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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3부 25장 : 번데기(최후의 부활)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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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15:51-54절 개역개정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오늘은 3부 25장입니다. 최후의 부활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그것을 번데기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번데기가 무엇입니까? 곤충이 알에서 성충으로 변화되기 위해 거치는 중간단계입니다. 곤충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가 아마 나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한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나비가 꼭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지요. 바로 번데기 단계입니다. 번데기는 변태과정의 중간기라고 할 수 있는데, 고치 속에 죽은 듯이 들어 있는 애벌레를 번데기라고 하지요. 번데기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고치는 그 애벌레의 입에 있는 견사샘에서 분비된 견사나 다른 분비물 등을 이용해서 짓습니다. 누가 그런 고치를 보면서 황홀한 나비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결국 번데기는 고치를 찢고 하늘을 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부활의 날이지요. 이렇게 번데기 시기가 있는 곤충을 완전변태곤충이라고 합니다. 변태(變態)라는 말은 ‘태’, 즉 모양이 변한다, 바뀐다는 말입니다. 애벌레가 번데기로 그리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번데기가 곤충 중 가장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나는 것처럼 그 모습이 완전히, 그리고 놀랍게 변하는 곤충을 완전변태곤충이라고 합니다. 잠자리 메뚜기 등의 곤충은 불완전변태를 합니다. 번데기 과정 없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나비 모기 파리 벌 등은 번데기를 거쳐서 변합니다. 완전변태라고 합니다. 육상 동물 중에서는 곤충의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제로 세상 모든 동물 식물 만물 중에서 완전변태의 챔피언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은 달걀 같은 난자와 올챙이 같은 정자가 결합되어 사람이 되고, 점점 자라 어른이 되었다가 어느 날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속하게 늙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죽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도 젊어서 많이 죽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늙어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무덤에 묻습니다. 무덤 속에 누운 시체는 그 흙더미 속에서 천천히 썩습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그 썩었던 몸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하늘로 오릅니다. 그렇게 하늘로 오르는 몸은 예전의 그 몸이 아닙니다. 잠깐 반짝했다가 점점 늙고 병들고 죽었던 몸이 아니라 눈부시게 변화된 새로운 몸, 하늘을 나는 몸, 하늘에 속한 몸으로 변하는데 이 몸이 어떤 모양인지 저도 잘 모릅니다. 아무튼 성경이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는 가장 분명한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히 변화하는 몸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죽음이란 번데기 과정을 통해서 모두 완전히 다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야말로 부활을 통해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부활의 날이 와야 비로소 화려한 외출이 시작됩니다. 땅의 존재에서 하늘의 존재로 비상하는 것이지요. 부활을 모른다면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무덤이 곧 번데기의 고치와 같은 것임을 아십니까? 애벌레처럼 사방에 무수한 위험을 두르고 살아야 하는 우리 신자들에게는 비상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태산같은 불행이 우리를 압도할 뿐 아니라, 미치게 만드는 세속의 향기들이 날마다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낙심하거나 실족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우리의 삶이 애벌레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우쳐 주십니다(골3:3-4; 딛2:12-13). 그 소망은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이 땅에서 저 하늘 위로 끌어 올려 줍니다. 우리의 참 보물이 하늘 위에 있음을 기억 나게 해주는 것이지요(마6:21). 그래서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의 끈을 하늘의 말뚝에 잡아 매 줍니다(골1:4-5; 빌3:8,13). 그 정도로 우리 마음이 무장 되어야 비로소 우리의 인내심은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벌레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 하나는 부지런히 부활의 소망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을 줄기차게 명상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복음의 유익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면 ‘하늘에 있다’고 대답해야 하고, 우리의 취미를 물어 보면 ‘하늘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빌3:20).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그런 소망을 비웃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자들은 우리 몸의 부활을 아예 부인하거나, 또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영혼의 불멸은 인정하면서도 육신의 부활은 인정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보면 원래 사람의 마음으로는 부활의 진리를 받아 들이거나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에 참여하는 길을 방해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죄로 어두워진 우리 마음인 셈이지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이 엄청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성경은 두 가지 도움을 줍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며 우리의 부활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고전15:13-14,16,19,23 ;요11:25).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부활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의 부활을 입증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기의 반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였고(마27:66), 무덤을 지키던 보초들은 더러운 침묵과 거짓말로 그 부활을 전파하였습니다(마28:12-13,15). 또 천사들도 증거에 참여했지요(마28:6). 그리고 주님은 겁에 질렸던 여자들과, 두려워 떨던 제자들(눅24:40; 행1:9), 그리고 동시에 오백여 사람들에게 보이셨고(고전15:6),핍박자였던 바울을 압도하여 땅에 굴복시키셨습니다(행9:4; 7:55).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눈 앞에 두고도 믿지 못한다면 정말 패역하고 어리석은 고집쟁이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이 준비한 도움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부활 소망을 포기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부활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을 이루시는 분이 누구신지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활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면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번데기도 나비가 되고, 씨앗이 큰 나무로 변신하는데요? 그래서 성경은 계속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선포합니다. 에스겔이 본 해골 환상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겔37:1-10; 비교 요5:28-29).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로 골짜기의 해골들이 큰 군대로 부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에스겔뿐 아니라 욥(욥19:25-27), 이사야(사26:19), 다윗(시68:20), 바울 등 대부분 믿음의 영웅들이 부활을 모든 소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신기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빌3:21; 고전15:36)? 사람은 항상 부활을 묵상하며 살아야 하는데도, 이교도들 중에 어떤 도적들은 마치 일부러 계획이나 세운 것처럼 죽으면 만사가 끝장 나고 인간은 그대로 사라져 버린다고 주장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도적질하려는 자들의 어리석은 생각들이지요. 