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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3부 22장 : 자녀 출산(선택과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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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9:1-16절 개역개정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 2. (1절에 포함됨)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은 3부 22장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豫定)하심은 예지(豫知)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임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즉,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오직 부모의 뜻에 따라 되는 것처럼, 구원의 예정도 예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자녀 출산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자녀를 낳는 일은 아마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신비한 일이요 오묘한 일일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정말 황홀한 일이지요. 그런데 부모가 어떤 자식을 낳을 때 왜 낳습니까? 앞으로 태어날 그 자식이 분명 나중에 효도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바로 그 자식을 낳기로 결정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결정한 대로 그 자식을 골라 낳았습니까? 좀더 생물학적으로 표현 한다면 효심을 갖춘 정자를 골라 효도의 능력이 있는 난자와 결합시킨 것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부모가 자녀를 낳는 것은 태어날 자식을 기뻐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부모가 서로 기쁜 뜻으로 자녀 출산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생길 자식이 훌륭한 줄을 ‘미리 알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태어날 그를 훌륭하게 만들 소망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도 그와 같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에게서 어떤 선이나 공로를 미리 알고(예지) 발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기쁘신 뜻 때문입니다. 곧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예정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를 예지(豫知)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서론에서 든 비유가 너무 훌륭해서 더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예지의 보자기에 덮여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조금 더 설명해 봅니다. 왜 대를 이어가며, 중요한 학자들을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예지론을 사랑할까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전지(全知)하심을 찬양하기 위해서 일까요? 천만의 말씀이지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단지 사람을 조금이라도 높이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뭔가 볼만한 것이, 붙들만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지요.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그 결정적인 가치와 공로가 사람 자신에게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지하시는 것이 바로 사람에게 있는 그런 가치와 공로라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태어나는 그런 성향이나 능력을 보고 선택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저들이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예정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사실에 몹시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혼자 마음대로 그런 일을 결정하실 수 있는가? 우리도 우리의 운명에 간섭할 권한이 있지 않아?’ 신학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히 망가진 것이 아니라 일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불손하고 패역한 자들이지요. 한번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로 생각해보십시오. 어거스틴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에 따른 사건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시작과 끝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작정하심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오로지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직접 개입하신 사건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 결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과정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관해서 조금도 관여하거나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우리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았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에베소서1:4-5).”‘창세 전에’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공로나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까? 고려하려 해도 그럴만한 것이 전혀 없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만’ 선택하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 특히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는 표현은 원래는 우리가 거룩하지도 않고, 흠 투성이였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이 예지(豫知)하신 것이 있다면 우리의 무가치한 것을 예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거룩하거나 거룩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하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는 영원히 거룩하지도 못할 자를 거룩하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라는 말은 우리를 선택 하시는 은혜의 강물이 오직 그 한 근원에서만 흘러 나온다는 사실을 못 박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으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이 정당한 것이 되는 것 아닙니까?(엡1:6; 요15:16; 롬11:36 참조) 이번엔 야곱과 에서를 살펴 보십시오. 야곱과 에서의 예는 인간의 행위를 선택의 근거로 삼으려는 주장을 깨끗이 물리쳐줍니다. 잘 알다시피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였습니다. 한 배에서 났지요.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야곱은 선택을 받았고 에서는 유기 되었습니다(롬9:11-13; 창25:23 참조). 그 둘은 조건이 똑 같았습니다. 조건을 본다면 오히려 에서가 더 좋았지요. 장자권이 그에게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조건까지 무시하면서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상속권을 에서에게서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이처럼 저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는 저들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 것이고, 저들의 행위와 아무 상관없이 된 것이라고 바울은 큰 나팔 소리처럼 선포하고 있습니다. “11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로마서 9:11-13; 참조 창21:12; 48:20) 그러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따지고 듭니다. ‘현세에서의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내세의 영원한 삶 자체를 판단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장자의 명분을 얻었다고 그것이 곧 내세의 하늘 기업을 받은 것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말들이 어떻게 들립니까? 심지어, 에라스무스 같은 사람은 바울도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이미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야곱이 이 땅에서 받아 누린 장자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안에 감춰있던 야곱에 대한 영적이고도 영원한 선택을 증거해주는 표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만약 야곱의 그 장자권이 내세의 복과 아무 상관 없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야곱은 그 장자권 때문에 이 땅에서 각종 곤란과 고통과 비통과 슬픔과 외로운 타향살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고백대로 ‘험악한 세월’이었지요(창47:9). 그러나 그는 많은 재물과 함께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대로 하늘의 별같이 많은 후손을 얻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의 종들을 위해 하늘에 준비하신 영원한 기업과 복을 이 땅에서 누리는 외적인 기업과 복들로도 증명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미워하실 자를 미워하십니다(롬9:15-16). 