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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4장 : 임금님의 도장(언약의 증표인 성례)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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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고린도전서11:23-26절 개역개정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오늘은 제 4부 14장입니다. 성례에 관한 말씀이지요. 성찬과 세례, 곧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우리의 믿음의 도장을 찍어 효과 있게 해주십니다. 곧 우리의 믿음이 성령의 조명과 성경의 안내를 받을 때 하늘의 비밀 창고 문을 활짝 열게 합니다. 하지만 교황주의자들은 성례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 성례를 미신적으로 만들었으며, 숫자적으로 늘려 고해성사, 혼인성사, 성직성사 등 여러 가지 성례를 추가해 그리스도인이 그 성례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임금님의 도장’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도장을 가장 많이 사용한 나라는 중국이지만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한 곳은 오리엔트였던 것 같습니다(BC.4,000). 유럽에는 BC.2,500년 경의 크레타 섬의 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처음부터 도장은 주로 왕들이 사용 했는데 중국에서는 임금의 것을 ‘새’라고 그러고 신하들의 것을 ‘인’(印)이라고 했답니다. 옥으로 만든 것을 ‘옥새’, 금으로 만든 것을 ‘금보’(金寶) 또는 ‘금인’(金印)이라 하는데 그냥 총칭해서 ‘옥새’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고려는 1370년(공민왕 19년)에 명(明)나라에서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을 받아 왔고, 조선은 초기에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중국으로부터 받아와 사용하였으나, 세종 때 ‘체천목민영창총사(體天牧民永昌總嗣)’라는 옥새를 만들어 사용하였답니다. 아무튼 도장은 권위와 보증을 의미했습니다. 성례는 옥새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장입니다. 문서에 찍힌 도장이 효력이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 말씀으로 의롭게 하신 자들에게는 성례가 믿음의 확신과 성숙을 선물합니다. 그렇기에 성례를 아주 무시하거나 너무 과장 하는 것은 잘 못입니다. 먼저 성례에 대한 잘못된 생각 두 가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는 성례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성례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먼저 성례를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례가 악인들에게도 참여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증해 주는 것이 못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더 중한 정죄를 받는 악인들이 있는데도 성례가 은혜의 확증이 되냐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가 될 수 없단 말입니까? 옥새가 찍힌 문서를 보고 혹시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그 옥새 자체가 거짓이 된단 말입니까? 성례 때문에 오히려 더 중한 죄에 빠지는 사람이 있어도 성례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보증해주는 도장과 같습니다. 또 저들은 성례가 믿음을 돕는다는 말을 기분 나빠합니다. 이미 온전해진 믿음이 더 좋아질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빌립에게 세례받은 내시의 믿음은 이미 온전했던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행8:38). 그러니까 세례가 믿음을 돕고 말고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지요. 또 만일 믿음이 그렇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부족한 믿음을 주신 성령님이 실패하신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답답한 주장입니다. 왜나햐면 세상에 있는 성도의 믿음은 날마다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눅17:5; 막9:24). 우리의 믿음은 평생토록 계속 성장해서 마침내 완전한 성숙에 이르러야 합니다(엡4:13). 성경에서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는다’는 표현은 믿음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라 진심으로, 열렬한 애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받아 들이라는 뜻입니다(시119:40; 시119:10; 111:1). 또 저들은 믿음을 증진 시키는 일을 피조물에게 돌린다면, 믿음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해야 하는 하나님께 부당한 짓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우리의 육체를 돌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도 돌아보셔서 믿음을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지요. 다음, 성례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례를 마치 마술처럼 생각합니다. 성례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그러는 것이지요. 우리가 치명적인 죄 가운데만 있지 않는다면 성례는 그 자체의 힘으로 우리에게 의와 은혜를 준다는 것입니다(피터 롬바르드). 확실히 이런 생각은 마귀적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그것은 믿음과 관계없는 의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은 영혼들을 겉잡을 수 없는 파멸로 몰아 넣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원래 땅을 향해 휘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미신으로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그런 미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적인 외형의 것들을 믿고 안심하게 만듭니다. 