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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장 : 가정 학교(교회와 성도의 관계)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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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2:20-22절 개역개정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오늘부터는 기독교 강요 제 4부를 공부합니다. 간단히 복습해 볼까요? 기독교 강요는 모두 4부 80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제 1부는 모두 18장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2부는 모두 17장으로 구원주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제 3부는 25장,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 다루었습니다. 제 4부는 모두 20장으로 은혜의 방편인 교회에 대해서 입니다. 오늘은 제 4부 1장입니다. 성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이끌어 들이시며 그 안에 머물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외적인 수단과 도움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가정 학교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가정 학교’(Home Schooling)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학교가 일반화된 오늘날 새삼스럽게 다시 ‘가정학교’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처음엔 종교적 이유가 그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세속적 가치관으로 더 이상 내 자녀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즘은 그 이유가 점점 확대 되고 있습니다. ‘시험 위주의 학교 교육이 싫다.’, ‘도덕적 타락이 위험 수준이다.’, ‘개성이 말살되고 상상력과 창조성이 죽는다.’, ‘사교육비 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부모들이 직접 가정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지요. 요즘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우수한 가정학교 홈페이지들이 많기 때문에 가정 학교를 진행하기가 훨씬 쉽다고 합니다. 인터넷 덕분에 과목이나, 교재나, 강사 등이 단숨에 해결되고, 또 비용도 아주 저렴해졌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가정학교’는 21세기의 강력한 ‘대안학교’로 등장할 것입니다. 교회는 ‘가정 학교’와 같습니다. 교회는 성도에게 어머니와 같고 선생님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죽을 때까지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견교회(可見敎會)와 보이지 않는 불가견교회(不可見敎會)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라고 할 때 그 ‘공회’는 지금 현재 눈에 보이는 ‘가견 교회’뿐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곧 눈에 보이는 가견 교회와 보이지 않는 불 가견 교회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것을 ‘보편교회’라고 부르지요. 그리고 보편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뉘지 않는 것처럼 나뉘지 않습니다. 곧 세상에 교회는 단 하나뿐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그리고 주의 자녀들은 모두 이 교회에 속해 연합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서로가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서로 단단히 결합됩니다(엡1:22-23; 롬12:5; 고전10:17; 12:12,27; 엡4:16). 모두 한 믿음 한 소망 한 사랑으로, 같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 함께 살고, 다 함께 영생을 받고,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께 참여하기 위해서지요(엡5:30). 이 교회에 연합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그 조항은 또 대체로 눈에 보이는 교회, 즉 가견 교회에 적용되는 고백입니다. 그 뒤에 이어 나오는 ‘성도가 서로 교통 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성도는 한 교회를 어머니로 하고 서로 한 가족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무엇이든 서로 나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은혜의 다양성이나 개인적인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은 서로 한 마음 한 뜻으로 가족 같은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교회는 성도들에게 어머니가 됩니다. 교회는 성도의 구원을 위해 낳고 양육하는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키프리아누스나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는 자녀들에게는 교회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육신의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 아직 천사들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약점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 외적인 보조 수단들을 교회에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교회의 품에 안겨, 교회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도록 배려 해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교회는 ‘가정 학교’와도 같습니다. 한 핏줄, 한 몸됨이 기본이 되어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이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평생 이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평생 이 학교를 떠나도록 허락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의 용서나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37:32; 욜2:32). 물론 가견 교회 속에는 가라지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순식간에 자녀들을 완전하게 만드실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아니하시고 그들을 교회에 맡겨 교회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장성한 신자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일을 위해 하나님은 교회에 자기의 대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목사와 교사들입니다(엡4:10-13). 