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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3부 24장 : 하나님의 선택과 우리의 믿음의 관계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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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8:12-30절 개역개정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은 3부 24장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우리의 믿음, 곧 구원과의 관계에 대해 대한 이야기이지요.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을 때 아멘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교회에 나오고, 또 왜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전도를 해도 노멘, 항상 얼굴을 돌리고 죽어라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어떤 수도꼭지는 틀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어떤 수도꼭지는 아무리 틀어도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도꼭지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수도꼭지가 무엇입니까? 주방이나 세면대 벽에 박혀서 물을 쏟아내는 기구이지요. 모양은 다르게 생겼지만 꼭지를 틀면 수돗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참 편리하지요. 옛날엔 빗물을 받아 먹고, 시냇물이나 우물 물을 길어 먹었지만, 오늘날 도시에서는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강물을 끌어다 먹어야 합니다. 일정한 수량과 깨끗한 수질을 위해 취수 시설, 정수 시설, 급수 시설, 그리고 집 안의 수도 꼭지까지 전달하는 급수장치 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완벽한 시설들과 연결되어 있는 수도 꼭지는 반드시 좋은 물을 쏟아 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릴 부르실 때 우리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반응의 꼭지’가 아득히 멀리 있는 저 선택의 강에 연결만 되어 있다면 돌리는 순간, 틀림없이 은혜의 강물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과도 연결되지 않고 겉 모양만 있는 꼭지도 있습니다. 아무리 틀어도 물이 나올 리가 없지요. 그리고 물론 오염되고 냄새 나는 물에 연결된 수도 꼭지도 있습니다. 물이 나와도 걱정 아닙니까? 이렇게 선택이 다르면 반응이 다른 법입니다. 하나님은 선택을 자신 안에 감추어 두시지만 때가 되면 그 택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롬8:29-30).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은 효과적으로 부르심(소명)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갑니다. 부르심으로 선택을 증거하시는 것이지요. 아무리 선택을 받았어도 부르심을 받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부르심을 받으면 그 선택의 강물을 받아 먹기 시작합니다. 부르심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대체로 복음 선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물론 복음 선포는 악인들도 함께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선택을 완전히 증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부르시는 것은 ‘외적 부르심’, ‘외적 소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직접 역사하셔서 가르치시고 회개케 하시는 부르심을 ‘내적 부르심’,‘외적 소명’이라고 합니다.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도 그러지요.(롬8:15; 엡1:13-14; 고후1:22).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혹은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요6:44-46). 성령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자들의 마음은 우선 부드러워 집니다. 그 강퍅함이 제거되는 것이지요(겔11:19; 36:26). 이러한 내적 소명은 차별적입니다. 성령께서 어떤 이들의 마음은 심판으로 지도하시고, 어떤 이들의 마음은 긍휼로 지도하십니다(롬9:18, 14장). 그러므로 소명은 선택에서 나고 선택은 긍휼에서 납니다(롬9:16). 말장난을 좋아하는 어떤 자들은 만약 우리의 소원과 노력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팔을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 턱도 없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사람의 소원과 노력이 없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허사가 된다는 말입니까?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을 주의 긍휼에 돌리고, 우리의 소원과 노력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효과적인 부르심은 말씀의 선포와 성령의 조명에 의해 완성됩니다. 다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성령이 그 마음에 은혜로 역사해야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말입니다(요일3:24; 4:13)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믿음은 효과적인 소명에서 나고, 효과적인 소명은 선택에서 납니다. 어떤 사람들의 오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동의해줌으로써 하나님과 구원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지 선택이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키려고 할 때 가장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의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잘못된 곳에서’ 선택의 비밀을 캐내려는 열망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지극히 거룩한 곳까지 침투하게 충동하는 것이지요. 