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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3부 21장 : 노아의 방주(예정 교리가 주는 유익)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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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1:1-10절 개역개정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3부 21장입니다. 예정 교리에 대한 내용이지요. 예정 교리란 우리의 구원은 어쩌다 된 것이 아니고, 혹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과 주권적 선택으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노아의 방주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예정 교리는 칼빈 신학에 백미입니다. 잘 공부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배를 꼽으라면 타이타닉과 노아의 방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타이타닉은 1912년, 영국의 화이트 스타라인에서 3년에 걸쳐 건조한 세계 최대의 호화 유람선이었습니다. 46,329톤, 길이 269.1m, 넓이 28.2m, 최대 속력 22kn에 달하는 도저히 ‘침몰할 수 없는 배’였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14일 밤, 2,224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태우고 뉴욕을 향해 대서양을 건너던 중 그만 빙하에 부딪쳐 침몰하고 맙니다. 첫 항해였습니다. 어이없는 사고에 1,513명이 몰살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훨씬 오래 전에 만들어진 노아의 방주는 정말 기적의 배였습니다. 역시 길이가 135m, 넓이 23m, 그리고 높이 13m에 달하는 초대형 배였습니다. 노아의 방주 이후 수천년 동안 인류는 그만한 배를 만들지 못했었지요. 쇠가 아니라 나무로, 120년 동안 만들어졌습니다. 그 배는 노아의 8식구(船)와 정결한 동물 7쌍, 부정한 동물 1쌍씩을 태우고 1년 10일 동안, 물(5개월)과 산 위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끄떡 없었습니다. 인류와 짐승들은 그것으로 죽음에서 건져져 구원을 얻었습니다. 먼저 퀴즈로 시작해 봅니다. 노아가 살아 있을 때 인구가 몇명이나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지금보다는 그 수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적었을 겁니다. 그래도 당시 사람들 중에 왜 노아와 그의 가족만이 구원 받았을까요? 맞는 답을 하나만 고르시오. 1) 노아는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심판할 만한 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은 120년 동안 순종하여 배를 지었기 때문에 배를 탈 자격을 받을 수 있었다. 2) 노아의 가족들은 노아만큼 믿음이 있거나 의롭지는 않았지만 순전히 노아 덕에 구원을 받았던 행운아들이다. 3) 아니다. 구원은 남의 덕에 받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노아의 가족들이 구원 받은 이유는 저들의 믿음과 의로움이 당대 사람들보다 모두 뛰어났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노아의 가족 8명은 ‘누가 누가 더 거룩한가 시합’에서 1등부터 8등을 했기 때문이다. 4) 노아와 그의 가족 8명만 배를 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일방적 은혜이다. 정답은 4번입니다. 노아와 그의 식구만 배에 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머리 좋은 것, 믿음 좋은 것, 마음 좋은 것, 행실 좋은 것 등등 종합 평가해서 성적 순대로, 등수대로 8명만 배를 태우려고 했는데 놀랍게도 노아와 그의 가족이 모두 1등에서 8등을 차지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노아 한 사람의 믿음 때문에 다른 가족들은 덩달아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구원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자기 믿음으로 자기만 구원 받습니다. 그리고 120년 동안 배를 지은 대가로 배에 탄 것도 아닙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직 노아의 가족만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예정(豫定)이라고 그럽니다. 예정(豫定), 미리 예, 정할 정, 미리 정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노아의 가족은 배에 태우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 밖에 두기로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다음 문제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고, 노아의 가족과 함께 구원의 배에 오른 수많은 짐승들은 어떻게 그 배에 탈 수 있었을까요? 1) 마침 그 날 노아의 가족이 배에 오르는 날, 그 배 곁을 지나다가 재수 좋게 탈 수 있었다. 2) 노아의 가족이 120년 동안 깨끗한 짐승은 7쌍씩, 더러운 짐승은 한 쌍씩 잡아 두었다가 그 날 모두 한꺼번에 태웠다. 3) 방주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노아의 배가 있는 산 꼭대기까지 달려온 짐승들 중에 선착순으로 끊어 태웠다. 4) 그냥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해서 데려다 태우셨다. 정답은 4번입니다. 성경의 기록처럼 그냥 하나님이 깨끗한 짐승은 일곱 쌍씩, 더러운 짐승은 한 쌍씩 배로 보내주신 겁니다. 짐승들이 무슨 결단이나 노력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맘대로 하신 겁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을 예정하신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그 모든 것에 주권을 가지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또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도리어 기분 나빠하고 배척합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 자기가 구원 받는 것을 오직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기분 나빠합니다. ‘그럼 나는 뭐냐?’는 것이지요. ‘왜 내 인권을 무시하냐!’는 겁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 구원에 관한 그 모든 결정권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싫어 합니다.