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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2장 : 회초리 다발(부패해버린 로마교회의 권징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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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라디아서6:1-7절 개역개정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늘은 제 4부 12장입니다. 교회의 권징(Church Discipline)에 관한 말씀이지요. 권징이란 권면하고 징계한다는 말입니다. 권징은 교회가 성도들의 신앙과 도덕적 삶을 유지하고 교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교정적인 수단을 말합니다. 권징의 목적은 단순히 처벌이 아니라, 죄를 범한 성도가 회개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을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권징은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가 성도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은 권징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변질키셨습니다. 그것을 ‘회초리 다발’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예로부터 법도가 엄격한 가정에는 ‘회초리 다발’이 준비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요즘에는 가정은 물론이고 학교에서도 체벌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체벌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매는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잠20:30). 영국 명문학교 이튼 고등학교도 ‘매가 썩으면 자식이 썩는다.’는 교훈으로 학생들을 훈육하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교회에도 ‘회초리 다발’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회초리가 썩은 교회는 성도들도 썩습니다. 회초리질이 무딘 교회는 누룩처럼 퍼지는 죄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회초리는 사랑의 매입니다. 아무도 회초리를 가시나무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로마 교회의 회초리는 독이 묻은 가시 박힌 회초리였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그 회초리를 함부로 휘둘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고, 또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 들지 못해서 교회가 썩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주님이 교회에 주신 열쇠의 권한인 재판권의 한 부분이 바로 회초리입니다. 권징이지요. 교회의 권징은 주로 견책(censure)과 출교(excommunication)로 나타납니다. 교회가 권징을 시행할 때는 바른 절차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권징을 하느냐고 권징을 싫어하고 말만 들어도 뒷걸음 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교회도 하나의 사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조그마한 가정 같은 사회에서도 건강하고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규율이 필요하다면, 가장 질서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할 교회에서는 더더욱 규율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교회의 생명이라면, 권징은 교회의 근육이며, 교회의 각 지체들은 이 근육에 의해 서로 결합되며 각각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징을 폐지하거나 약화시키고,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그 회복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결국 교회를 부패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끝내는 해체시키는 데 이바지하게 됩니다. 권징은 증거하고 가르친 교리를 또 다시 개인적으로 충고하고, 잘못을 시정해주고, 바르게 실천하게 하고, 때에 따라서는 견책과 출교까지 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권징은 교훈을 거스려 날 뛰는 사람들을 억제하고 길들이는 굴레와 같고, 게으른 사람들의 배를 찌르는 박차와 같고, 심각한 죄에 빠진 자들을 사랑으로 때리는 아버지의 매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고 옛날 경건한 사람들이 항상 사용한 교회의 시정책은 이 권징 뿐입니다. 권징은 성직와 일반 신자를 구분해서 시행해야 합니다. 먼저 일반 신자들에 해당하는 권징입니다. 권징의 첫 단계는 개인적인 충고입니다. 교인들은 서로 이 일을 잘 해야 하지만, 특히 목사와 장로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설교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을 다니면서 경고와 충고를 해주는 것이지요(행20:20,31). 목사는 그럴 수 있는 권리와 수단까지도 가지고 있어야 그의 설교와 교훈에 실제적인 권위와 힘이 실리는 것입니다. 다음 단계는 증인들 앞에서 충고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충고를 거절할 경우이지요. 그 다음에는 장로회 앞에 불러내어 공적으로 엄히 충고합니다. 만약 그가 교회를 존중해서 그 충고를 받아 들이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고 교회를 멸시해서 그 충고까지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마지막 단계로서 그를 신자의 공동체에서 제거하게 되는 것입니다(마18:15,17). 그런데 지금까지의 단계는 은밀한 죄에 해당되는 것이고, 만약 어떤 죄가 이미 널리 드러난 것이라면 교회는 즉시 공적으로 그 죄를 엄숙하게 책망해야 합니다(딤전5:20; 갈2:14). 또 단지 실수인 죄와, 고의적인 범죄 또는 부끄러운 죄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가벼운 죄와 심각한 죄를 똑같이 다루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로부터 근친상간이라는 치명적인 죄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출교의 벌을 내리고 있습니다(고전5:3이하). 그러므로 교회는 온 교회에 부끄러움을 끼친 교인을 즉시 성찬을 받지 못하도록 처벌하고, 그가 회개의 표를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고전5:1-7). 가벼운 죄든 무거운 죄든 회개의 표시로 엄숙한 의식을 지키도록 하고, 교회를 만족시켰을 경우 안수함으로써 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평안(peac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때 감독과 장로회는 꼭 회중의 찬성을 받아 그 ‘화목’을 선언합니다.