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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1장 : 로마의 자물쇠 장수(교회의 재판권)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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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8:15-18절 개역개정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오늘은 제 4부 11장입니다. 교회의 재판권에 관한 말씀이지요. 교황주의자들은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 주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악용하여 자신들이 마치 만능열쇠를 가진 것처럼 수많은 자물쇠를 만들어 성도들의 삶을 지배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영적이며 교회의 질서를 위한 재판권을 남용하여 세상 권력까지 움켜쥔 교황주의자들의 탐욕을 사악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것을 ‘로마의 자물쇠 장수’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현대 사회는 ‘열쇠와 자물쇠’의 싸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터넷이라는 어마어마한 공간 속에서 ‘열쇠와 자물쇠’의 총성없는 싸움이 치열합니다. 해커(hacker)들 때문이지요. 누구는 열려고 그러고 또 한편에서는 닫으려고 하지요. 그렇기에 현대의 가장 유망한 직종 중에 하나가 바로 ‘보안산업’일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도 온갖 종류의 자물쇠를 만드는데 열을 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로마 교황청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능열쇠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의 모든 교회 생활에 자기들이 만든 자물쇠를 달았습니다. 고해성사의 자물쇠, 출교의 자물쇠, 입법권 자물쇠, 혹은 사면권 자물쇠 등등의 수많은 자물쇠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는 그 모든 것들의 자물쇠를 열고 닫는 권세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교회 권한의 세 번째, 재판권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권세는 특히 교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를 누리는 상태에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한 국가에 집권자와 정치제도가 없으면 도시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교회에도 그런 기능을 하는 영적 정치 제도가 필요합니다. 허나 교회의 이런 권세와 조직은 국가의 조직과는 그 성질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의 행정조직을 방해 하거나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재판권은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영적인 정치 제도로 보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교회가 도덕적 문제에 대해 견책하고, 죄악들을 조사하며, ‘열쇠의 직책’을 감당케 하기 위해 교회 안에 재판소를 설치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나 고린도서에서 말한 ‘다스리는 직분’이 바로 이 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롬12:8; 고전12:28). 또 바울은 디모데서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말씀은 선포하지 않고 다스리기만 하는 장로들을 구분하고 있습니다(딤전5:17). 이 둘째 장로들이 바로 목사(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함께 도덕적인 문제를 감독하며 열쇠의 권한을 행사하는 일을 위해 임명된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교회의 이 권세는 전적으로 교회에 ‘매고 푸는 열쇠’를 맡기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것으로 신약에는 ‘매고 푸는’것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세 곳에 나옵니다(마16:19, 18:18, 요20:23). 이것은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우선 첫째 종류는 말씀 선포와 관련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9절과 요한복음 20:2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교회의 권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말씀 선포와 관계된 것입니다. 즉, 복음 선포는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자들에게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주고(롬3:24 참조), 천국의 문이 열리는 복을 누리게 하는 권세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유6참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이유는 제자들이 자기 직책에 대해 이런 확신이 있어야만 세상에 나가 전도 활동을 할 때 어떤 어려움과도 싸워 이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듣는 자들도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땅에서 난 음성이 아니라 하늘에서 난 하나님 자신의 음성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 열쇠의 권한은 단지 복음 선포일 뿐이며, 사람은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 권한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주신 것이지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번째 종류는 교회를 순결하고 온전하게 지키고 견고하게 하기 위한 권세입니다. 그야말로 재판권이지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다툼, 혹은 거짓 복음이 스며드는 일에 대해서 교회는 단호하게 재판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출교까지 시키는 규정에 관한 것으로서 마태복음 18장 17-18절에 나옵니다. 주님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재판권을 교회 안의 제도로 설치하시고, 그것으로 자신의 양떼의 죄를 엄중하게 다스리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교회의 순결과 하나됨을 위함이지요. 