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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3부 23장 : 술 깨는 약(예정 교리에 대한 어리석은 비난들)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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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9:20-21절 개역개정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9월 9일 월요일

 

오늘은 323장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하여 일방적이며 무조건적이라고 비난하는 어리석은 공격들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 부당하고 어리석은 비난에 대한 답변입니다. 그것을 술 깨는 약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술은 알코올 성분이 1%이상 들어 있는 음료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지요. 몸 속 알코올의 80%는 간에서 분해 되는데, 술에 취하는 정도는 혈중 알코올 농도에 비례합니다. 취기는 마신 속도와 몸무게, 알코올 산화능력, 알코올 작용에 대한 감수성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대부분 처음엔 감각이 약간씩 무뎌지다가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고, 흥분하게 되며, 점차 우울해지거나 화를 내는 등 감정의 변화를 보이다가 비틀거리거나 토하고, 나중엔 보행 불능, 결국 혼수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술 깨는 약은 없을까요? 최근에는 술 깨는 특효약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꼭 술 취한 사람들이 술 주정을 부리듯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취해 예정 교리에 대해 주정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정 교리가 너무 일방적이고 무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주정엔 특효약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과 신약이 그 술 주정을 깨는 데는 명약입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보다도 더 자비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으로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에 어울리지만,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하신 성품에 어울릴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끔찍이도 하나님을 생각해주는 것 같습니다만 정신 나간 소리입니다. 저들은 자기들의 오성(悟性)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선택과 유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들을 때마다 자기들의 미련함과 교만을 억제하지 못하고, 마치 술 취한 사람들처럼 주정과 난동을 부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택과 유기 모두 절대적인 하나님의 작정과 주권에 속한다고 증거합니다. 저들은 겸손히 신약과 구약을 먹고 빨리 술 주정같은 헛소리에서 깨나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여러 곳에서 누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나 또는 누구를 강퍅케 하시는 일이나 모두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고, 토기장이의 예를 들어 강조했습니다(9:14,20,22-23). 예수님도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13). 그래서 나는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을 적극 지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리를 양으로도 만드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완고한 자들을 회개시키지 않으시는 것은 그럴 힘과 은혜가 하나님께 없는 것이 아니라,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강퍅한 마음보다 더 강력한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저들이 부리는 주정과 투정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들의 여러 주정중에 첫째 주정(酒酊)선택 교리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아직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를 짓지도 않은 사람을 어찌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에 넘겨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재판장의 합법적인 선고가 아니라 폭군의 변덕스러운 집행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헛소리에 대해 어떤 반박을 하기 전에 꼭 먼저 확실하게 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뜻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 하는 것은 대단히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보다 앞선 원인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 자체가 모든 존재의 원인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한, 최고의 의()이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그가 원하신다는 그 사실 때문에 곧 의()가 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냐고 누가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라고 물으며 그 이유를 묻는것은 하나님의 뜻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은 것을 찾으려는 망측한 짓입니다. 없는 것을 구하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는 있는 것까지도 잃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경은 온 인류가 죄에 팔린 것은 하나님이 홀로 결정하신 일이라고 명백히 증거합니다. 그렇게 결정하신 이유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지만, 저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은 이미 주께서 바울을 통해 확실히 주셨습니다.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9:20-21).” 물론 저들은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이 대답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이냐고 불평을 터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무지가 경솔한 지식보다 낫습니다. 성경이 이루 측량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우리가 왜 측량하려고 덤비겠습니까?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측량하려고 덤비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미련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들이 이유를 찾는 동안 우리는 그 비밀의 깊음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저들이 주정 부리는 동안 우리는 찬탄합시다. 저들이 따진다면 우리는 믿읍시다. 저들이 불평 하는 동안 우리는 감사하십시다.