믿음과 관계 없는 성례야말로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파괴하는 원수입니다. 성례는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을 떠나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처럼 성례에 있어서 본체와 표징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례의 본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례를 통해 힘과 은혜와 지식과 각종 은사들을 주십니다. 성례의 표징(예식)들은 그 은혜를 자동으로 포함하거나 전달하지 못합니다. 성례와 성례의 힘은 다르고, 세례와 세례의 힘은 다른 것입니다(딛3:5). 성례가 실제적인 효력을 나타내려면 우리의 믿음이 말씀의 인도와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어거스틴도 ‘성례는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서만 효과있게 역사한다. 가룟 유다의 성찬을 보라.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떡 조각은 그에게 독이 되었다. 그것은 떡 조각이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가 악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은혜를 받는다는 생각은 미신입니다. 이제 성례의 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성례’란 말부터 살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서약하는 예식으로만 봅니다. 그 말이 ‘군인이 자기 사령관에게 충성심을 고백하는 선서’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또 그들은 그 말을 단순히 하나의 ‘구별 표지’ 정도로만 봅니다. 로마인과 희랍인이 토가(겉옷의 일종)와 팔리움으로 구별되고, 각 계급이 옷 색깔이나 신발, 반지 등으로 구별 되었듯이, 성도는 성례로 세상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교부들은 그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 말을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은 성례(sacrament)를 ‘신성한 것의 보이는 표’ 혹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형태’라고 가르칩니다. 고대 교부들이 성례를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고대의 라틴어 번역 성경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번역자는 희랍어 ‘뮤스테리온’(비밀, 신비)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항상 ‘성례’(sacrament)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그 뜻의 성례를 우리에게 알리셨으니’(엡1:9), ‘곧 내게 성례를 알게 하신 것은’(엡3:2-3), ‘이 성례는 --- 그들로 하여금 이 성례의 영광이’(골1:26-27), ‘크도다 경건의 성례여’(딤전3:16) 등이 그 예입니다. 즉, 그는 ‘비밀’이란 말을 쓰면 그 위대한 일들을 혹시 낮추게 될까봐 일부러 ‘성례’란 말로 대신 한 것입니다. 고대 교부들도 라틴어 성경의 습관을 따릅니다. 어거스틴은 다시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을 성례라 부른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성례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성례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이냐는 말이지요. 한 마디로 성례는 ‘보이는 말씀’(어거스틴)입니다. 성례가 하는 일은 말씀이 하는 일과 똑같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 은혜의 보물창고를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시청각으로 된 말씀’이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성례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보다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비유를 들겠습니다. 우선 성례는 기둥과 같은 것입니다.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집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집이 견고 하려면 기둥이 받쳐주어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믿음의 기초라면, 성례는 믿음을 받쳐 주고 지지해 주는 기둥입니다. 또 성례는 거울과 같습니다. 성례는 말씀이 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고 실감나게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우리에게 비춰줍니다. 또 성례는 문서에 찍힌 도장과 같습니다. 이 때 도장은 확인해 주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그 문서의 내용을 효과 있게 해줍니다. 아무리 임금님의 도장이라도 휴지나 백지에 찍힌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만약 그것이 중요한 문서에 찍혔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 문서의 내용을 확인해주고 효과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할례를 믿음의 언약을 날인하는 도장이라고 부르는 것처럼(롬4:11), 성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 때는 항상 우리 속에서 믿음을 일으켜 말씀이 약속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례가 효과 있으려면 두 가지가 꼭 함께 해야 합니다. 그 첫째는 말씀입니다. 성례는 말씀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 없는 성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휴지에 찍힌 도장 같은 셈이지요. 그래서 말씀은 성례의 안내자요 선생닙입니다. 성례는 항상 말씀의 손을 잡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례에 참여할 때는 말씀의 안내를 받는 우리의 믿음이 묵상의 계단을 통하여 신비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례는 말씀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버팀목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례 때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라틴어, ‘축성경’the formula of consecration)을 중얼거리는 교황청 사람들의 행위는 터무니 없이 우스광스러운 짓입니다. 