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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5장 : 쿠데타(교황제도의 반역)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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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디모데전서3:1-16절 개역개정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오늘은 제4부 5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교황제도의 심각한 문제점을 들추고 있지요. 칼빈은 교황제도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고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의 직분자들의 선출이나 직무수행을 뒤엎은 교황제도는 권력을 찬탈한 쿠데타같은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을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혁명’과 ‘쿠데타’의 차이를 아십니까? 혁명은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권력을 빼앗아 새로운 생산 관계를 창출하기 위해 정치, 사회, 경제의 질서 및 구조를 변혁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부의 권력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소외 당했던 한쪽 지배계급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다른 쪽 지배 계급의 권력을 무력으로, 비합법적으로 빼앗는 것이지요. 원래 쿠데타란 말은 프랑스 말로 ‘국가에 대한 일격’이란 뜻입니다. 만약 혁명 정부를 다른 지배 계급이 무력으로 전복시킨다면 그것도 쿠데타라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교황제도는 쿠데타 세력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단 한번도 전체 교회에 의해 인정되어 본 적은 없지만, 로마교회 감독이 모든 교회 위에 최고의 통치권을 가져야 한다는 억지지요. 교황제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AD.330년에 로마가 황제의 궁을 이탈리아 로마(서로마)에서 동쪽인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로 옮깁니다. 천도를 한 것이지요. 이때부터 서로마는 세력이 많이 약해져서 고트족, 훈족, 반달족 등의 침략이 많았습니다. 그 때마다 동로마에서 군사를 지원했지만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다 AD.452년경 서로마에 있던 로마교회 감독이었던 감독인 레오I세가 어떻게 외적의 침입을 잘 무마해서 평화로운 상태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레오I세가 갑자기 큰 공로자 되어서 그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그러자, 레오I세는 스스로를 사도적 계승을 받은 자로, 그리고 로마교회를 사도들의 계승을 받은 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교회 감독은 점점 권력을 가지기 시작했고, AD.590년 그레고리 1세 로마교회 감독은 로마교회 감독은 모든 교회감독의 머리, 곧 교황이며 모든 교회 감독들은 교황(Universal Father)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지막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때부터 로마 캐톨릭이 시작됩니다. 이 교황제도는 고대 교회의 순수했던 정치 제도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고대 교회의 정치 형태는 교황의 등장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었습니다. 첫째로 주교(bishop,감독)의 선출과 임명에 대한 제도가 심각하게 변질 되었습니다. 고대 교회가 가장 신중하게, 항상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서 시행했던 것이 바로 감독(주교), 장로(사제), 집사(부제) 등의 선출과 임명입니다. 그런데 교황제도의 등장 때문에 교회가 입은 가장 큰 손실 중 하나가 바로 그 신실한 제도가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두 가지 현상으로 그 비극은 충분히 증거됩니다. 하나는 무자격 감독들이 임명되기 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회중의 투표권이 박탈 당한 것입니다. 주교(감독)들의 형편부터 볼까요? 현재 어떤 자들이 주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성경이나 신학에 대한 요즘 주교들의 지식은 거의 밑바닥 수준입니다. 아니, 그들을 선출하는 자들이나 당사자들이나 거룩한 학문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자들이 감독이 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또 저들의 도덕적 수준은 어떻습니까? 아마 고대 교회의 기준으로 본다면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요즘 교회의 감독이라는 자들 중에서 술고래, 노름꾼, 음행자, 방탕한 자 등을 찾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열 살도 안된 어린이를 교황의 허락으로 주교로 세운 예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주교로 소명 받았다는 자들의 수준입니다. 그렇게 자격없는 자들이 주교로 선출 되려면 가장 방해되는 것이 바로 회중의 투표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교황주의자들은 회중이 투표하고 찬성하고 서명하는 등의 주교 선출 절차들을 모두 참사회 의원(the canons)들에게 넘겼습니다. 참사회가 주교를 선출해서 회중에게 인사 시킨 다음 임명했습니다. 북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한 것이지요. 회중들은 그가 감독으로 합당한 자인지 살펴볼 기회 조차 없었습니다. 