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를 멸망에 내 버려 두기로 하는 그 주권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오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좀 괜찮아 보이게 치장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죄로 타락해서 썩고 문드러졌지만 그래도 사람 속에는 아직 스스로 선을 행하고 하나님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가 구원의 방주에 타도록 선택된 것은 노아의 성품과 품행 속에 그럴만한 가치와 공로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또 그렇게 구원해 놓으면 노아는 앞으로 누구보다 착하게 살아갈 싹수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눈치 챘다는 것이지요.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겠지요. 정말 그랬을까요? 노아의 의가 나머지 사람들과 그렇게 절대차이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정도 차이를 갖고 1등에서 8등까지만 뽑은 것이란 말입니까? 또 동물들은 무슨 기준으로 뽑혀 그 배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달리기 선착순으로 정한 것일까요? 이런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구원의 예정론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곧 이 노아의 방주를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아니면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노아의 식구들과 몇몇 짐승들이 방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과 주권적 선택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고, 예정 교리는 우리의 믿음에 확신과 큰 유익을 줍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값없이 구원이 제공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막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으로만 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영원한 선택으로 예정 되어지는 일들이지요. 경건한 믿음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히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믿음에 확신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예정에 의한 것이라면 또한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좌절 되거나 취소될 위험이 전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요10:28-29).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입니다. 이 진리를 영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의 자리에 납작하게 엎드릴 수 있습니다. 이 교리 외에는 우리에게 올바른 겸손을 가르치는 것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제대로 알려 주는 것이 없습니다“5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11:5-6).” 예정의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자비, 그리고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아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예정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두 가지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박한 호기심으로 예정의 궁전 안을 함부로 들여다 보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쩌다 궁전에 들어오게 된 거지가 임금님의 침소를 기웃거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겁없는 거지이지요. 예정이라는 보물은 하나님의 지혜의 성역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버릇 없이 자신만만하게 그 성역 안으로 뛰어든 자는 곧 미로에 빠져 나올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깊이 감추어 두시기로 작정하신 것에 호기심의 미친 손을 대려 해서는 안됩니다(잠25: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지혜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경외심을 가지고 그의 지혜에 대해 감탄하고 찬양하기를 바라시는 것이지요. 또 다른 악한 태도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마치 암초를 피하듯 예정 교리를 외면하려 합니다. 예정 교리는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그들의 조심스럽고 온건한 태도는 칭찬할만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너무 침묵하고 외면하다 보면, 본성적으로 쉽게 항복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지성에 아무런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무지한 짐승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감추신 것을 탐색하려 해서도 안되지만, 나타내신 것을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신29:29). 그러면 우리는 예정의 비밀을 어디서 엿볼 수 있을까요?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어디까지나 이 길로만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은 임금님의 침실에 이르는 것인데, 거기에는 지식과 지혜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우리는 안내자의 인도를 받아 계속 걸으면서 전진하고 성장해야 한다..... 저 끝 날이 되어 모든 것을 알 때까지 계속 더 알아가야 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손을 붙들고 임금님의 침소를 들여다 보게 하는 유일한 안내자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성경입니다. 이 안내자 없이 왕의 침소를 들여다 보려는 자는 죽기로 작정한 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안내자의 손에 이끌린 자들은 왕의 침실에서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고 유익하게 해 줄 좋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성경은 어린 아기를 데리고 걷는 어머니와 같아서 항상 우리의 연약함을 돌아보며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따라 갈 수 있게 말씀이지요. 성경은 성령님의 학교입니다. 성령님은 이 학교에서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하나도 빠짐 없이 가르치시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하나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그리고 선택과 유기에 대해 배워봅니다. 