일단 그곳에 들어간 사람은 볼 수 없는 암흑 속에 묻혀버릴 것이며, 풀려날 수 없는 수만 가지 올무에 걸릴 것이며, 밑도 없이 내려가는 소용돌이에 그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혹은 사람들이 가장 환영하는 위험이며, 또 양심의 평화를 깨뜨리는 가장 치명적인 공격입니다. 예정에 대한 논의는 험한 바다를 항해 하는 것과 같아서 고의로 위험한 곳으로 뛰어 들든지, 사탄이 장치해 놓은 바위들에 부딪치지만 않는다면 안전하고 평온하며 심지어 유쾌하기까지 한 뱃길이 될 것입니다. 이 때 성경은 해도(海圖)나 나침반과 같습니다. 경험에만 의존하면 우리 양심은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붙들면 안전하고 기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생각되고 이해되고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엡1:4). 심지어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떼어 놓는다면 아버지 안에서도 선택의 보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우리의 선택을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는 선택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요3:16; 롬13:14; 요5:24). 예수 그리스도 없으면 벽에 자기 혼자만 달랑 붙어 있는 수도꼭지와 같습니다. 믿음 생활 잘 하다가도 가끔씩 불안해 지는 이유는 ‘혹시 내가 선택 받지 못했으면 어떡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그리스도께 주신 자들의 구원은 확실하고 영원합니다. 절대 취소되지도 좌절되지도 않습니다(요6:37,39; 10:27; 17:6,12).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들의 견인(堅忍)은 확실합니다. 물론 지나친 자신감은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마22:14; 롬11:20-23)는 말씀처럼 우리는 항상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의심하고 염려하는 것은 더더욱 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6:37,39). 아버지께서 심은 자들은 절대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마15:13참조). 그리고 선택한 자들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성령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빌1:6;요일2:19; 롬8:38-39; 눅22:32). 종종 믿는 자처럼 보이던 사람이 배도와 타락의 길로 급행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그들은 원래부터 선택의 강과는 상관없는 수도꼭지였던 것입니다(요17:12). 겉으로 볼 땐 저들에게도 선택된 자들과 같이 외적 부르심이라는 표징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적인 효과적인 부르심은 없던 자들입니다. 꼭지를 돌려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성경에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마22:2-9). 한 왕이 아들의 혼인을 위해 큰 잔치를 계획합니다. 미리 초청 받았던 자들이 왕의 초대를 거절하지요. 왕은 사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래서 연회장이 가득 차지요. 그런데 왕은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았다며 어떤 사람들을 적발해 내고 화를 내며 쫓아냅니다. 예수님이 그 예화의 결론을 이렇게 내립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도다(마22:14; 20:16 참조).’ 즉 복음의 초청에 많은 사람이 듣고 응할 수 있고, 교회에 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중에는 실제적이고 효과있는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소명에는 중생의 영이 역사합니다(딛3:5). 예복을 입지 않았다가 오히려 심판받고 쫓겨나는 자들에게는 복음의 부르심이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정죄의 기회로 작용하는 경우입니다(고후2:16). 가룟 유다같은 예가 대표적이지요. 그는 사도라는 직무로는 부르심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자녀로는 부르심을 받지 못했습니다(요17:12; 6:70; 13:18).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원 전부터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빌4:3). 그러므로 그레고리가 ‘우리는 우리의 소명을 알뿐 선택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고 한 것은 대단히 위험한 오해입니다. 그는 선택을 우리의 행위라는 공로에 의존시키려 했기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의심으로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든 것입니다. 선택 받은 자는 필연적으로 효과 있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선택 받은 자들 속에는 ‘선택의 씨’가 심겨져 있고, 그 씨가 자라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선행을 어느 정도 준비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Bucer). 바울이 그랬고 고넬료가 그랬다는 것이지요(빌3:5-6; 행10:2). 그러나 ‘선택의 씨’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시기 전까지는 누구나 다 방황하는 양이고, 진노의 자식이고, 허물과 죄로 죽어 아무 소망이 없던 자들입니다(엡2:1-3,12; 5:8-9; 사53:6). 기생 라합이나(수2:1), 최후의 순간에 회개를 생각한 강도에게서(눅23:42) 무슨 씨앗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미 말한대로 하나님이 유기하기로 작정하신 자들도 외적 부르심은 있습니다. 그렇게 겉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 혹은 거절하거나 혹은 교회에 나와 집사 장로 목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원수로 살다 죽습니다. 결코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선택의 씨앗이 심겨져 있어서 그것이 성공적으로 자라면 믿고 구원을 받고, 자라는데 실패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는 나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의 강에 연결되어 있고, 누구는 아예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을 부르시기 전에도 긍휼로 보호하십니다. 