아무도 그 결정에 끼어 들 수 없습니다. 물론 가끔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롬11:2; 참고 행2:23). 그러나 그 표현은 예지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망대 위에서 남이 하는 일들을 강 건너 불 구경 하듯 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소수의 사람들을 구별하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표현을 사용 한 적이 있습니다(벧전1:2). 여기서는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특별히 자신의 아들로 구별하시는 그 은밀한 예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또 다른 곳(딤후2:19)에서도 그 비슷한 표현을 써서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누어 진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전체요, 또 하나는 그 중에서도 특별히 구분되어 하나님만 보시는 곳에 숨겨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자들을 ‘아신다’는 표현은 똑같아 보이는 이스라엘 중에서도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신 자들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발언이야말로 최고의 권위가 있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하여 열심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 모두가 다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소수의 사람들만 복음을 영접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독생자를 주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틀림없이 예수님께로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복음을 믿는다고 말씀하십니다.“9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요17:9; 15:19; 6:37,39).” 그러니까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보이는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지요(요1:12-13; 엡2:8). 예수님이 ‘아시는 자들’은 바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하신 자들입니다(요13:18). 물론 가룟 유다에게도 ‘택했다’는 말을 씁니다만, 그것은 ‘사도직’에 제한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도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울이지만, 그 자체에 꼭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자신에게 접붙이신 자들은 하나도 잃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십니다(요17:11-12). 교부들 중에서는 암브로우스, 오리겐, 제롬 등이 하나님의 선택이 예지에 근거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어거스틴도 처음에는 저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따랐었습니다만, 곧 돌이켜 펠라기우스파들의 그같은 고집을 비난하면서, 인간의 공로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긍휼’만을 그의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그는 또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게 행할 것을 예견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선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받기에 합당한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예정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하심을 얻은 자는 적다는 사실입니다. 곧 부르심의 보편성과 선택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청함 받은 자는 많되 택함받은 자는 적다’(마22:14)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곳에 자신의 뜻대로 복음의 은혜를 분배하십니다(행16:6-7). 당연히 하나님께는 그럴 권리가 있지요(사53:1). 또한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소수에게만 믿음을 주십니다(요1:12-13; 마13장 밭의 비유). 그러니까 선택은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믿음은 항상 선택의 다음, 둘째 자리에 옵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된 사람만이 믿음을 가집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주의 음성을 들어도 오직 그의 선택 받은 양들만이 그의 음성을 알아 듣고 그에게 나온다는 말입니다(요6:46; 10:4-5, 26-29). 그리고 일단 그렇게 주께 나온 그의 양들은 끝까지 보호 받습니다. 선택이 영원한 것처럼 믿음도, 그리고 구원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 선택과 마찬가지로 유기도 역시 인간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에서처럼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자기의 범죄로 스스로 더럽혀지기도 전에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롬9:13,18). 이렇게 하나님은 선택이든 유기든 그 모든 원인을 오직 자기 안에서 찾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러냐고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하나님을 만족 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정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지를 강조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 1560-1609)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알미니안주의이지요.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미래 믿음’에 대한 예지에 근거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구원할 사람들을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 주권적 의지에 따라 아무 조건없이 사람을 구원하거나 유기한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예수님을 믿을지 말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간이 죄로 타락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이 제공하신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해 거부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은 이를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이 영원히 확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믿음을 떠나거나 타락하면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구원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지속적인 믿음’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 의해 거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은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는 불가항력적 은혜이고, 하나님은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뜻에 따라 선택한 자들을 끝까지 견인하여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낳은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부모님은 내가 똑똑할 줄 아셨나?’ ‘내가 돈을 잘 벌 줄 아셨나?’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낳은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자녀가 된 것은 오직 부모의 사랑과 뜻 안에서만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시거나 유기하시는 것도 오직 그 근거를 하나님 안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의 교회로 모이며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배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즐거이 사는 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하나도 잃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비록 여러 번 실수하고 넘어질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때마다 구덩이에서 우릴 건져 주시고, 상처를 고쳐 주시고 부러진 다리를 낫게 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형통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혹시 시련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편안히 죽어 영생의 나라 약속의 땅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저와 여러분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담긴 비밀이요 사랑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저와 여러분은 정말 행복자입니다. 세상 사람 부러워 하지 마세요. 두리번거릴 것도 없습니다. 이제 그 하나로 나머지 인생의 여러 모양에 대해서는 그저 즐기십시오. 가난한 것도 즐기고, 시련도 즐기고, 늙음도 즐기세요. 이런 믿음과 용기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셔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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