그래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목사와 교사의 가르침과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을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는데(롬10:17; 1:16), 그 복음을 목사와 교사들의 입에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하나님의 입’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옛날 제사장들의 입을 통해 그러셨던 것처럼(신18:15; 말2:7) 저들을 통해 회중들의 믿음을 일치하게 하고, 순종을 시험하며, 또한 그런 ‘해석자들’을 통해 친근하고 부드럽게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원래 어떤 외적인 수단에 매이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연약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권능을 이 평범한 방법에 매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신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집회를 멸시하고 설교를 무시한 채 혼자 명상하고 혼자 읽고 해석한다고 그러다가 여러 가지 치명적인 올무에 걸리고 극악한 오류에 빠집니다. 교만하고 완고한 자들은 사람의 입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멍에를 도무지 메지 못합니다. 그것은 전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비취는 하나님의 얼굴을 지워버리는 것과 같지요(고후4:5-6). 어느 시대나 예언자들과 경건한 교사들은 그런 불경건한 무리들과 어려운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오직 외면적인 복음 선포에 의해서만 하나가 되고 성장합니다. 옛날에도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 성전의 올바른 사용을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을 지극히 존귀한 이름으로 부른 것도 다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전을 높이신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시기 위한 것이란 말이지요. 특히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시42:2)이라고 부르시는 동시에 ‘발등상’(시132:7)이라고도 부르신 것은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엡4:13).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 있어서 다 함께 모이는 공중예배만큼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예배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점진적으로 가르치시고 성장 시키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맡은 성직의 중요성은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성직은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즉, 전도자나 교사는 성령의 동역자가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눅1:17; 말4:5-6; 요15:16; 고후3:6).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 홀로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면 사역자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지요(골1:29; 고전3:7; 15:10). 사람의 지성을 조명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자기의 공로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신성모독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가견 교회의 회원은 누구이며, 교회의 표지는 무엇일까요? 이미 밝힌 것처럼 교회는 눈에 보이는 가견 교회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견 교회로 나뉩니다. 이를 보편교회라 부르는데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선택받은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곧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교회이지요. 그 중에서 가견 교회는 말 그대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지상의 교회들을 말합니다. 가견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얻고, 성찬에 참여 함으로 진정한 교리와 사랑에 의한 연합과 교제를 증거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며, 말씀 전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직을 보존합니다. 물론 이런 교회 안에는 가라지들이 많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지신 특권입니다(딤후2:19). 사람이 그 흉내를 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라지처럼 보여도, 공적인 재판으로 출교하기 전에는 그들을 보편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하여튼 우리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처럼 가견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지만 다음 두 가지 표지를 갖고 있으면 참 교회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듣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대로 성례가 시행되는 것입니다. 이런 바른 표지가 있는 교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버리면 안됩니다. 교회에 바른 표지가 있고 성실하게 그 두 가지를 시행하면 반드시 교회는 복을 받고 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이 두 가지 표지가 있다면 그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하듯 그 지도에 복종해야 합니다. 아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이 세상에 진리의 파수꾼으로 세우시고(딤전3:15), 그리스도의 신부로 취하시고(엡5:27),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한 몸’(엡1:23)으로 세우신 교회를 버리거나 떠나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정 학교’를 떠나는 패역한 자식과 같습니다(엡5:23-32). ‘가정 학교’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피로 맺은 가족입니다. 