그저 참사회의 결정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고 박수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레오조차도 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키프리아누스도 그것들이 비성경적 만행이라고 비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종교회의의 결정들이 그것들을 무효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한 때 라오디게아 회의 (AD.363)에서 감독(주교) 선출에 대한 회중과 관리들의 투표권을 빼앗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너무나 악화 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처방한 치료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질병 자체 보다도 그 치료약이 훨씬 더 해를 주고 있는데도 왜 고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어떤 자들은 교회법에 무슨 선거 절차에 대한 자세한 규정이 나온 적이 있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감독을 선출하기 위해 성경 외에 따로 교회법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말씀대로 하면 되었으니까요. 라오디게아 회의가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평신도들의 투표권을 빼앗었었다면, 지금은 그 보다 훨씬 더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이 악한 무리들에게서는 왜 투표권을 빼앗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더욱 한심한 일은 참사회가 회중에게서 도적질한 주교 선출권을 다시 지방 집권자들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군주들 생각에는 그 권리를 자기들보다 조금도 나을 바가 없는 사제들이 누릴 바에야 차라리 자기들이 갖는 편이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사제(priest, 장로presbyter), 부제(deacon,집사)의 임명도 심각하게 부패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사도들의 후계자라고 자랑하는 주교들은 사제들에 대한 임명권이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제들을 회중을 인도하고 양육하는 목자가 아니라 제사(미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장로의 본래 직분을 부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더럽혔습니다. 후에 다시 다루겠습니다만,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하는 성찬 미사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가증스런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부제들도 역시 진정한 직책과는 상관 없는 일, 즉 성찬예식에서 잔(성작聖爵,chalice)과 빵(성반聖盤,paten)을 나누는 것만 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칼케돈 회의(AD.451)에서 결정한 것처럼 일 할 곳도 없는 임명, 즉 목회와 아무 상관없는 직분자를 세우면 안 되는 일입니다. 원래 사제(장로)는 교회를 다스리고 집사(부제)는 가난한 이웃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금이나 구제 물자를 모으기 위해 임명되었던 자들이 아닙니까? 또 저들의 서품식을 보십시오. 과거의 전통을 따라 흉내내는 저들의 서투르고 얼빠진 흉내와 우스운 몸짓들을 나는 ‘유령(a shadow)’이라고 부릅니다. 서품식이 있기 전에 치르는 시험에서는 후보자에게 무엇을 물어봅니까? 성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미사를 집례할 수 있는가, 라틴어의 동사와 명사의 변화를 아는가, 어떤 낱말의 뜻을 아는가 등의 질문 뿐입니다. 또 서품식에서 자행되는 조작된 연극을 보십시오. 서품을 받을 자가 강단에 오르기 전에 주교가 묻습니다. ‘이 사람이 자격이 있다고 봅니까?’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로 그렇게 세 번 묻습니다. 그러면 부주교가 각본에 따라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간의 연약함이 허락된다면, 나는 감히 저들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전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서품식을 진행하기 위한 연극을 하는 것이지요. 저들은 모두 이 악한 습관이 워낙 오래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직록(사례비) 또한 해괴망측한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전에는 성직록 수여가 임명식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교들은 성직록을 수여한다는 명예만 가지고 있을 뿐 지금은 아주 다양한 자들이 성직록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성직록은 군주의 하사금 정도에 지나지 않으며, 직접이든 간접이든 다 성직 매매의 혐의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제직이 교회의 유익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얻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각 지방의 법정을 보십시오. 가장 많이 올라와 있는 소송이 바로 사제직에 관한 것입니다! 결국 사제직은 사냥개들 앞에 던져진 사냥감이 되어 버렸습니다. 군주들의 궁정에는 동시에 수도원장직이 셋, 주교직이 둘, 대주교직이 하나인 소년들도 볼 수 있습니다. 한 약탈자가 동시에 여러 교회를 점령하는 것이나, 아무리 원해도 평생 자기의 양 떼들의 얼굴 한번 못 보는 자를 교회의 목자로 임명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그것은 정말 해괴망측한 습관입니다. 셋째, 그렇게 임명된 자들의 직무수행에서는 충성심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바른 목자를 판단하는 두 가지 표지는 그의 임명(소명)과 충성심입니다. 이제 목자로 임명된 자들의 충성심부터 살펴 봅니다. 우선 수도사와 세속신부에 대해서입니다. 이들은 로마 교회가 임명하는 사제(priest)들 중 하나입니다. 고대 교회에는 수도사가 없었습니다. 교회 목자와 수도사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심히 부패한 시대였던 그레고리우스까지도 이런 혼동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노센트와 보니파키우스의 칙령은 그 겸직을 허락합니다. 