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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9장 : 머리 깎인 삼손(말씀에서 떠난 로마 교회 회의들)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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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5:1-20절 개역개정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오늘은 제 4부 9장입니다. 로마 교회는 교황제도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수시로 교회의 회의를 열었고, 그 회의를 통해 말씀과 상관없는 교리와 전통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교회 회의는 무가치하다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머리 깎인 삼손’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삼손’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릅니까? ‘힘’이지요. 아마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힘이 센 사람이었을 것입니다(삿13-16). 힘도 힘이지만 그는 아주 해학적이었지요. 원수 블레셋을 조롱하며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조국 이스라엘을 지켰던 ‘풍운아’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 모든 힘과 웃음은 ‘비밀’ 하나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사라집니다. 대신 지독한 조롱과 뼈아픈 고통이 찾아 오지요. ‘난 머리를 깎이면 모든 힘이 사라진다!’ 원수들의 여자에게 그 비밀을 털어 놓은 순간 그는 끝장났습니다. 나실인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떠난 것이지요. 그 즉시로 ‘머리 깎인 삼손’은 ‘말뿐인 삼손’이 됩니다. 결국 원수들에게 잡혀 심한 재롱을 떨어야 하는 신세가 되지요. 모든 교회의 회의들은 존중할만한 것입니다. 그만한 권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회의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을 잃는 순간 교회로서의 힘을 잃고 오히려 세상에서 조롱과 핍박을 당하고, 하나님께 모욕과 수치가 되고 원수로 행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회의가 ‘삼손의 비밀’을 잃으면 권위도 사라집니다. 모든 교회의 회의는 빼앗기지 말아야 할 ‘삼손의 비밀’이 있습니다. 고대 교회의 회의들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로마 교회도 고대의 종교 회의들을 엄청나게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말마다 회의들에 대한 이야기 뿐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뻔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권위를 한껏 강조한 다음 그 권위를 고스란히 자신들의 회의에게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회의로 옮겨간 그 권위를 또 그대로 로마 교황과 그 측근들에게로 돌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정말 로마 교황의 권위가 견고하게 세워질까요? 정말 로마 교회의 회의들은 성도들의 생활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권세와 힘을 갖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본 장에서 ‘이미 비밀을 잃은 회의들’의 그 참혹한 정체를 밝히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의 회의들은 ‘머리 깎인 삼손’에 불과 합니다. 그러면 교회 회의들이 꼭 지켜야 할 ‘삼손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두 세 사람이 모여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곳에 주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마18:20). 어떤 교회의 모임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면 그 모임은 권위가 있고 힘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감독들이 모인 회의가 아니라도 상관 없습니다. 또 숫자가 많이 모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직분이나,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엄청난 숫자가 교회의 회의를 진짜로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느냐 아니냐가 그 회의가 진짜냐 가짜냐를 결정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회의라야 그리스도의 영이 지배하는 회의가 되고, 영적 권위가 있는 교회의 합법적인 회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의가 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의 인도’란 말을 명찰처럼 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쉽게 판가름 납니다. 어떤 회의가 주의 말씀을 버렸다면, 그리스도의 이름도, 그의 영도 거기서 떠났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권위와 말씀에 대항하는 반역 회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서 떠난 회의들은 ‘머리 깍인 삼손’일 뿐입니다. 가끔 보면 목자 없이도 교회 안에 진리가 보존될 수 있을까 묻습니다. 물론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자에 대항하면서도 진리가 교회 안에서 자기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예들로 가득합니다. 이사야 시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때의 목자들을 ‘소경이며, 무지하며, 짖지 못하는 개고, 잠 자기를 좋아하며--- 몰각한 자들이라(사56:10-11)’고 책망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아직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었습니다. 호세아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호9:8). 예레미야도 같은 말을 하지요.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6:13; 14:14; 23장, 24장) 아마 예언서에서 이 보다 더 많이 나오는 책망이 없을 정도입니다(겔22:25-26; 사9:14 등). 어떤 이들은 옛날 유대인들에게서나 있었던 그런 일들이 우리 시대에는 일어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에서 제일 위험한 인물이 바로 목자들입니다. 성령께서 자주 경고하신 말씀 아닙니까(마24:11,24; 행20:29-30; 딤전4:1; 딤후3:1이하; 4:3).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 심지어 바울은 성전에 적그리스도가 앉으리라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살후2:4). 곧 교회가 당하는 가장 무서운 재난은 교회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목자들에게서 온다는 말씀이지요.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행20:29-30).