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는 데는 세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부끄러운 짓을 한 신자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빼앗음으로 그리스도의 명예를 더럽히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엡5:25-27; 골1:22). 그래서 회개치 않는 악행자들은 성찬에서 추방하는 것입니다. 권징을 통해 성찬의 거룩을 지키는 것은 목사의 중요한 의무입니다(겔3:18; 33:8). 둘째는 누룩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고전5:6,11). 악행자들의 죄악이 다른 신자들에게 전염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셋째는 회개를 위한 것입니다. 범행자를 부끄럽게 만들어 회개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지요(살후3:14). 심지어 사탄에게 내주기까지 해서라도 그의 영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교회 밖으로 내 쫓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권징이 없이도 교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도 권징없는 교회는 온전할 수 없다고 보셨으니까요. 따라서 권징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 학살 사건(AD.390년 4월)으로 암브로시우스에게 성찬 참가를 금지 당했을 때 보여준 순종처럼, 군주라도 교회의 권징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권징은 오히려 해롭습니다. 아버지는 가시나무로 회초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교회의 권징은 저주가 아닙니다. 출교는 그의 도덕적 행위를 처벌하고 징계하는 것이지만, 저주는 모든 용서를 거부하고 그를 영원한 멸망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죄인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엄격주의에서 나온 권징은 도리어 해가 됩니다. 그런 처벌을 받았을 경우 대부분 큰 위선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큰 절망으로 빠지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있었겠습니까? 권징은 아버지 같은 온유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갈6:1; 고후2:7-8). 모든 면에서 엄격한 편이었던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친절하신데, 그의 사제들이 그리도 엄격한체 할 까닭이 무엇이냐?’ 어거스틴도 도나투스파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교회에서 추방한 자라 할지라도 그를 아주 영원한 선택에서 제외됐다든지, 멸망의 자식인 것처럼 여길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일이 못됩니다. 우리는 징계받은 자에게 사랑을 주고 희망을 주고, 또 그를 위해 기도하기를 끊지 말아야 합니다(살후3:15). 우리는 형제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죄의 성격만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권징에서 올바른 태도가 상실된다면 그 권징은 곧 도살 행위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신중하라고 경고합니다(마13:29). 그러면서 그는 키프리아누스와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시정할 수 있는 자는 인자한 태도로 시정하라. 그러나 시정할 수 없는 것은 길이 참으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슬퍼하며 신음하라.’ 어떤 경우에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엡4:2-3)을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나투스파나 재세례파는 엄하게 권징하지 않는 감독들을 맹렬히 비난하며 불경건한 분리를 감행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교회의 연합을 깨뜨려 사탄만 좋게 하는 짓입니다(고후11:14; 고전5:3-7; 엡4:2-3). 어거스틴이 카르타고의 감독 아우렐리우스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그의 신중한 태도가 잘 드러납니다. 당시 아프리카 교회는 술 때문에 큰 해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속히 감독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우라고 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강압적인 방법 보다는 부드러운 방법으로, 명령 보다는 교훈으로, 위협보다는 충고로 제거해야 합니다. 많은 죄인들을 다룰 때에는 보다 온건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소수를 상대로 할 때에는 보다 엄격한 태도가 좋습니다.’ 권징에는 원래 열쇠의 권한과 상관없는 부분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없지만 교회가 판단해서 정한 방법들로서 그것들을 통해 겸손과 회개와 신앙을 나타내는 것들이지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금식입니다. 그리고 금식은 교회에 전혀 새로운 습관이 아닙니다. 구약과 사도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욜2:15; 행13:2-3). 그러므로 교회가 필요에 따라 금식을 선포하고 특별 기도를 시행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고 또 유익한 규정입니다. 예를 들면 신앙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서 교회 회의나 재판으로 해결해야 할 때, 목사를 청빙해야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행13:3; 14:23),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를 결정해야 할 때, 전염병이나 전쟁 등 주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했을 때 등등 여러 경우에 금식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는 재앙의 징조들을 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무장을 끝냈다는 징조로 여기고 교회에 금식을 권고할 의무가 있습니다(욜2:12; 욘3:5; 마9:15). 그런데 어떤 이들은 미신적인 신앙으로 금식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주 금식을 무시하고 배척해버립니다. 둘 다 잘 못입니다. 성결하고 합당한 금식은 세가지 목적을 갖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육욕을 약화 시키기 위한 것인데 주로 개인적인 금식에 더 어울립니다. 둘째는 기도와 거룩한 명상을 위한 것인데 공적이든 개인적이든 유익합니다(눅2:37). 그리고 셋째는 회개할 때 자신을 낮추는 증거를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인데 역시 공적이든 개인적이든 다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금식은 기도를 돕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돕지 않는 금식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건한 자들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령으로는 때와 음식의 질과 양 등 세가지 요소를 잘 고려하는 것입니다. 