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 과정

  • 홈 >
  • 배움터 >
  • 기독교강요 과정

이곳은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메타포로 배우는 곳입니다.

아래 링크를 누르셔서 네이버 카페 / 소풍교회 배움터 / 로 가시면 기독교강요 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곳을 눌러 보세요.

소풍교회 배움터 바로가기

기독교강요 과정
기독교 강요 4부 10장 : 거미줄 왕국(말씀에서 떠난 로마교회 입법권) 임병욱 목사 2024-11-07
  • 추천 0
  • 댓글 0
  • 조회 6

http://sopung.or.kr/bbs/bbsView/166/6459888

[성경본문] 마가복음7:1-9절 개역개정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5.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6. 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9월 30일 월요일

 

오늘은 제 410장입니다. 로마교회는 교회의 입법권을 남용하여 말씀에서 떠난 수많은 교회법들을 제정하여 사람들의 양심을 구속했습니다. 사제의 독신제, 수도원의 맹세, 빵만 기념하는 성찬식, 7성사, 미사, 고해성사 등 수많은 규율들로 사람의 양심에 짐을 지우고, 교회법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거미줄을 쳐 놓고 사람들의 영혼들을 사냥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교회의 법들은 사악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거미줄 왕국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거미는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거미줄을 만듭니다. 거미줄은 배 아래에 있는 세쌍의 방적돌기에서 만들어지는데, 방적돌기에는 수많은 방적관들이 방적샘에 연결되어 있고, ‘방적샘에서 액체의 분비물들이 방적관을 통해 방적돌기밖으로 분비되어 나와 공기와 만나면 끈적끈적한 겔 상태의 거미줄이 되는 것이지요. 곤충이나 벌레 등이 끈적끈적한 겔 상태의 거미실에 걸리면 몸에 들러붙게 됩니다. 그 때 벌레들은 발버둥을 치는데, 그 진동으로 거미는 먹이가 걸렸음을 알아차리고 즉시 출동해서 거미줄로 먹이를 칭칭 묶어 버리지요. 그리고 먹이의 몸에 관 모양의 엄니를 꽂고 독액을 주입한 후, 그 독액을 통해 먹이를 죽이기도 하고 소화시켜 먹기도 한답니다.

로마교회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명분으로 거미줄처럼 수많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을 교회법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이 그 거미줄에 걸려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교회의 입법권을 함부로 행사한 것이지요. 교황주의자들은 이 권한으로 사람의 영혼에 대한 가장 야만적인 폭정과 도살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사람이 만든 법은 사람의 양심에 대해 아무런 구속의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무엇입니까? 양심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로서 하나님의 법을 아는 마음의 의식입니다. 어근을 보면 양심(conscience)’이란 말은 안다(scire)’에서 나왔는데, 안다에서 지식(scientia)’이란 말이 나왔지요. 그러니까 양심은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에 관한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알게 하는 증인으로서의 지식입니다. , 내 머리로 이해한 지식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법에 따른 선과 악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는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려 주는 경보기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처럼포기하지 않고 우리 죄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고 나가며(2:15-16), 줄기차게 우리에게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가르쳐 줍니다. 이때 사람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법으로만 판단 받으며,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만 의무의 짐을 집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떠난 사람의 법은 어떤 것이든 사람의 양심에 대해 아무 권한이 없다는 말이지요. 이미 한번 한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은 외면적인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갖고 있습니다. , 사람이 만든 법들은 양심의 법정에서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오직 하나님만 상대합니다.