이 때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모호하거나 틀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지 주님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인정하는 그대로 하늘에서도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판정을 받는 자들은 그것을 멸시하거나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해석이 ‘열쇠의 권한’과 관계된 그 세 곳의 말씀들을 가장 자연스럽고, 유연하고, 평이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의 사람들은 자기 도취에 빠져 자기 욕망과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마태복음의 그 두 곳 말씀의 ‘열쇠권’을 근거로 삼아 여러 종류의 자물쇠들을 만들었습니다. 즉, 고해, 출교, 재판, 입법, 그리고 사면 등의 자물쇠를 만들어 놓고 그 열쇠는 자기들만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그 중 첫째 말씀(마16:19)을 근거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확립하려고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았다고 믿었던 그 ‘열쇠’에 스스로 취하여 주님이 교회의 직분에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자기 욕망과 욕심을 채우려 평생 자물쇠를 만드는 취미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주님이 교회에 주신 재판권은 국가의 재판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 서로 협조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쯔빙글리,볼링거)은 그 두개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재판권이 임시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세상 집권자들이 우리의 종교를 믿지 않고 있을 때에만 필요했던 제도였다는 것이지요. 이제 세속 군주들이나 관리들이 다 교회 안으로 들어와 기독교 국가가 된 지금에는 국가가 교회의 치리를 적극적으로 주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의 권한과 국가의 권한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칼의 권한이 없습니다. 벌을 주며 강요하는 강제력이 없다는 것이지요. 세상 집권자는 죄인의 죄인을 벌하여 옥에 가두고 형벌을 가할 수 있지만, 교회는 죄인 스스로 자신을 징계하여 회개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동네에서 한 사람이 도둑질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질서가 잡힌 도시라면 그를 잡아 옥에 가두고 벌을 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도시의 법률이나 집권자나 그 죄인에 대한 외형적인 정의는 만족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죄인이 교회의 요구까지 만족시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공적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를 성만찬에 참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와 국가의 재판권은 그 하는 일이나 개념이 서로 전혀 다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을 국가가 할 수 없고, 국가가 하는 일을 교회가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재판권과 국가의 그것이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더라도 국가가 교회의 재판권을 대신하거나 빼앗을 수 없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말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보다 황제에게 더 큰 명예가 있는가? 선한 황제는 교회 안에 있지 교회 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 관리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교회의 재판권을 스스로 그들에게 돌리는 자들은 엉터리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말씀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황제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교회의 판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의 재판권은 영적입니다. 그 목적은 죄악을 막으며 이미 일어난 범죄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지요. 따라서 재판권을 행사할 때마다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칼의 권리에서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둘째,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니라 합법적인 회의의 결정에 의해 행사되어야 합니다(고전5:4-5). 교회는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지키기 위해 재판권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잘못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불러 경고하기도 하고, 또 더 엄하게 견책할 사람을 부르기도 하며, 혹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 시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줄 수 있는 가장 엄중한 벌은 출교 선고인데, 그것은 불가피할 경우에만 내리는 처벌이며, 물적 강제력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만 행사합니다(고후10:4-6; 고전5:12). 이처럼 교회의 재판권과 국가의 재판권은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 또한 서로 협조합니다. 즉, 국가는 칼의 권력으로 죄를 지은 시민들을 징벌함으로써 결국 교인들의 범죄까지도 예방하고 제거하는 한편, 교회는 영적 재판으로 교인들을 징계함으로써 교인인 관리나 시민들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교회의 재판권과 국가의 재판권을 혼합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교회를 부패하게 했습니다. 본래 교회의 재판권은 한 사람이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장로회와 교회와의 관계는 시의회와 시와의 관계와 같았지요. 그리고 장로회는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와 도덕적 문제의 감독만 맡은 장로로 구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벌써 암브로시우스 때에만 와도 교회의 재판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들이 배제되고 감독들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변질된 것이지요. 마치 원로원을 축출하고 권한을 독점한 집정관처럼 주교는 치리 장로들을 몰아낸 것입니다. 주교들이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제정하신 회의를 억압하고 해산했다는 것은 심히 악한 짓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잘못은 또 다른 잘못을 낳는 법입니다. 