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교회를 망가뜨리려는 흉악한 늑대가 교회 안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보다 훨씬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교회 안에는 얼마나 많은 가짜 목자들이 들어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들을 존경하되,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의심의 눈으로 살필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삼손의 비밀’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곧 그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전통이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하는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아주 나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떠난 잡것들로 교회를 더럽히고 있다면 분명히 그는 가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의 때에는 악한 목자들이 교회를 차지하고 영광을 누리게 만듭니다. 그들이 주제가처럼 부르는 노래가 있지요. “18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렘18:18). 저주의 때, 고통스러운 때에는 교회든, 교회의 회의든 악한 목자들이 판을 치며 의기양양해 할 것입니다. 말씀에서 떠난 목자들이 판을 치면 아무리 권위 있어 보이는 교회의 회의도 스스로는 아무 영적 권위가 없습니다. 한번 아합이 소집했던 회의를 생각해 보십시오.(왕상22:6,22) 예언자 400명이 한 자리에 모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의를 누가 주관했습니까? 거짓의 영, 악한 영이었습니다. 거기 참석한 모든 자들의 투표로 진리는 정죄 되었습니다. 참 선지자 미가야는 이단자로 몰려 매맞고 옥에 갇힙니다. 예레미야도(렘20:2; 32;2), 다른 예언자들도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마21:35).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진리이신 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죽인 예루살렘 회의입니다(요11:47). 당시에도 물론 예루살렘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회의에는 하나님의 말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악행이 우리 시대에도 계속될 것을 미리 경고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에베소 종교회의(AD.449년,일명 강도회의)을 보십시오. 거기서 이단자 유티케스는 승리하고, 참 목자 플라비안은 정죄되고 구타 당하고, 결국 그 상처로 얼마 뒤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한 감독들의 이름 때문에, 또 모인 엄청난 숫자 때문에 어떤 회의에 참된 영적 권위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것을 인정해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모양이 그래도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회의는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회의는 인간의 전통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히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교회의 회의는 타락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회의의 결정이 있을 때 우리는 두 가지 잣대로 재 보아야 합니다. 하나는 그 회의가 언제, 무슨 문제로, 무슨 목적으로, 또 어떤 사람들이 참석했는지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은 성경의 잣대로 그 문제들과 결정들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어거스틴도 막시미누스와 논쟁할 때 유일한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나는 그대에게 니케아 회의를 내세우고, 그대는 나에게 아리미눔 회의를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꼬이게 만들지 말자. 그대와 나 쌍방이 공통으로 갖는 권위, 즉 성경의 권위로 해결하자.’ 성경의 잣대로 재 볼 때 고대의 회의들, 즉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제1차 에베소 회외와 칼케돈 회의 등 네 회의는 아주 거룩한 것들이었다고 인정됩니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악화 되었고, 우리에게 가까운 최근 회의들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습니다. 너무 많은 회의들이 성경에 근거한 교리들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직 교황의 영광을 위해 인간의 전통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에서 떠나면 가만 놓아두어도 회의들끼리도 싸웁니다. 예컨대 콘스탄티노플 회의(AD.754년)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형상들을 전부 끌어내어 부수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레네 여왕이 이 회의에 대한 적개심으로 소집한 니케아 회의(AD.787년)에서는 그 형상들을 다 원위치 시키도록 결정했습니다. 교회 안에 형상들을 둘 뿐 아니라, 그것들을 예배하는 것까지 인정했습니다. 어거스틴과 그의 선배 에피파니우스가 염려했던 불행한 일이 공식화된 것이지요. 이런 교령이 사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또 훌륭한 회의로 인정 받는 니케아 회의 같은 경우에도 서로 감정 싸움에 말려 들어 아리우스를 공격할 붓으로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상대방을 비방하는 문서들을 잔뜩 만들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황제는 자기가 판단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문서들을 인봉해 두었다가 나중에 불태워 버리지요. 그래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회의에서도 좋은 결말을 본 적이 없다’고 까지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아무리 경건한 자가 주재하는 회의에서라도 인간적인 실수들이 있도록 허락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너무 신임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회의들을 유일한 표준인 성경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도무지 그 많은 모순과 거짓들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 먼 인도자에게 맹종하지 말고 모든 회의를 성경의 빛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황주의자들은 비록 지도자들이 둔하고 악할지라도 그 ‘인도자에게 순종하라’는 주의 말씀(히13:17)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은 소경이 우리를 인도하지 못하도록 하며(마15:1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마7:15), 악한 예언자들을 믿지 말라(렘23:16)고 경고합니다.