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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3장 : 수도원과 수녀(경솔하고 헛된 맹세의 해로움) 임병욱 목사 20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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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5:33-37절 개역개정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10월 3일 목요일

 

오늘은 제 413장입니다. 맹세에 관한 말씀이지요. 로마 교회 교황주의자들은 성직자들에게 독신을 강요하고, 금욕적인 삶과 빈 자의 삶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며 부추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금욕과 독신의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고 비밀스럽게 타락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을 수도원과 수녀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로마 카톨릭의 수도회는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법적 구속력이 강한 성식서원(盛式誓願)’을 하는 오르도(ordo), 다른 하나는 비교적 약한 단순 서원을 하는 콩그레가치오(con-gregatio)입니다. 베네딕트회, 시토회, 프란체스코회, 도미니크회 등 주로 중세 이후의 전통을 따르는 것들이 오르도에 속합니다. 그리고 형태와 목적별로 보면, 지정된 금지 구역에서 기도와 노동의 생활에 전념하는 관상수도회(觀想修道會;베네딕트회·시토회·카르트지오회 등)’, 주로 13세기에 설립되어 민중 속에서 포교활동에 종사하는 탁발수도회(托鉢修道會;도미니크회·프란체스코회·카르멜회·아우구스티누스 은수사회 隱修士會 )’, 비교적 자유로운 계율 밑에서 포교·교육·자선·사회 사업 등 사회 활동에 종사하는 활동수도회(예수회·살레시오회·신언회神言會 )’ 등으로 구별됩니다. 이런 수많은 종류의 수도회를 보면 수도원과 수녀가 없는 로마 카톨릭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과 수녀는 경솔한 맹세로 자기를 괴롭힌 또 하나의 자의적 숭배의 예입니다. 바른 맹세는 우리의 믿음에 유익을 주지만, 경솔한 것은 큰 해를 줍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른 맹세일까요? 사람들은 수많은 맹세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스스로 내팽개쳤고, 그런 자의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려 했습니다.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지난 수 백년동안 교황주의자들 아래서 우리가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악 중에 하나가 바로 열광적으로 하나님께 맹세하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항상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누구를 상대로 맹세하는가? 둘째, 맹세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셋째, 무슨 뜻으로 맹세하는가?

하나씩 살펴 봅니다. 첫째, 맹세하는 상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맹세하는 상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이 승인하지 않으시는 예배를 가증히 여기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신다는 확신이 없는 것은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맹세 역시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은 죄가 됩니다(14:23).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령과 판단을 받습니다.

다음 둘째는 우리 자신에 대해 두 가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의 힘에 부치는 것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또 하나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멸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상충되는 맹세를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특히 사제들의 독신맹세는 이런 어리석은 것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습니다. 독신맹세는 하나님이 주신 본성을 거스리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소명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4:7). 한 가정의 가장으로 부르셨는데 그것을 버리고 다른 짐을 지겠다고 맹세하거나, 공직에 부르셨는데 일반 시민으로 남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소명에 어긋나는 짓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맹세하는 의도를 살펴 보는 것입니다. 흔히 나쁘지 않은 목적으로 맹세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네 가지 목적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 중 둘은 과거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둘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에 대한 것은 과거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고(28:20-22; 22:25; 56:12; 61:8),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회개를 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미래에 대한 것은 죄를 예방하기 위해 조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과, 우리의 의무를 자극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맹세는 경건의 초보 훈련에 속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경우에라도 그 맹세들이 하나님의 승인으로 지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소명과 일치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 제한 되어야 합니다.