그렇게 재판권을 강탈한 주교들은 그것을 자격도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사람들이 ‘판사(officials)’인데, 흔히 ‘주교 대리(vicar-general)’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이 땅의 사물에 대한 소송을 맡아 판단하면서도 자기들의 법정을 교회의 법정이라고 주장했고, 자기들의 재판권을 영적 재판권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단지 육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신자들에게 경고를 하고 출교를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희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눈을 감아 줍니다. 이런 관행은 성경에서도, 고대 교회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제국을 탐내고 황제들은 사제직을 더욱 탐낸다.’는 속담처럼 언제부턴가 궁궐과 교회가 서로의 권세를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못한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외칩니다. ‘궁궐은 황제의 것이요, 교회는 사제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들은 ‘칼의 권세’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주교들은 모세도 두 직책을 겸하지 않았었냐는 예까지 들어 가면서 자기들의 탐욕을 합리화 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그 겸직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제사장직을 아론에게 넘겨 줍니다(출18:13-26).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도 거절한 자리를 그의 종들이 탐낸다니 말이나 됩니까?(눅12:14; 참조. 마20:25-26; 막10:42-44; 눅22:25-26) 사도들도 말씀 전하는 것과 구제하는 일을 돌보는 것을 겸하기가 힘들다고 그랬는데, 사도들보다 형편 없이 작은 자들이 사도들보다 백배나 더 크고 많은 일들을 감당하겠다고 나선다는 것은 정말 꼴 볼견이 아닙니까? 그렇게 터무니 없는 욕심을 부린 결과는 뻔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본직을 버리고 남의 직분을 훔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황주의자들은 줄기차고도 무모하게 부정직한 권력을 주장하면서 세속적 권력을 찬탈했습니다. 로마의 주교들이 로마 황제의 옷을 입으려는 시도는 아주 미미하게 시작해서 조금씩 자란 것이 틀림없습니다. 때로는 교활하게, 때로는 공갈 협박으로 조금씩 군주의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또 어떤 군주들은 경건한 의도에서 자기들의 재판권을 기꺼이 주교들에게 넘겨 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미련한 선물은 교회를 도운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내려온 교회의 진정한 권징을 타락시키고 아주 소멸시켰습니다. 그리고 로마교회 감독은 적당한 귀족령(貴族領)에 만족하지 않고, 처음에는 왕국들에 손을 대다가 다음에는 아예 제국 자체에 손을 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도적질하는 구실을 대기 위해 어떨 때는 하나님의 이름을, 어떨 때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을, 또 어떨 때는 이런 저런 소유권들을 주워다 둘러댔습니다. 결국 1302년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칙서(Unam Sanctam)를 통해‘하나님이 두 칼에 대한 최고의 권리를 다 자기에게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경솔하고 난잡했던 황제 헨리4세(1056-1106)가 교황 힐데브란드(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꼬리를 잡히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임명을 인정하던 황제의 권한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곤 결국 교황이 황제의 멍에를 벗어버릴 수 있게 된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교황들은 사기와 배신과 전쟁 등으로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또 그들은 교황은 세상 법정과 법률로부터의 의무를 면제 받아야 교회의 자유와 체면이 선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외법권이란 특혜를 누린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 때에는 감독들이라도 황제에게 불려가 판단을 받았습니다. 물론 암브로시우스의 주장처럼, 영적인 일이라면 교회가 그것을 재판해야 할 것입니다. 또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라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며 다루는 문제가 영적인 일이라면 그도 역시 감독의 판정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황제가 사제들을 일체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레고리우스의 말처럼, 그 판단을 교회에 맡겨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감독들도 순전히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세속 재판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로마 교황청의 야망은 대단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 맡기신 ‘열쇠’를 ‘만능열쇠’로 착각하고 그것을 남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물쇠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열고 닫는 권세가 오직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궁궐은 궁궐이고 교회는 교회입니다. 황제는 황제이고 감독은 감독일 뿐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권력을 탐하고, 세상 권력을 부러워하고 기웃거리는 순간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자신이 죽어 나를 살리신’ 예수님처럼 ‘내가 죽어 너를 살리는’섬김의 삶을 가르치는 곳이지 섬김을 받는 자리에 오르려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이 교회에 직분을 주시고, 그 직분에 권세를 주신 것은 그 권세를 통해 교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세우며, 순결하게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고 닫는 교회의 권세는 말씀을 선포하여 닫혔던 천국의 문을 활짝 열고 죄인을 구원하는 권세이지 징계하고 벌주려는 권세가 아닙니다.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권위를 탐내면 타락의 길로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늘 성경 말씀 안에서 자기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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