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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3장 : 보물 담긴 질그릇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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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에베소서4:11-12절 개역개정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오늘은 제 4부 3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은혜를 부어 주시기 위해 교회 안에 직분자들을 세우시지요. 그들이 바로 목사와 장로 집사 등과 같은 교사와 직분자들입니다. ‘보물담긴 질그릇’이라는 제목을 교회의 교사들과 직분자들이 맡은 역할과 책임,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교회를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공부해 봅니다. 질그릇이 어떤 그릇일까요? 옛날에 사용하던 그릇을 총칭해서 도자기라고 그럽니다. 도자기는 사용되는 흙에 따라 크게 도기와 자기로 구분합니다. 도기를 만들 때 사용되는 흙은 도토라 해서 1200℃ 이하에서 구워지는 흙이고, 자기를 만들 때는 자토라고 해서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집니다. 이런 도기나 자기는 유약을 발라 매끈하며 윤기가 나는 아주 고급 그릇인 반면, 모래가 섞인 질흙으로 빚어서 잿물을 입히지 않고 900℃ 이하의 온도에서 구운 그릇으로 겉면이 테석테석하고 윤기가 없는 그릇을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구워지는 온도도 낮고, 쓰인 흙도 거칠기에 쉽게 깨어지기도 해서 막 쓰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질그릇은 한마디로 별 볼품없고 보잘 것 없는 그릇이라는 말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그릇 중 가장 큰 그릇은 베드로의 환상에 등장하는 그릇일 것입니다(행10:11). 그리고 한 가정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많은 그릇은 어떤 과부가 이웃들에게서 빌렸던 그릇들일 것이고(왕하4:3), 또 가장 절박할 때 가장 귀하게 쓰인 그릇은 열번째 재앙 때 어린 양의 피를 담았던 그릇들일 것입니다(출12:22). 가장 안타까운 그릇은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과 가룟 유다가 함께 손을 집어 넣었던 그릇일 것입니다. 배반의 그릇이지요. 그리고 아마 가장 슬펐던 그릇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신음하실 때 신포도주를 가득 담고 그 곁을 지켜야 했던 그릇일 것입니다(요19:29). 재미있게도 성경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십니다.(딤후2:21-22; 롬9:21절 이하)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교회를 먹이고 키우고 성장시키시는데 꼭 ‘사람 그릇’을 쓰십니다. ‘사람 그릇’은 교회의 행복을 담아내는 그릇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기 위해 교회의 어떤 직분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세우실까요? 교회의 여러 직분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며, 그리스도만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십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만 행사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마26:11).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봉사를 이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포하시고 나타내시려고 사람을 세우시는 것입니다.(행10:3-6; 행9:6). 그렇다고 주께서 자신의 권리나 영광을 사람들에게 넘기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일을 성취하시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무 도움이나 연장이 없이도 친히 일을 할 수 있으시고, 또 천사들을 시키실 수도 있으시지만, 다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수단으로 삼아 일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 그릇’을 쓰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십니다(고후5:20). 우리를 ‘성전’이라고 부르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시는 것이지요(고전3:16-17). 마치 옛날 성소에서 하시듯이 그 그릇들의 입을 통해 사람들에게 대답해 주십니다. 둘째로 또 그것은 우리를 겸손케 하는 가장 탁월한 훈련이 됩니다. 때로는 우리보다도 못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에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는 습관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교만합니까? 자신보다 조금만 못한 사람처럼 보이면 금세 우월감에 빠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요.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겸손케 하시려고 직분자를 세우시고 거기에 복종케 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하늘의 보물을 질그릇들 속에 감추신 것(고후4:7)이고, 질그릇에 담긴 그 보물을 우리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교회를 한 끈으로 단단히 묶기 위함이십니다. 한 사람 목자를 세우셔서 그를 중심으로 온 교회가 말씀과 사랑 가운데 서로 연합하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바로 그것이라고 주님은 예견하신 것입니다(엡4:4-7,8,10-16). 바울은 사람 봉사야말로 교회를 하나로 묶고 바르게 성장하게 하는 힘줄이라고 말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을 선포하는 성직 봉사는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갱신시키고, 무장시키며, 자라게 하고, 또 그리스도의 각양 좋은 은사들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 목회자들을 세우시고 저들에게 그 일들을 위탁하시며,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성직 제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심으로써 자신의 임재를 증명하시고, 또 그것으로 사도적, 목회적 직분이 교회의 생명과 행복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증거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성직이 우리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으며 최고의 직분으로 인정되기를 원하십니다(사52:7; 마5:13-14; 눅10:16; 고후4:6; 3:9). 