어거스틴은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聖物)이 되리라. 말씀의 위대한 힘은 --- 말씀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참조. 롬10:8; 행15:9; 벧전3:21). 그리고 다음 둘째는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지성을 비추어 말씀과 성례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과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가꾸는데 있어서 동등하게 역사합니다. 말씀은 씨앗과 같은데 그것이 성령이 잘 가꾸어 놓으신 마음 밭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로 결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성례라는 외형적 예식에 아주 맡겨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광을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명하고 외적 행동으로 증명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람의 마음 속에 성취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성례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쓸 때에는 모든 자연물과 기적들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할 때 그것들을 성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담의 생명나무라든지(창2:9; 3:22), 노아의 무지개 같은 것들이지요(창9:13-16). 또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기적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연약한 믿음을 지탱하며 강화시키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성례입니다. 원래 사람들을 어떤 종교로 하나 되게 하려면 반드시 하나의 성례로 묶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하시기 때문에 교회에도 하나의 성례를 주신 것입니다. 물론 후에 사탄의 역사로 타락하고 미신으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 하여튼 사람에게는 성례가 필요한 것이 분명합니다. 성례를 통하여 성도들은 믿음의 훈련을 받고 또 세상에 나가 자기 믿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고전11:26). 이렇게 교회에 주신 성례는 단순한 표징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의식들을 ‘언약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의식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동맹을 맺으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결한 생활을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례를 각 시대에 따라 적당하게 만드셨습니다. 구약에는 할례(창17:10)와, 결례들(레11-15장), 그리고 희생과 여러 의식들(레1-10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신약의 교회는 그 모든 것을 폐지하고 오직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만 성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마28:19; 26:26-28). 물론 그 두 시대의 성례는 모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인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단, 구약의 성례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어렴풋이 예시하였고, 신약의 그것들은 이미 나타나셨던 그리스도를 확증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곧 스콜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구약의 성례는 예고에 그친 것이고 신약의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실재로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례와 신약 성례의 차이는 표현 방식의 차이이지, 그 내용과 효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옛 백성들이 할례나 희생 등을 통해 받은 은혜와 우리가 세례나 성찬을 통해 받는 은혜는 똑같은 것입니다. 물론 신약에 계시된 그리스도와 은혜는 구약의 그것보다 훨씬 분명하고 풍성하지만 그 내용과 영적 능력은 차이가 없습니다. 구약의 결례와 신약의 세례는 ‘죄를 씻음’을 의미하고(히9:10,14; 요일1:7; 계1:5), 구약의 희생과 신약의 성찬은 ‘피로 보속 받음’을 의미합니다(히4:14; 5:5; 9:11; 빌2:8). 그래서 그리스도는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말씀합니다(요일5:8). 이 숭고한 신비는 이미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온 때에 충분히 보여졌습니다(요19:34).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십자가를 우리의 성례의 원천이라고 부릅니다. 신구약 성례의 관계는 다음 어거스틴의 말로 잘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두 시대의 성례에는 서로 다른 표징에 동일한 믿음이 있으나(참조.고전10:4), 그리스도께서 계시된 신약 교회에는 그 수가 훨씬 더 적고, 의미는 훨씬 더 숭고하고, 능력도 훨씬 더 탁월한 성례가 제정되었다.’ 여러분, 성례는 임금님의 도장입니다. 우리가 믿는 약속에 도장을 찍어 효과 있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성례를 기둥이라고도 합니다. 성례를 통해 우리는 약한 믿음을 북돋우며 강화시킵니다. 또 성례는 거울이라고도 합니다. 보다 생생히 하나님의 은혜들을 비추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이 성령의 조명과 성경의 안내를 받을 때, 하늘의 비밀 창고 문을 활짝 열게 합니다. 그렇기에 성례를 가볍게 보거나, 주술하듯 맹신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성례를 통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천국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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