이로 보건데 우리가 어떤 맹세를 해야 하는가를 추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세례 받을 때 하는 성례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으로 주께서는 이 계약을 근거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영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육의 욕망을 버리고 주의 계명에 순종할 것을 약속합니다. 성례는 성경이 인정하는 맹세로서 성도 모두에게 매우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외에도 이미 말한 원칙 안에서라면 경건에 도움이 되는 맹세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해야 하며, 단번에 영원한 맹세를 하거나,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자주 시행해서 그 내용을 변질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수도원 생활은 매우 타락한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오늘날의 수도원 제도가 옛날 고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라는 데서 권위를 주장하려 합니다. 물론 수도원 제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어거스틴도 증거해 주듯이 수도원은 성직자들을 배출하는 요람이었습니다. 일종의 신학교였지요. 그는 아우렐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수도원을 떠난 자를 성직자로 받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수도원이 아주 긍정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나 바실리우스, 그리고 크리소스톰 등이 증언해 주듯이 당시 수도원 생활은 리쿠르스의 법으로 살던 스파르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이 초기 수도원 생활을 전해 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는 두 곳인데, ‘카톨릭 교회의 도덕에 관하여’(On The Morals of the Catholic Church), ‘수도사의 사역에 관하여’(On the Works of Monks) 등입니다. 첫번째 책에서 그는 마니교도들의 비방으로부터 수도사 직책의 거룩함을 방어했고, 둘째 책에서는 수도원을 타락시키기 시작한 일부 수도사들을 공격합니다. 그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유혹을 멸시하며, 깨끗하고 거룩한 공동생활을 하고, 기도와 독서와 토론으로 시간을 보낸다. 저들은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 자기 손으로 번 것을 원감에게 갖다 주고, 원감은 모든 일을 원장(아버지)에게 보고한다. 한 아버지 아래 적어도 3.000명의 아들들이 모인다. 이들은 포도주를 끊어 욕망을 길들이며 식욕을 자극하는 음식도 끊는다. 물론 그런 음료나 음식 때문에 더러워 진다고는 생각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절대로 저장하거나 보관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나눠주며, 말과 옷과 안색 조차도 사랑에 일치하도록 힘쓴다. 사랑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나님께 죄 짓는 일로 여기며, 사랑을 반대하거나 비웃는 자는 단 하루라도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더 자세히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에 맡긴 것들을 엄격하게 금지하거나 요구하는 것들을 일체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수도원 생활은 어거스틴이 본 옛날의 그것에서 아주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무위도식을 사명으로 알며, 그 덕에 할 수 있는 명상 때문에 자신들이 마치 천사같아 진 줄로 착각하고, 주께서 꾸준히 지키라고 한 것은 무시한 채 자기들이 만든 것들에 전심전력하여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수도원 생활이 완전함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라고 선전합니다. 물론 속으로는 자기들의 생활이 곧 완전한 상태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렇게 약간 양보하는 척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친히 증거해 주신 생활 약식들을 천하게 보면서, 성경에 단 한 마디도 인정한 적이 없는 자기들의 위조품에 그토록 엄청난 찬사를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심한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교회 전체에 명령하신 공통된 생활 법칙 보다 더 완전한 원칙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명령하신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활이 완전한 상태라는 근거로 마태복음의 말씀을 끌어댑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19:21).’ 그러나 예수님의 그 말씀은 헛된 자신감에 꽉 차 있던 부자 청년의 약점을 들춰내시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방식의 경고입니다. 야심가에게 모든 영예를 버리라고 한다거나, 방탕한 자에게 모든 쾌락을 버리라고 하는 식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참 모습과 숨은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수한 교훈을 일반화 시켜서 마치 재산 포기가 곧 완전해지는 길인 것처럼 만들면 안됩니다. 그리고 재산을 다 포기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3). 물론 재산 포기와 상관 없이 사랑만으로도 온전하게 매는 띠가 되지요(3:14).

그리고 수도원의 타락 중 가장 나쁜 것 하나가 바로 분파주의입니다. 교회에서 갈라 나가버리는 것이지요. 수도원 생활을 둘째 세례라고 말하면서 따로 제단을 세우고 일반 성직 제도를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베네딕트파, 프란체스코파, 도미닉파 등이라고하면서 바울이 가장 저주한 일을 파렴치하게 자랑합니다(고전1:12-13; 3:4). 뿐만 아니라 그 품행에 있어서도 고대 수도원과 비교한다면 사람과 원숭이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소수의 선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의 수도원들은 죄악으로 거의 터질 지경입니다. 그러므로 고대의 경건한 자들이 교회에 수도원 제도를 도입한 것은, 어거스틴조차 인정하고 칭찬하였지만, 지극히 위험하고 아무 유익이 없는 길을 연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점은 사소한 죄라 할 수 없습니다.

특히 독신맹세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하십니다(2:18).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고도 강조하지요(13:4). 예수님은 결혼식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2:2,6-11). 어쩌다 독신을 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이 제한해 주셨습니다(19:11-12). 절제의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대책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고전7:9).

그러나 수도원 숭배자들은 독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지키지 못할 맹세로 괴로워하고 있는 자들에게 어떤 완화책이나 사면을 절대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육의 무절제를 치료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버티면서 온갖 음행으로 몸과 마음을 더럽히는 편이 더 경건하다고 가르칩니다. 수녀도 마찬가지 어리석음의 희생 제물입니다. 저들은 신약 교회의 경건한 과부들이 곧 수녀들의 어머니라도 되는 것처럼 떠듭니다(딤전5:12). 그러나 그것은 예배 때문이 아니라 임무를 수행하기에 독신이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60세가 된 부인들에게만 허락했고(딤전5:9), 젊은 부인들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라고 권고합니다(딤전5:14). 그러므로 수녀에게 독신 맹세를 강요하는 것은 폭력과 위협으로 저주의 굴레를 씌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불법적이고 미신적인 맹세도 지켜야 할까요? 지금까지 언급한 정도면 어떤 맹세가 합당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맹세의 경우에는 취소할 수 없을까요? 맹세주의자들은 죽어도 그렇게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법적이며 미신적인 생각에서 나온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 하며 따라서 우리에게 대해서도 구속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믿음의 양심에 확신과 기쁨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서도 계속 맹세에 머물러 있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14:23). 맹세주의자들은 맹세를 파약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억지를 부리지만,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도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사탄이 속이는 그물에 불과한 저 외형적인 족쇄들로부터는 더욱 더 우리를 구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 은혜를 외면하고, 미신과 오류에서 출발한 맹세의 사슬을 옷 입고 고집 부리는 자들의 삶을 무서운 형벌로 벌 주십니다. 그러므로 맹세의 법칙에 어긋난 것이라면 얼른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십자가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맹세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은혜 안에서만 해야 합니다. 그 울타리를 떠나 내가 만든 맹세를 갖고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행위는 가증한 것입니다. 수도원과 수녀는 수많은 경솔하고 미신적인 맹세로 자기들을 속박하고 괴롭힌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열심은 그 보다 더 많은 죄로 밖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맹세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기를 위해 하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견고히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려는 맹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내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거나, 힘에 부치는 헛된 것이라면 헛된 맹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경솔한 맹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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