그렇다면 성직, 곧 말씀을 맡은 직분으로 성경에 나오는 직분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바울은 교회를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자들을 첫째로 사도, 둘째는 선지자, 셋째는 복음 전하는 자, 넷째는 목사, 다섯째는 교사라고 말합니다(엡4:11). 이 중에서 처음 셋은 특별히 그의 나라가 처음 임하셨을 때 세우셨었고, 그 뒤로는 필요에 따라 가끔 부활 시키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둘은 모든 교회에 주신 평상적인 직분입니다. 이제 하나씩 설명합니다. 먼저 사도입니다. 사도는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해서 교회의 터를 닦아 두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합니다(고전3:10; 막16:15; 롬15:19-20). 이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지요. 곧 예수님께 직접 임명장을 받은 사람들을 사도라고 합니다.그 다음 선지자는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곧 어떤 특별한 계시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들이었습니다(엡4:11). 그들은 단지 계시를 선포하는데 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런 자들은 현재 없거나 옛날 같이 흔히 볼 수 없습니다. 다음 복음 전하는 자는 사도 다음에 오는 위치로서 사도의 일을 대신해서 했던 자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누가, 디모데, 디도 등과 70인의 제자들(눅10:1)이 거기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 세가지 직책은 교회에 항존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옛날에 교회가 전혀 없던 곳에 처음 그 터를 닦거나, 교회를 모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 했었던 그 당시에 한해서 있었던 직분들입니다. 물론 나는 주께서 그 후에도 어쩌다 한번씩 사도나 선지자들을, 아니면 적어도 그들을 대신하는 전도자들을 일으키신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시대에도 그런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루터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반역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고 돌이키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런 직책은 ‘임시직’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정상적으로 조직된 교회 안에서는 그런 직책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 마지막이 목사와 교사입니다. 이 둘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교사는 성경 해석을 통해 신자들 사이에 건전하고 순수한 교리를 유지하는 일을 합니다. 목사는 그 일을 포함해 성도를 말씀으로 훈련하고, 성례를 집례하며, 경고와 권면 등의 모든 의무를 겸합니다. 만약 에베소서의 직분 목록(엡4:11)에서 복음 전하는 자와 사도를 한 덩어리로 묶는다면, 두 쌍의 직분이 서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현대의 교사는 옛날의 선지자와 짝을 이루고, 목사는 사도와 짝을 이루게 됩니다. 그 직분이 계승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 역할이 서로 통한다는 것이지요. 그 중 특별히 사도와 목사의 사역을 비교해 봅니다. 한 마디로 사도가 세계를 무대로 한 일을 목사는 자기 교회를 무대로 행합니다. 그 사명 첫째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마28;19; 고전4:1; 딛1:9; 행20;20-21), 둘째는 성례를 집행하는 것이고(눅22:19-20), 셋째는 올바르게 치리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목사는 교회의 파수꾼입니다(겔3:17). 따라서 목사는 자기 교회에만 매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가 필요로 할 때 도울 수는 있고, 항상 그리스도 교회의 평화를 위해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목사는 기본적으로 자기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이라는 법에 매여야 합니다(행14:22-23; 딛1:5; 행20:18-21). 그러므로 목사는 자기 유익을 위해 교회를 옮기거나, 또는 재산이나 개인적인 다른 이유에 묶여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떠나달라는 정당한 요구가 있는데도 떠나지 않고 버티면 안 됩니다. 그리고 혹시 떠나도 될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결정을 몇몇 개인들이 내리지 말고 공적인 인정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감독’,‘장로’,‘목사’, 또는 ‘사역자’라고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지요(딛1:5,7; 딤전3:1; 빌1:1; 행20;17,28). 그런데 지금까지는 다 말씀을 선포하는 직분만 이야기했습니다(엡4:11). 그러나 로마서(롬12:7-8)와 고린도전서(고전12:28)에는 또 다른 여러 직분들이 소개되고, 그 중에서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교회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 중 다스리는 자(고전12;28)는 회중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구제하는 일은 집사들에게 맡겨졌습니다(행6:1,3). 그리고 집사직은 또 두 등급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구제하는 자들과,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자들입니다(롬12:8). 그리고 교회에서 여자들이 맡을 수 있었던 공적 직분은 집사직 중에서도 두 번째에 속한 일 뿐이었습니다(딤전5:9-10). 이제 사역자들의 소명과 위임, 그리고 안수에 대하여 살펴 봅니다. 교회에서는 원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해야’합니다만(고전14:40). 