그런데 가끔 자기 양심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의 기록에도 보면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선한 양심으로 행하고자 노력한다’(24:16)고 말했습니다. 이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지킨 선한 양심으로 인한 유익이 사람들에게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행위가 사람과 관계된 것처럼 양심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이란 곧 속마음이 바르게 서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만약 율법이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 관계 없이 오직 우리에게만 의무를 지울 때, 이 때 우리는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맨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음란한 생각이나 말은 그것이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든 안 주든 일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구 상에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법은 우리의 양심을 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해무익한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무해무익한 일이 문제를 일으킬 상황이라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런 때에라도 우리의 양심은 자유롭습니다. 바울도 우리가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양심 때문이 아니라 남의 양심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0:28-29). 그러므로 무해무익한 일들에 대한 법은 우리의 외면적인 행위만을 묶을 뿐, 양심의 자유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양심을 위해서도 세상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13:5)고 한 말 때문에, 사람들은 곧잘 세상 법이 양심을 지배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오해합니다. 이럴 때는 유(,genus)와 종(,species)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위정자들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명령으로서 지켜야할 구속력을 갖습니다. 하지만 그 개개의 법령들이 우리의 양심과 영혼에 어떤 구속력을 갖지는 않습니다. 물론 위정자들이나 교회가 만든 인간의 법들이 그 자체로 우리의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선하고 공정할 때는 그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그 법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위정자를 세우신 하나님의 일반적인 목적 때문이지, 그들이 만든 개별적인 법령들의 내용들이 우리의 양심을 구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든 교회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어떤 법들을 만들어서 우리의 양심을 간섭하고 속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우리의 양심의 주인과 인도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홀로 입법자와 재판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동등하게 다만 주의 법의 준행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4:11-12; 33:22; 벧전5: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수많은 교회법이란 거미줄을 쳐 놓고 사람들의 영혼을 사냥했습니다. 교회법은 대체로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신앙생활의 규율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나 의식에 관한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런 것들에 관련된 산더미 같은 규범들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지켜야 경건해지며, 구원에 이르며,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정말 이처럼 해롭고 구역질 나는 일이 또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유대교가 조상들의 유전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멸시했던 것처럼(15:3), 로마교회는 쓰레기 같은 전통과 규칙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들로 하나님의 계명을 덮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우선 그들은 고백성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일년 내내 악한 생활하는 것보다 연말에 고해성사 하지 않은 죄가 훨씬 더 큰 죄라고 가르칩니다. 또 온 몸을 매일 음행으로 더럽힌 것보다 금식일에 고기 맛을 조금 본 것이 더 악하다고 말합니다. 또 독신 사제의 법을 만들어 놓고 속으로 일천번 간음죄를 짓는 것보다 한 사람을 상대로 합법적인 결혼을 하는 것이 더 나쁜 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더 들어 보십시오. 그들은교회에 합류했다 해도 끝까지 사랑 안에 머물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다양한 성사와 많은 부가적인 행위들과 더불어 세례와 같은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피를 흘리신 것입니까? ,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교회는 세례받은 자들의 죄들을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있고... 교회는 주교와 사제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들을 용서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한단 말입니까? 그 뿐 아니라성체는 우리를 과거의 죄들로부터 깨끗케 해주고 미래의 죄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연합시켜 준다.... 우리 안에 불타는 그와 같은 사랑에 의해서 성체는 미래의 치명적인 죄들에서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미사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은 매주 미사를 드립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매번 죽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주 엄청난 신학적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미사가 구속을 이루는 제사라고 한다면 매번 미사를 집전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이 현재 다시 재현되고, 우리의 구속의 사역이 행해지는 셈입니다. 이는 단번에 영원히 속죄의 제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로채려는 죄악일 뿐입니다. 교회는 성체를 통해 죽은 자와의 효과적인 교제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죽은자들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뿐 아니라 헌금까지 강요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짓이지요.

이처럼 로마교회는 사람의 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멸시하고 부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너그러우면서도, 자기들이 만든 법을 어긴 자들에게는 아주 작은 것에라도 투옥과 추방과 불과 칼로 처벌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법이 사람들에게 가볍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만약 그 법들을 제거하면 교회는 금방 쓰러지고 말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어떤 정신 나간 자(Clichtove)는 루터를 비난하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어떤 일들은 성경에 들어 있지 않지만 교회가 확고하게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입법권이 있으며 그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을 죄가 된다. 교회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규정들로 교인들을 속박할 수 있다. 이런 일들로는 단식과 음식, 사제의 독신제, 수도원의 맹세, 한 가지로만 집행되는 성만찬 등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믿거나 지키고 있는 것들, 즉 교직자의 재산, 7성사, 하급 성직자 계급, 미사, 고백성사, 연옥, 성자숭배, 성자유물, 형상 등은 옛 교령이나 교회법들을 볼 때, 다 정당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로마교회의 태도를 마치 거울처럼 잘 보여주는 주장입니다. 이처럼 저들의 주장이 노골적으로 성경을 무시하고 염치없고 엉터리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저들의 강요들 대부분이 금욕과 엄격한 절제의 모양을 가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 눈에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원래 그 법칙이나 의식들처럼 자기를 절제하고 고행하게 하는 화려한 것들에 쉽게 끌리고 큰 감동을 받습니다. 사실은 적을수록 좋고 단순할수록 유익한 것인데 말입니다.

로마교회는 자기들의 전통이 모두 사도들에게서 왔다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입니다. 사도들의 모든 교훈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규정으로 성도들의 양심에 짐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며, 또한 우리 인간이 만든 형식과 방법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의도와 로마교회 교도들의 주장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이 지금 지키고 있는 이 산더미 같이 많은 교령들이나 교회법, 그리고 의식들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점진적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자유롭게 선택하거나, 무익하다고 여겨질 때에는 버릴 수 있는 행위들을 정하는 것과, 어떤 구속력 있는 법을 만들어서 그 양심을 올가미로 완전히 잡아 매는 것과는 전혀 성질이 다릅니다. 신자들의 양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 아닙니까? 그 양심이 온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양심은 복음의 지배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또 어디에도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예배와 예식에 관한 로마교회의 교회법도 양심을 더럽힙니다. 바울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들에 대해서 비난하면서 그런 것들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아무 유익이 없다고 단정 짓습니다(2:2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은 엄청나게 많고 화려한 예배 예식과 다른 의식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배의 예식이나 기타 의식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보다 분명히 나타내고, 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보다 잘 인도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식 등이 그리스도와 사람이 만나는 탁월한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그 수효가 적어야 하고, 지키기가 쉬어야 하고, 또 그 표현이 선명하고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예식은 경건의 연습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어거스틴의 말처럼,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성례로 주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수많은 의식과 화려한 예식은 예수님이 폐지하신 유대교의 의식들을 다시 주워 온 것입니다(4:23).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의식들을 법으로 만들어서 지키게 하는 것은 신자들의 양심을 묶으려는 것은 사악한 짓입니다. 주님은 구원과 예배에 관하여 자신만이 유일한 입법자가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물론, 예배를 드리려는 자들을 지극히 미워하십니다(왕하16:10; 29:13-14; 15:9).