그러나 무지한 바보가 교황청을 차지할 때마다 그들의 말 한 마디로 모든 고대의 전통들이 전복되고 말살되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제롬도 동의했듯이 사제(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는 목자입니다. 전도만 하고 다니는 탁발수도사나 자기 방에서 성가나 미사곡을 중얼 거리는 수도사들이 어떻게 교회의 목자가 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외치는 말씀이 들리지 않는단 말입니까?(행20:17-38) 수도사들은 수도원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속 수도사들 중에는 성직록, 즉 사제로서의 생활비를 받는 자도 있지만 미사 집례나 성가를 부름으로써 매일매일 삯을 받으며 살아 가는 자도 있습니다. 성직록은 뒷배경이 있어야 자기 몫이 돌아왔고, 하루 품삯으로 살아가는 사제들은 굶주린 개처럼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며 신자들을 괴롭게 합니다. 저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제물로 귀신에게 제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고전10:20 참조). 참사회 의원, 부주교, 부속 예배당 사제 등 하는 일없이 성직록을 받아 먹고 사는 모든 자들은 다 한 통속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의식이 있고 노래가 있다 하더라도 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고대 교회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장로’로 인정될 수 없습니다. 감독과 목사들, 그리고 집사들에 해당하는 자들의 형편은 좀 나았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주교들과 교구 사제(parish rectors)들은 위임 받은 자기 교회를 돌팔이들에게 맡기고 자기들은 전혀 엉뚱한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미 그레고리우스도 탄식한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사제들은 가득하지만 추수하는 일꾼은 없다. 사제직을 맡기만 하고 감당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주교라 하면서도 설교하는 것을 마치 자기 체면에 손상이 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베르나르드 시대에는 이 사태가 더욱 악화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지금 보다는 더 순수했던 것 같습니다. 저들의 도적적 수준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무절제와 나약과 주색 등 정욕의 술을 마시는 데 있어서 저들보다 더 주량이 센 계급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제(집사)들은 어떻습니까? 저들의 본래 임무는 교회 재산을 관리하며 구제하고, 불쌍한 자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단에서 예식을 돕거나 복음서를 읽거나 노래하거나 그 밖의 사소한 일들을 할뿐 입니다. 이제는 부제직이 직분이라기 보다는 사제가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었습니다. 빈민들의 심부름꾼이어야 할 저들이 빈민들에게 돌아갈 거룩한 재물을 강탈해서 자기들 배만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힘닿는 대로 마구 집어 갔습니다. 부제직이 도둑질과 강도짓을 할 수 있는 면허증입니까? 그리고 이들이 회중의 눈을 가리기 위해 쓴 기만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겉을 어마어마하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 채 성경을 예로 들어 가면서 자신들의 집과 예복, 그리고 성전을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시72:10-11; 사60:6-7). 교회의 건물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주교와 사제들의 의복을 천사들의 그것보다 더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가 주재한 아퀼레이아 종교교회의 발표처럼 주의 사제들에게는 ‘가난이 곧 영광’입니다(딛1:7). 제롬이 주장한 것처럼 ‘주교의 영광은 빈민을 돌보는 것이며, 모든 사제의 수치는 재산을 모으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오늘의 모든 주교와 사제들은 ‘자기 교회에서 가까운 작은 집에서 살며, 값싼 음식을 먹고, 값싼 가구를 사용하라’는 고대 종교회의들에서 거듭되었던 발표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황 제도 아래 있는 직분들은 그 임명이나 그 실제적인 직무 수행에 있어서 모두 말씀과 고대 교회의 울타리를 떠났습니다. 아니 교황제도에 의해 전복된 것이지요. 교황 제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자신들의 배만 채우는 권력으로 찬탈한 하나의 쿠테타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 사람의 교황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각 교회마다 교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거룩한 교회를 섬기도록 세워놓은 직분이 도리어 인간의 명예를 드높이는 자리가 되었고, 성도를 돌보고 섬기라고 세워진 직분자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교회는 지금 중세 로마 교황의 시대보다 더 타락했음을 인정하고 돌이켜 철저히 회개해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의 칼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바르게 설 수 있도록, 한국 교회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충만해 지도록 더욱 깨어 기도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위에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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