그러다가 선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이 효과적으로 부르실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교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들을 효과적으로 부르시는 것처럼, 유기하신 자들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심판하십니다.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으로 예정하신 자들에게서는 듣는 귀를 빼앗으시며 보는 눈을 멀게 하시고, 똑같은 말씀으로도 그 마음을 오히려 강퍅하게 하십니다(출4:21; 사6:9-10; 마13:14-15; 요12:39-40; 행28:26-27). 물론 말씀을 거절하는 일은 자신들의 타락하고 사악해진 마음 탓이지만, 이미 저들을 하나님이 패역한 상태에 넘기셨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을 보십시오(삼상2:25). 하는 짓이 얼마나 패역하고 악합니까? 죽을 죄에 해당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죄악에 넘기운 것은 하나님이 저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으신 지혜와 판단은 그들의 정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스스로 원하는 사람, 자기 손을 뻗치는 사람을 하나님이 끌어 당기신다고 말했지만, 은혜를 주시든지 벌을 주시든지 모두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서만 오는 것입니다(행13:48; 롬9:21-22; 출33:19). 가끔 성경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만(겔33:11; 딤전2:3-4; 벧후3:9), 그것이 구원의 무차별성이나, 구원을 사람이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회개하는 자들을 그렇게 간절히 찾으신다는 뜻이고, 민족이나 ‘계층’의 구분없이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리고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경건의 길에서 진보가 있으려면 계속 성령의 자극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것처럼 매일 우리 마음 속에 성령께서 은혜로 역사하셔야 합니다(행16:14). 정리해 봅니다. 수원지의 강에 완벽한 시설과 수도관으로 연결된 수도꼭지는 틀기만 하면 반드시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강에 연결된 사람은 반드시 은혜의 강물 쏟아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은밀하고 비밀스러워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 선택은 효과있는 부르심을 통해 틀림없이 증명됩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강으로부터 때에 따라 풍성한 은혜를 공급 받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맘대로 누구는 구원하기로 누구는 버리시기로 영원 전에 이미 작정하셨다는 것이 바로 예정 교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하신 선택된 자들은 반드시 수원지에 연결된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듯 믿음의 여러 반응들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식구가 되어 그 믿음이 날로 날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미리 작정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묘한 말장난을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넓으신 분이시고 공평하시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를 주신다느니,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을 찾는 자가 구원을 받아야 공평한 것이라느니,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구원 받고 천국에 가야 한다느니 하면서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얘기합니다. 될 수 있으면 다르게 해석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 맘대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작정하심이요, 예정하심에 있습니다. 왜 그렇게 예정하셨느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예정의 바다는 사탄이 감추어 놓은 암초들이 드글드륵 합니다. 왜? 왜? 하고 묻다가 그 암초에 부딪치면 믿음의 배가 파괴되어 올바른 항해를 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성도들을 공격할 때 가장 잘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의심’하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창3:1) ‘하나님이 정말 그러셨냐?’ ‘하나님이 과연 나를 선택하셨을까?’ ‘나는 정말 구원 받았을까?’ ‘하나님이 정말 내 기도를 들어 주실까?’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실까?’ ‘예수님은 정말 부활하셨을까?’ 이런 의심들이 내 믿음의 배를 파고 들면 금방 배는 파선하고 침수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를 출입하고, 예배의 자리에 서 있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선택의 증거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작은 증거들을 굳게 붙잡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들을 여러분의 삶에 콸콸 쏟아 내십시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은 절대 하나님이 도중에 버리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양심이 늘 평안을 유지하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천국의 수도꼭지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기에 틀기만 하면 하나님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렇게 틀기만 하면 물이 쏟아지는 수도 꼭지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각종 좋은 은사와 열매들을 우리의 입과 삶을 통해 가정에서 학교와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콸콸 쏟아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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