 방언을 해야 한다면, 심령이 너무 힘이 없어 기도가 처져 있을 때에나, 반대로 너무 감동적이어서 기도가 폭발할 때일 것입니다(삼상1:13). 아무튼 교회든 성도 개인이든 기도가 곧 생계수단입니다. 그렇기에 기도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며, 성도의 풍성한 삶을 누리는 복된 은혜입니다. 또한 공기도든 사기도든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사악한 인간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방의 플라톤 조차도 그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고대 시인의 말을 빌어 이런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제우스신이여,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 하지 말고 가장 좋은 것들로만 우리에게 주소서. 좋지 못한 것들을 우리가 구하더라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명령하소서.’ 그렇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을 구할 것인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그것이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교사이신 예수님이 그 중요한 것을 놓칠 리가 없으시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에 관한 모든 것을 간단한 도표로 그리듯 짧은 한 기도문에 다 담아 주셨습니다(마6:9이하; 눅11:2이하).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6가지의 제목으로 되어 있고, 크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부분과 우리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부분 등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절대적으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안내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지요(요1:12). 하나님은 모든 아버지 중에 가장 훌륭하고 다정한 아버지이십니다. 이보다 친밀한 관계는 없습니다(시27:10; 사63:16; 마7:11). 아버지한테 잘못했다고 변호사 사서 대변시키는 자식이 있습니까? 직접 죄를 고백하고 호소하지요(눅15:11-32). 또‘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우리들끼리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항상 주님의 나라와 그의 가족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늘’이란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의 초월성과 만물에 충만하심, 그리고 거룩하고 존귀하신 신성을 나타내 줍니다. 하여튼 ‘아버지’란 다정한 이름으로 기도의 문을 연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기도가 허락되었으며 따라서 응답될 것임을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것은 우리의 큰 수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온 세상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기 때문에 드려야 하는 기도이지요. 둘째 기원. ‘나라가 임하옵시며.’ 첫째 기원을 연장하여 반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육의 정욕을 정복하시고 모든 생각을 그의 법도에 맞도록 이끄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일체 세상의 모든 부패로부터 우리를 깨끗이 해야 하고 또한 십자가를 지는 훈련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만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기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뜻은 은밀한 뜻이 아니라 드러난 뜻입니다. 그 뜻을 섬기기 위해 우리는 육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시51:10). 이상 세가지 제목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유익은 전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도 종도 아닙니다. 이 점이 바로 ‘행복한 거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는 것이지요. 넷째 기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물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할 일입니다(고전10:31). 그러나 이 둘째 부분에서는 특히 우리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다 기도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위대한 보호자가 되심을 가르쳐 주려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혹은 ‘일용할’ 이란 말들은 곧 없어질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억제시켜 줍니다. 창고에 아무리 곡식이 풍부해도 우리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정말 아무 것도 우리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게 하시고, 마셔도 목마르게 하시고, 운동해도 건강하지 못하게 하십니다(신8:3; 겔4:16-17; 14:13). 그러므로 욕망이 넘치는 사람이나 풍부한 소유를 믿고 아무 걱정 없는 사람이 이 기도를 드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기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기원은 우리의 연약과 무기력 때문에 은혜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평생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요일1:10). 또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은 형제의 위법이나 불법을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고 마음에 있는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 미움과 분노와 복수심을 품고 하나님 면전에 나간다는 것은 가증스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 죄의 용서를 위한 조건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약한 믿음을 위로하시려는 뜻도 있고, 또 항상 복수심에 사로잡혀 용서할 줄 모르는 자들을 자녀들 가운데서 제외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기원.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는 율법을 우리 마음에 새기시겠다는 약속에 대응하는 간구입니다. 시험을 이기도록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 시켜달라는 기도이지요.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날 뛰면서도 한 편으로는 달콤한 것으로 유혹하고 또 한편으로는 쓰고 아픈 것들로 시험합니다. 잘 될 때에는 교만하게 하고 안 될 때에는 낙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우리를 사탄에게 넘겨 주시기도 합니다만, 항상 하나님의 시험은 우리를 연단하여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고전10:13; 벧후2:9).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또한 악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 간구입니다.‘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이 간구는 라틴어 번역에는 없지만 빼지 않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음에 견고한 안식처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한 기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가치를 부여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빼앗을 수 없다면 우리의 기도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터툴리안이 주기도를 ‘합법적 기도’라고 한 것처럼 주기도는 성경에 퍼져 있는 모든 기도가 다 요약되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어에 속박될 필요는 없겠지만 내용은 빼먹지 말아야 합니다. 주기도는 하나님의 지혜가 가르친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가르치셨고, 필요한 것을 원하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규칙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기를 훈련해야 하고, 또 응답없는 기도는 없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참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이 세상을 살아 가는 방법이 그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행복한 거지입니다. 구걸이 곧 생계수단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비참하지 않고 행복합니다. 왜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창조주시요,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께만 구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구걸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행복합니까? 그 행복을 날마다 누릴 수 있다니 또 얼마나 더 행복합니까! ‘행복한 거지’는 평생 하나님의 영광만 구걸 하다가 죽어도 좋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방인들처럼 자기 욕망을 채워달라고 간구하지 마십시오. 자기 욕심을 이뤄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더럽고 악한 자기 입을 막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묵상하면서 조용히 하나님의 존전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영광스런 아버지의 품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또 날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닫으십시오. 하늘을 보며 기도하고 별을 보고 기도하며 책상 앞에서 기도하고 가게 문을 열며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능력을 받아 행복한 거지로 평생 살아 감사 찬양이 끊이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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