특히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정치를 확립할 때는 더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교회를 가장 해롭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합당치 않은 사람들이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중요한 일에 세움 받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처럼(롬1:1; 고전1:1) 자기의 분명한 소명의식과 충성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명, 그것도 주님과 개인 사이에 있는 비밀한 내적 소명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질서에 관련된 외적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외적 소명은 어떻게 분별하고 파악할 수 있을까요?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싸움을 위해 불러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선 하나님은 우리를 빈손으로 싸움터에 나가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무기를 주신 다음 내 보내시지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여러 직책에 대해 말할 때, 그에 앞서 각 직책 수행에 필요한 은사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고전12:7-11). 그래서 교회는 특히 어떤 사람에게서 목사로서의 경건과 학식과 소양 등 은사들을 발견할 때 그가 성직에 소명을 받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외적인 부름이 그의 내적 부름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어떻게 선택해서, 어떤 식으로 세웁니까? 우선 교회의 사역자는 교회 온 회중이 투표를 통해 선택합니다. 앞서 말한 사도직은 주님이 직접 임명하신 특별직이었습니다만, 그 외의 모든 감독이나 사역자들은 회중의 선거를 통해서만 세움 받습니다. 꼭 사람을 통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행1:23-26).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사도로 세우실 때에도 안디옥 교회에서 저들을 지명하여 금식하고 기도한 후 저들에게 안수하여 임명했습니다. 주님의 일방적 선택은 조금도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도들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했다’(행14:23; 딛1:5)라는 표현은 자기들이 홀로 장로를 임명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헬라의 풍습대로 회중이 투표하는 것을 주관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사역자들의 임명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회중의 공적 결정과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목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목사없이 회중끼리 모여서 자기 목사를 선택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럴 때에는 꼭 다른 목사의 지도 아래 선거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이나 장로, 집사 등의 자격이라 한다면 무엇보다도 순수한 교리와 충성심, 그리고 거룩한 삶이 있어야겠지요(딤전3:2-3, 8-13; 딛1:7-8). 또 저들에게도 주님이 무기(은사)를 주셨는지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눅21:15; 행1:8). 그러면 이제 정당한 절차로 선택한 사역자를 어떤 식으로 임명합니까? 성경은 안수 외에는 다른 의식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안수는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민8:12; 27:23; 레1:4). 교회의 안수식은 그 직분의 위엄을 온 교회에 알리는 것이고, 또 임직받는 자로 하여금 이제 자기 몸이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 붙들어 매였다는 사실을 공포하고 경고를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수는 회중 전체가 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혹은 여럿의 목사들만 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행6:6;13:3). 장로(목사 아닌)들도 안수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네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은’(딤전4:14) 일을 말할 때 그것은 ‘함께 안수한 장로들’이 아니라, ‘장로회에서 있었던 안수’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살려 그 말씀을 다시 표현 해본다면 ‘내가 너를 장로로 임명했을 때, 네가 안수함으로 받은 은혜를 잃지 않도록 하라’가 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사역자를 뽑고 임명할 때마다 최고의 경외감을 갖고 임해야 합니다(행14:23; 사11:2).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 그릇이야 말로 교회를 하나로 묶고 바르게 성장케 하는 힘줄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을 선포하는 거룩한 봉사는 주님이 자신의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갱신시키고, 무장시키며 자라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각양 좋은 은사들로 충만케 하시기 위해, 목회자들을 세우시고 저들에게 그 일들을 위탁하시며,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룩한 교회에서 아무리 구별하여 세웠어도 교회의 일꾼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볼품도 없고 깨지기도 쉽지요. 하나님이 교회의 직분자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릇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안에 담는 보물이 워낙 귀한 것이라서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만함을 억누르고 가르치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의 직분과 직분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또한 내게 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여 교회가 더욱 견고해지며, 바르게 성장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부으시는 은혜와 복을 온 교회가 받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늘의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임을 잊지 말고,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큰 은혜와 복을 담아내는 참 그릇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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