어떤 사람은 예지(豫知)를 예정(豫定)의 원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기 전에 그에게 있는 가치나, 앞으로 있을 공로를 미리 아셨다는 것이지요. 저들은 아직도 철저히 타락해서 이미 구원 받을 만한 아무 가치나 공로가 전혀 없는 인간에게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니까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는 우리의 예지와 다릅니다. 하나님께 예지가 있다고 하는 말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는 항상 현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예지와 예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가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합니다만, 어쨌든 예정을 예지에 속박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나님이 눈 여겨 보실 만한 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에 인간과 우주의 운명을 맡기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연에 법칙이 고정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유기를 자신의 뜻대로 예정하십니다. 성경은 예지랑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을 너무나 분명히, 너무나 충분히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장래를 그 기쁘신 뜻대로 선택하십니다.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구원하기도 하시고 심판하기도 하십니다(신32:8-9).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특별히 택하신 것도 달리 무슨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거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신4:37; 7:6-8; 10:14-15).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조금이라도 자기를 자랑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책망받을 것으로 충만한 나라입니다(출32:9; 신9:6; 암3: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은혜는 선택의 결과입니다(시105:6,42). 그리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신 구원이기 때문에 취소되지 않을 것입니다(삼상12:22; 사41:9).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택에는 제한적 성질이 역사합니다. 즉, 같은 이스라엘이라도 어떤 자들은 그 선택에서 제외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기(遺棄)라고 그럽니다. 특별히 선택하시는 은혜를 저들에게는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은혜가 아무 받을 가치나 공로가 없는 자들 중에서 택하신 자들에게만 값없이 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롬9:27; 11:5; 사10:22-23). 어쨌든 하나님은 이스마엘,에서 등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제외시키셨습니다(말1:2-3; 롬9:13). 정리해볼까요? 그러니까 구약의 세상에는 세 단계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그냥 원래대로 유기된 자들입니다. 주로 이방인들이었겠지요. 그리고 다음은 외면적으로는 이스라엘로 부름 받았는데 중생의 영을 받지 못한 채 ‘중간 상태’에 있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아주 무익하고 헛된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 구원과는 상관 없었지요(갈4:28).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중 극소수의 사람들인데 내면적 부름을 받아 중생의 은혜, 곧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물론 이 중에는 이방인들도 제법 섞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 중에서도 얼마 안되는 영적 후손들에게만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택된 자들에게는 때가 되면 ‘부르심’이라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칭의, 회개, 믿음 등의 것들이 다 그렇게 선택의 증거가 됩니다. 반대로 유기된 자들에게는 불신앙과 거부와 배반 등이 그 증거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결과로 나타나는 ‘증거’들을 구원이나 심판의 ‘조건’으로 둔갑시키면 안 되는 겁니다. 노아의 방주는 우리의 구원이 인간의 공로나 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의 증거입니다. 이 교리를 떠나서 노아의 방주를 설명할 재주가 있을까요? 노아의 방주는 인간의 자랑을 막고 오직 하나님께만 찬양과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선택으로 사람들을 구원, 혹은 심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자들, 곧 구원하기로 예정하신 자들에게는 반드시 감기에 걸리면 열이 나는 것처럼 증상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증상들입니까? 교회에 나가고 싶어집니다. 성경을 읽고 싶어집니다. 예배가 즐겁습니다. 예수님이 믿어집니다.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됩니다.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지옥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어느 날 찬양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집니다. 기도하는 데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의 자녀로 선택하신 증거들입니다. 이 증거 굳게 붙잡고 하나님이 가게 하신 그 길을 죽을 때까지 잘 달려 가기를 축복합니다. 비틀거리지 말고 뒤돌아 보지 말고 주저앉지 마세요. 하나님이 유기하기로, 버리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반대 증상이 나타납니다. 괜히 교회가 싫어지고 예수 믿는 것이 우습게 보이고 성경은 보기도 싫고 대신 자꾸만 죄가 달콤해지고 세상이 좋아지고 의심이 커지고 못 믿을 증거들만 눈에 보이고 싫어 할 일들만 생기고 싸우고 그러다가 교회에서 떠나고 성경에서 멀어지고 아주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저와 여러분은 평생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살도록 예정하신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며 사는 복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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