즉 적절한 때에는 꼭 금식을 하는 것이며, 음식을 먹을 경우에라도 특별히 적게 먹고 고급진 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금식을 하는 것보다는 아예 금식을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컨데 위선으로 꾸미기 위해 금식하거나, 마니교도들처럼 금식을 공로로 생각하거나, 금식을 좀더 고상하고 경건한 행위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순절 금식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40일 금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미신으로 가득한 열성 때문에 생긴 오류의 극치입니다. 그리스도의 그 금식은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곧 하늘의 복음을 받아 선포하시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지요(마4;2; 참조. 출24:18; 34:28; 왕상19:8). 하지만 헛된 망상에 사로잡힌 저들은 금식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희롱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각양 좋은 진찬을 찾아 먹었고, 물을 안 마시는 대신 희귀한 음료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금식 문제나 권징의 다른 부분 어디에서도 바른 것, 성실한 것, 질서가 잘 잡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권징의 둘째 부분, 즉 성직자들의 문제를 잠간 다루렵니다. 고대 감독들은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엄격한 규율로 성직자들을 다스렸습니다. 잘한 일이지요. 예컨대, 성직자들에게는 사냥, 도박, 환락, 고리대금, 장사, 난잡한 무도회 참석 등을 금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모든 관습은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의 성직 계급만큼 방탕한 계급은 눈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썩은 냄새가 날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회초리를 들지 않아서 입니다. 그들이 엄격한 것은 독신 맹세뿐입니다. 사제의 결혼을 금하는 것에서만은 여전히 사정없이 냉혹하고 엄격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각자의 자유에 맡기신 일을 불경건한 폭력으로 엉망진창을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말세에 그런 자들이 나타날 것을 미리 예언해 놓으면서 그들을 ‘외식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딤전4:1-5). 로마의 교황주의자들은 성경의 그러한 경고를 몬타누스와 타티아노스파와 엔크라티스파 등에 전가시키고는 자기들은 슬쩍 빠지려고 합니다. 자기들은 사제들의 결혼만 금하는 것이니 만큼 결혼 자체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성경이 감독의 조건이 되는 덕목 중 하나로 보는 결혼을 ‘육의 불결과 오염’으로 보며 교회 내에서 용납할 수 없는 제도라고 모욕합니다(딤전3:11;엡5:23). 또 저들은 구약 제사장의 예를 들어 변명하려 합니다(삼상21:5이하). 그러나 그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유치한 것입니다(딤전2:5). 실제로 주님의 교회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결혼을 거룩한 것으로 여겼으며(히13:4), 베드로 등 사도들도 자기 아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고전9:5). 니케아 회의(AD.325년)에서도 자기 아내와 동거하는 것이 정절을 지키는 것이라는 파프누티우스의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는 독신생활을 미신적으로 숭배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광적으로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한 타락입니다. 사람들이 독신주의를 찬양하는 동안 성직자들은 음란에 빠졌고, 사제들의 침상은 간음과 온갖 음행으로 더럽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권징을 통해 이를 교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이러한 문제를 방치하거나 묵인하며 성직자들의 부패를 용인해왔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영적 순결을 훼손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심각하게 부패되었습니다. 사제의 독신제도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이유로 발전했습니다. 저들이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강요한 이유는 순수한 영적 목적이 아니라, 교회 재산의 상속 문제나 성직자들이 가정을 이룸으로 빼앗길 교회의 재산이 아까웠던 것이지요. 저들은 저들 자신이 회초리가 부러질 때까지 스스로에게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자신들은 부패하고 타락하여 썩은 냄새가 나면서도 성도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회초리가 아닌 몽둥이로 두들기는 저들의 권징은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죽이고, 자신들이 살려는 것입니다. 회초리 다발이 통째로 썩고 있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성도들도 썩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회초리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매입니다. 죽이려고 때리는 매라면 회초리가 아니라 살상 무기입니다. 교회의 회초리는 말씀과 사랑으로 만든 거룩한 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른 권징이 사라진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하여 세상 보다 못한 공동체가 됩니다. 오늘날 조국의 교회가 그 옛날 교황주의자들이 있던 교회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보고,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먼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목사들은 회초리를 드는 자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회초리는 사랑의 매이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도 그 회초리에 기꺼이 종아리를 내 밀어야 합니다. 회초리를 들기만 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은 교회를 부패하게 합니다. 기꺼이 회초리를 들고, 기꺼이 자신의 종아리도 내미는 바른 권징이 시행되어야, 그래야 교회를 건강하고 튼튼하게 살릴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바른 권징이 살아날 수 있도록 더욱 엎드려 기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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