당시 사회에 널리 퍼졌던 이런 생각(전9:4)은 교회 안으로도 들어 왔고, 또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고 공언하고 다녔습니다(막12:18; 행23:8). 그렇다면 저들은 왜 그렇게 정성을 다해 시체를 매장한단 말입니까? 그것은 곧 부활과 내세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런 풍습으로 이방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사탄이 저들의 부활에 대한 기억을 시체와 함께 묻어버리지 않았다면, 열심히 매장을 하면서 동시에 부활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말을 내 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천년왕국론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천년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너무 유치한 실수입니다. 그 ‘천년’이란 기간은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지상에서 애벌레처럼 수고하는 동안 교회가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입니다(계20:4). 그리고 도리어 성경은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둘 다 영원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마25:41,46). 놀랍게도 저들은 사람이 이 땅에서 지은 죄에 비해 하나님의 영원한 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합니다. 사람의 죄는 일시적인 것이고 따라서 죽음과 동시에 그 모든 죄가 소멸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재세례파(John Denck 등) 등이 ‘만인구원론’(Universalism)을 주장하는 근거 아닙니까? 기가 막힌 발상입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서 범죄함으로 더럽힌 하나님의 위엄과 공의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지은 죄는 영원합니다. 저들은 정말 하나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들입니다. 또 어떤 호기심 많은 자들은 영혼도 시체와 같이 무덤 속에서 잠 자다가 둘이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황 요한22세(1316-1334) 등이 주장한 영혼수면설이지요. 성도들의 영혼도 부활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뵙지 못한다는 말입니다(1333년 파리 신학자들에 의해 단죄됨).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가장 빛나는 우리 영혼에게서 불멸의 은사를 훔쳐 가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부르지만,몸과 영혼이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몸을 영혼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그랬고(벧후1:14; 고후5:1,6,8),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금방 죽을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고 약속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눅23:43). 그러므로 영혼의 중간 상태에 대해서는 성경이 가르쳐주신 울타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즉 성도의 영은 낙원에 이르러 예수님의 재림의 날까지 머물고, 악인들의 영은 큰 심판의 날까지 흑암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유6절).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또 부활할 때는 지금의 몸이 아니라 다른 새 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자기 몸이 꽤 싫은 가 봅니다. 마니교도들처럼 실컷 죄 지은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말은 곧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것을 깨끗이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습니다(고후7:1). 그리고 성경은예수의 부활 생명이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4:11). 우리의 지금 몸이 성전이 아닙니까(고전3:16)?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고난 받은 우리 몸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거절 당한다면 얼마나 불합리한 것입니까? 만약 지금의 몸이 사라진다면 내세에 무엇이 자 잘못에 따라 심판과 칭찬을 받겠습니까(단12:2)? 또 죽음이 몸을 입은 인간의 타락으로 생긴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가져온 회복은 바로 그 몸의 치료에서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속죄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그 몸이 부활하실 때 다른 몸으로 바뀌었다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미래의 부활에 대한 보증이며(골2:12),또 우리 입으로 영적 은혜의 상징들을 받는 성만찬은 부활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몸을 정중히 매장하는 것입니다. 그 몸을 위해 새로운 생명이 준비된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지요. 매장은 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장례를 통해 모든 것을 썩히는 무덤에서 우리 눈을 들어 모든 것을 갱신 시키는 부활의 광경을 그려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등 족장들이 붙들었던 소망이지요(창23:4,19; 47:30). 아무튼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들 중에서 부활 교리만큼 확실한 증거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의 본체를 그대로 부활 시키시되 그 성질은 완전히 바꿔 주실 것입니다(고전15:39; 51-54). 물론 불신자들도 부활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다릅니다. 한쪽은 심판을 받기 위해, 또 한쪽은 생명을 얻기 위해 부활 합니다(요5:29). 성도에 있어서 죽음은 화려한 나비가 되기 위한 번데기의 기간입니다. 번데기가 목표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고치를 깨고 나비로 날아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망도 단 하나입니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승리가 죽음을 아주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고전15:54-55). 지금은 비록 아직 기다려야 하고 인내해야 합니다만 성도가 받아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은 필연적입니다. 성경은 그 놀라운 세계를 물질적인 소재로 대강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미로움은 조금만 맛 보아도 우리에게 강렬한 소원을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쓸데 없는 호기심을 발동하여 하늘을 샅샅이 다 뒤져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얼굴을 마주 보듯 확실히 알 때까지 지금은 ‘거울’과 그 ‘희미함’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정도 기쁨과 소망으로도 충분합니다(고전13:12). 게을러 터진 사람들은 어떻게 하늘로 갈 것인 가엔 관심이 없고, 하늘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인들은 영원한 불행에 떨어져야 합니다. 역시 불 못,어둠, 울음, 벌레 등 물질적인 소재들로 대강 표현 했습니다(마3:12; 8:12, 22:13; 막9:43; 사66:24).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떨어져 나가야 된다는 것은 형벌 중에 형벌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악인들은 영벌에 내 버리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복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애벌레처럼 살아가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격려하셔서 부활의 그 날까지 계속 전진하게 하십니다(시90:7이하; 고전15:58). 여러분, 애벌레는 고치에 들어가기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부활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때가 오면 고치를 깨고 나비로 부활 할 것을 열망하기 때문입니다. 번데기의 소망은 단 하나, 부활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소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법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에 대해 깜깜합니다. 세상의 태산 같은 시련과 고난, 그리고 뱀의 혀 같은 무서운 유혹들에 속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좋은 이유는 우리 모두 다 훗날 생명의 부활로 다시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늘 부활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항상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서 부활 믿음으로 세상의 시련과 유혹을 다 이기고 훗날 생명의 부활로 부활해서 모두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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