그렇다면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 외에는 아무 규정이나 예식들을 만들면 안 될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간 사회는 공공의 평화를 촉진하고, 서로 화합한 가운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조직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적절한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공공의 예절을 위해서도 그렇고 인간성 자체를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안전하고 건강하려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는 바울의 말에 주의를 집중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관습이 다르고 판단과 생각이 서로 부딪치므로 분명한 규정이 없으면 견고한 조직을 세우지 못하고, 일정한 형식이 없으면 절차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에, 그 규정들이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든지, 그 규정들이 하나님께 보다 경건하게 예배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서는 안되지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예절의 목적은 그런 보조 수단들을 통해 우리의 경건한 마음이 고무되도록 하는 것이고, 근엄하고 겸허한 태도를 빛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당한 예절을 통해 거룩한 신비에 대해 합당한 경외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술잔치와 성만찬을 혼동하지 말라든지(고전11:21-22), 여자들은 공중 앞에 나갈 때 반드시 머리를 가리라든지(고전11:5), 기도할 때는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으라든지, 장례식은 합당한 예를 갖추라든지 등등입니다. 그리고 질서의 목적은 책임자들로 하여금 잘 다스리는 법을 알게 하고, 또 다스림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는 질서 정연하게 세워지고 화평을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당한 교회법들은 신자들을 미신과 두려움에서 해방 시키고, 사랑 안에서 서로 교제하게 해줍니다. 예를 들면, 공중 기도와 설교와 성례를 위해서 일정한 시간을 정한다든지, 설교 시간에는 조용해야 하며 일정한 자리에 앉아야 한다든지, 날을 정하여 성례식을 거행한다든지, 여자는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든지(고전14:34) 등등입니다. 특히 교리문답이나 견책과 출교와 금식 등 교회의 권징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은 질서의 목적에 관계됩니다.

그런데 그런 예절과 질서들 중에서도 꼭 구분해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 할 때 무릎을 꿇는 경우를 예로 들어 봅니다. 이런 예절은 사람이 만든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봅니다. 사도가 주의해서 지키라고 한 예절의 일부로 볼 수는 있지만(고전14:40), 명백하게 명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도 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꾸거나 폐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분명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구원과 예배의 본질에 관해서는 더하거나 뺄 수 없도록 충분히, 그리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규율과 의식들에 관해서는 자세히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시대의 형편에 따라 변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형식과 절차가 한 시대에 맞는다고 모든 시대에 통할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법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닌 것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민족과 시대의 풍습에 따라 여러 가지로 순응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필요가 있을 때마다 교회는 항상 교회에 유리한 쪽으로 전통적인 관습들을 폐지하기도 하고 변경하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제정하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경솔해서는 안되고 사랑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지요. 예배 시간이나 장소, 예배당 건물, 그리고 예배 시간에 어느 시편을 부를 것인가 하는 것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편리와 화평과 질서를 위해서 정해 놓는 것이 좋지요. 그런 사항들을 개인의 결정에 모두 맡긴다면 아마 대단히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런 것들을 교회의 덕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일부 규정을 변경하거나 아주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거미줄 같은 규정과 예식에 걸려 오히려 사악한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져 있는 지금의 로마교회를 보십시오. 옛날에 그 예식들을 정할 때에는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었고, 그 자체로는 크게 불경건 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런 여러 가지 의식들을 아주 없애버리지 않고서는 교회에 들어 와 있는 무서운 미신들을 도저히 제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법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사악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구원과 예배의 본질에 관한 것을 뺀 모든 외형적인 규정들을 시대와 상황에 맞춰 잘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법으로 만들어 거미줄처럼 쳐 놓고 양심을 사냥하는 로마교회의 태도는 진정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눈을 떼는 순간 탐욕과 욕망을 채우려는 악한 자들은 성경을 이용해서 우리의 양심을 구속하고, 저들의 욕심을 채웁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성경을 펼치며,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인간이 만들어 놓은 법에 구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에 구속되어 말씀을 따라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기독교 강요 4부 11장 : 로마의 자물쇠 장수(교회의 재판권) 임병욱 목사 2024.11.07 0 11
다음글 기독교 강요 4부 9장 : 머리 깎인 삼손(말씀에서 떠난 로마 교회 회의들) 임병욱 목사 2024.11.07 0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