(참조 요일4:1) 그러므로 우리는 거창한 칭호에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처럼 저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이 있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수1:7,8). 지금까지는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문제로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제 잠깐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로마 교회는 그 권한도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교리를 분별하는 권세와 사명은 교회에 있습니다(고전14:29). 그러나 이미 많이 이야기 한 것처럼 교회의 어떤 해석도 그것만으로 확고한 진리가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성경으로만 검증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해석들을 보십시오. 연옥과, 성자들의 중보기도와, 고백성사 등 성경에서는 단 한마디도 찾아 볼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는 그것이 곧 ‘성경 해석’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자기들의 의견과 오랜 관습으로 허락되었으니 성경 해석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떤 회의가 그렇게 결정하면 성경이 분명히 반대해도 ‘성경 해석’이 되어 버립니다. 성만찬에서 평신도에게는 잔을 돌리지 않기로 결정한 콘스탄스 회의나(AD.1415년. 참고 마26:27-28),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한 엘비라 회의(AD.305년) 같은 경우이지요(딤전4:1-3; 히13:4). 이렇게 엉터리 결정을 해 놓고도 반대하면 불법이라 하고, 이단자로 몰고, 그리고 절대 상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로마 교회 교황주의자들이 빠진 함정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고 영적 권세를 잃어버렸습니까? 이것이 저들의 눈에는 안 보인단 말입니까? 또 저들은 해석의 근거들로 ‘정경’(Canon)이라는 고대의 목록을 제시하면서, 그 ‘정경’이 교회의 판단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어느 회의에서 그렇게 했단 말입니까? 제롬의 말입니다. ‘마카비서나 토비트, 그리고 집회서 등 그와 비슷한 책들은 모두 다시 외경(Apocrypha)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마 교회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머리 깎인 삼손’은 ‘말만 삼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거대하고 화려한 교회 회의라 하더라도 ‘말씀’에서 떠난 회의는 ‘말만 회의’입니다. 오히려 수많은 악을 잉태하고 죄를 해산합니다. 심지어 적그리스도로 행하며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적하고 교회를 더럽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말씀으로만 목자들을 분별하며, 모든 회의의 결정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교회의 회의들은 전통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견고히 세우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마 교회는 각종 교회의 회의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견고히 세우는데 목적을 두지 않고 전통을 세우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 온갖 타락하나 교리들이 강단을 더럽혔고, 성도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을 최종적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 전통, 목회자의 권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지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에서도 성경을 꾸준히 읽고 묵상함으로써 진리의 근거를 스스로 검토하고, 성경이 삶의 모든 결정과 행동의 지침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특정 단체에서 권장하는 행동이나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스스로 검토해보고, 의심스러울 때는 목회자나 신앙의 동료들과 함께 성경적으로 토론하고 분별하는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의 특정 정책이나 전통이 성경적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된다면, 성경을 기준으로 그 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대화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예배, 의식, 프로그램 등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지 검토하고, 성경 중심의 예배와 활동이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예배 방식이나 교회의 관습들이 성경적 원리에서 벗어나거나 형식화될 위험이 있을 때는,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성경을 기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배나 모든 교회의 활동에서 형식적인 관습이나 의식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그 의미와 목적을 성경적으로 되새기고 성경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교회의 전통이나 회의에 맹목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그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개인적 헌신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 다른 성도들과 성경의 진리를 나누고 토론함으로써, 공동체가 함께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기준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교정할 때, 교회의 전통이나 개인적 해석에서 오는 오해를 막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성경을 삶과 신앙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고,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이 성경에 부합하는지 분별하며, 성경적 진리를 중심으로 공동체와 개인의 신앙을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참된 신앙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말씀에서 벗어나면 탈선한 열차와도 같습니다. 교회의 회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는 것이 되지 아니하면 부패와 타락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 목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욕망과 욕심을 채우려고 몸부림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이 아니라 말씀을 세워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말씀으로 충만하고, 말씀에 사로잡혀서 인간의 전통이 아닌 말씀을 세우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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