둘째 주정은 선택 교리는 사람에게서 죄책과 책임감을 뺏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대자들(펠라기우스파,마니교도,재세례파,에피큐로스파 등)의 비난을 요약해봅니다. 만약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라면 사람이 죄 짓는 일도 어차피 예정된 불가피한 것이니까 그 책임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 혹시 하나님이 인간의 죄 지을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예정하신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충분히 말리실 수 있었는데 안 말리셨으니까 그 책임은 역시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이 듣기 싫으면 깨끗이 예정 교리를 포기하라는 것이지요. 정말 빈틈없는 공격 같지요? 저들이 이렇게 어리석은 비난과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정의 신비를 다 설명해 낼 수 없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의로우심과 자비하심이 인간의 좁쌀만한 머리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선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섭리주이십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 단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과 다르거나 상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가 도저히 하나님의 깊고 크신 뜻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세상만사는 다 그의 명령과 결정에 복종하여 이루어진다고 봐야 한다는 말이지요. ,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눈꼽만큼도 불의가 없으십니다. 홀로 인간의 타락을 결정하셨다 하더라도 또 그것이 설령 아무리 무서운 결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히 의로우신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책임을 머리카락만큼도 하나님께 물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인간의 타락을 결정하신 이유가 선하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게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은 그 타락을 통해 악에서 선을 만들어 내심으로 자신의 전능과 사랑과 공의를 확실히 보여 주셔서 자신의 영광을 충분히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왈라(Lorenzo Valla,1457년 사망)의 말처럼 인간의 죽고 사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예지보다는 의지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 인생들에게 부여 되는 필연성은 예견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예정)에 의한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하나님이 예견하시는 미래의 사건들은 이미 하나님이 그런 일들이 생기도록 결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담의 타락이 하나님의 예정과 상관없다면 하나님의 만물통치는 인간에게 의존하고 종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 단지 타락할 것을 예견하셔서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미 예정하신 타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허락이란 말과 뜻이란 말이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신 것이지요. 그러나 왜 그렇게 판단하셨는지의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졌습니다. 오지기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성경이 밝혀 주시는 대로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셋째 주정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편파성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정 교리를 혐오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편파적이라고 합니다. 저들은 사람이 죄인이라면 모두 다 처벌하시든지, 용서하시려면 모두 다 용서하셔야 된다고 하나님을 가르치려 합니다. 건방지고 무식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경은 밝히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지만 그 중에 얼마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이 꼭 맞습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들 중에 귀하게 쓰이도록 선택된 그릇은 자기의 의로 만든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만든 그릇이다. 그러나 나머지 그릇들이 천하게 쓰이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유를 찾을 문제가 아니고 심판에 돌릴 문제이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빚을 지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자기 뜻대로 죄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18:27이하). 자기 뜻대로 빚을 탕감해 준다고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 자격없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며, 또 그 은혜를 모두에게 주시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의를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외모나 행위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0:34; 2:11; 2:6;3:25; 2:5; 고전1:26).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선택하실 때 그 선택의 조건은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 안에서만 찾아져야 합니다.

넷째 주정은 선택 교리는 사람이 바르게 살려는 열정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모든 것이 엿 장수 맘대로라면 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예정의 신비를 지극히 경외하는 태도로 대하라고 가르치는 동시에 그 신비 앞에서 교만을 꺾고 겸손하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선택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룩하고 흠 없는 생활로 우리의 모든 열심을 집중하라고 격려합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선택받은 확신이 있다고 선한 삶을 중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선택의 목표를 거스리는 것이고 선택의 질서를 뒤 엎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끊임없는 열망은 바로 선택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택받았다는 자부심과 믿음이 나로 하여금 더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부추기는 것이지요.

다섯째 주정은 선택 교리는 모든 충고를 필요없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는 선하게 살 것이요, 유기하신 자는 악하게 살 것이니 악하게 사는 자들에 대해 무슨 충고가 필요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어거스틴이 책망과 은총에 관하여 발렌티누스에게 보냄이라는 책에서 통쾌하게 밝혔듯이 바울 하나만 보아도 끝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 교리를 수도 없이 선포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똑같은 열정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바르게 살도록 충고합니다(살전4:4,7; 2:10).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믿음이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선언하셨지만 동시에 나를 믿으라고 명령하십니다(1:12-13). 그런 충고는 들을 귀 있는 자에게는 약이 되고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는 화가 되는 것이지요(13:9; 4:23-25; 6:9).

물론 우리는 누가 선택되었는지 누가 유기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두번 말씀을 안 받아들인다고 해서 당신은 원래 유기 되기로 예정되었으므로 소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우린 누구를 그렇게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할 일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모두에게 믿음을 권하고 거룩한 삶을 격려해야 합니다(10:6; 10:13 참조). 우리의 책망과 충고가 택함받은 자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고전3: 6-8). 그러므로 우리는 예정과 동시에 충고를 부지런히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기 자랑의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기의 미련함과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예정 교리를 헐뜯습니다. 자기 머리로 이해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리가 아니라는 식이지요. 그러나 감추어진 그 비밀을 우리가 다 이해 못한다고 성경이 선포하는 분명한 말씀들과 지금 우리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는 확실한 증거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부당하다거나 사람의 죄의 책임이 모두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헛소리들은 술에 취해 주정하는 것 보다 더 미련하고 악한 술 주정과 같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구약과 신약을 잘 먹으면 그 술에서 깨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린 그저 자기의 구원과 믿음에 대해서는 겸손과 감사로 하루 하루 평생 조심해야 하고, 남들의 믿음과 구원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증거들을 보고 그렇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평생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것이 최선의 길이고 최고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이 믿음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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