조금 가르치는 방법이 맘에 안 든다고, 가르치는 것이 좀 시원찮다고, 함께 배우는 형제의 성격이 맘에 안 든다고, 자매가 실수해서 죄를 지었다고 그 가정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잖습니까? 요즘은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쉽게 자기 교회를 버립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강단의 교리가 조금 다르다고 교회를 버리면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다는 등의 본질적인 교리에서 틀리면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이고 이단적인 교리가 아닌 이상 그 정도 중대하지 않은 교리나 가르침 때문에 교회를 나누거나 떠나면 안 됩니다. 또 사소한 다툼 때문에 떠나도 안 됩니다. 우리는 남들의 결함을 참는 일에 있어서 보다 너그럽고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납하는 것은 꼭 미끄러운 내리막길 같아서 잘 미끄러지고, 또 사탄이 매복하여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카타리파(Cathari)나, 도나투스파, 그리고 일부의 재세례파 등처럼 마치 자기들이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결함이 있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절교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교회에서 부도덕한 일이나, 불경건한 일이 있는 것을 보면 금방 그 교회는 가짜인 것처럼 비난합니다.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가견 교회는 악인과 선인이 섞여 살 수 밖에 없고(마13:47-48), 또 아무리 선인이라도 아무 부족이나 흠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판단할 때 한 두가지 행동만 보고 전체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엄청납니까? 저들 교회는 도덕적, 교리적, 영적으로 눈 뜨고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저들에게서 ‘교회’라는 이름을 빼앗지 않습니다. 교회의 표지가 유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주변에서 저들 교회보다 악한 교회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가까이 하기 싫은 악한 교우와도 성찬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까이 할 수 없어도 교회의 성찬에는 함께 해야 합니다. 성경도 성찬을 바르게 받는 책임을 교회 전체에 묻지 않고 개인에게 묻습니다(고전11:28). 그리고 악한 한 교우의 더러움은 다른 교우에게 전염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럽다고 생각하는 교우가 성찬을 집례하거나 참여했다고 해서 그 성찬을 회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로서 존재할 때 교회의 결점들은 분열이 아니라 용서의 기회입니다. 구약의 성전과 예루살렘이나 신약의 교회는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합니다(욜3:17; 엡5:25-27). 하지만 옛날 예언자든, 사도들이든, 그리스도께서든 그것들의 허물과 연약함과 더러움을 그대로 용납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허물과 더러움이 있다고 해서 거기서 회피하거나, 새로운 성전을 만들거나, 교회를 쪼개지 않았습니다. 오직 연합을 열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교회에 어떤 결점이 발생할 때 얼른 그것을 용서의 기회로 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첫 현관문이 바로 죄의 용서 아닙니까? 죄의 용서는 교회의 하나됨과 생명과 기쁨을 위해, 항상 교회의 중앙을 관통하여 흐르는 용서의 강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사33:14-24). 그러니까 우리는 죄의 용서로 교회에 가입되며, 또한 죄의 용서로써 교회로 보존됩니다. 일평생 허물이 따라 다닐 수 밖에 없는 우리는 단번에 죄를 용서 받고 또 매일 계속해서 용서 받습니다. 주님이 교회에 맡긴 열쇠의 권한은 처음 믿고 회개하는 신자 보다는 기존 신자들의 매일 거듭 되는 죄를 용서해주는 권세입니다(마16:19; 18:18; 요20:23). 또 말씀을 맡은 자들이 할 가장 중요한 일도 성도들로 하여금 양심에 힘을 얻어 주의 용서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바티우스나 일부 재세레파들처럼 한번 거듭 나면 평생 천사같이 산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평생 계속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마6:12; 18:21-22). 구약 율법의 매일 드리던 제사도 그것을 증명하지 않습니까(민28:3이하)? 다윗을 비롯한 구약의 영웅들은 어땠고(삼하12:13), 베드로 등 신약의 영웅들은 또 어땠습니까(마26:74-75)? 계속 되는 용서가 없었더라면 아마 저들의 이름은 성경에서 일찌감치 지워졌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런 은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풍성해진 것이 아닙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고의적인 죄만은 용서 받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신구약의 그 많은 영웅들이 다 무의식적으로 죄를 졌었단 말입니까? 어거스틴, 터툴리안, 클레맨트 등 고대 저술가들이 죄를 큰 죄와 가벼운 죄로 나누고, 큰 죄는 두 번 다시 회개가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히 더 부끄럽게 알려지고 드러나는 죄들을 엄격하게 처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같은 죄에 빠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성경은 권징할 때 그보다 훨씬 온유한 태도를 보이라고 권고합니다(고후2:7).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건물도 아니고, 어떤 단체도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가정학교’입니다. 학교인데 가정이고, 가정인데 학교입니다. 이 신령한 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시행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표지가 있는 한 아무도 그 학교를 버릴 수 없습니다. 나누어도 안됩니다. 교회는 학교처럼 부지런히 공부하고, 가정처럼 서로 열렬히 용서하고 또 사랑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하나되기 위해서는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이질감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녹여 하나가 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죽여 십자가에 매다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은 교회를 통해 배우고 교회를 통해 참 성도로 성장하는 참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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