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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 4부 15장 : 혼인 예식(세례의 의미와 목적) | 임병욱 목사 | 2024-1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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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6:3-4절 개역개정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은 제 4부 15장입니다. 성례 중에 세례에 관한 말씀이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는 두 가지 목적을 갖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는 문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고,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거듭났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식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하고, 결혼 반지를 끼는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세례 자체에 죄를 씻어주고 부패한 본성을 깨끗이 해주는 마술적 힘이 있다거나, 집례자가 불량하면 그 세례도 불량하다거나, 세례 받은 다음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거나, 세례 받지 못하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등의 말들은 다 엉터리입니다. 이것을 ‘혼인예식’이라는 제목으로 공부해 봅니다. 혼인예식이 뭡니까? 결혼을 공식화 하는 예식이지요. 결혼이 부부 관계를 맺는 행위나 결혼 생활 자체를 가리키는데 비해, 혼인은 법률 용어 또는 학술 용어로 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제도인 혼인은 사회가 인정하는 절차에 따라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부부가 되는 일입니다. 혼인을 통해 당사자들은 사회로부터 한 가정이라는 지위를 부여 받고, 남편과 아내로서의 신분들 얻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의무와 권리, 곧 사명을 얻게 되지요. 당사자들은 그렇게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가 된 자기 가족을 잘 지킴으로써 사회의 안정과 발전에 이바지 하게 됩니다. 또 혼인은 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에게 적자(嫡子)로서의 자격을 주고 또 부모에게 자식들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줍니다. 혼인 예식과 결혼 생활은 사실 전혀 다른 것이긴 합니다만, 결혼 생활에 약속된 모든 행복은 혼인예식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신비한 효과에 있어서 세례식도 결혼식처럼 하나의 약속이고 보증이며 또한 출발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한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의 표징을 세례라고 합니다. 이 세례는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것인데, 다음 두 가지 목적을 갖습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우리의 고백을 도우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례에 공통적인 것이지요. 이제 이 두 가지 목적에 대해 차례로 설명하려 합니다. 우선 세례는 우리 믿음에 다음 세가지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첫째, 세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문서에 찍는 도장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례에 쓰는 물 자체에 죄를 용서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례를 통해 용서의 은혜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받는 다는 것이지요.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벧전3:21)는 베드로의 말도 그런 뜻입니다(참조. 엡5:26; 딛3:5).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씻는다는 점에서 물과 비슷하기 때문에 세례식에서 피를 물로 대신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례는 그 용서하시는 은총이 영원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도장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세례 받은 다음 짓는 죄 때문에 그 세례가 무효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넘어질 때마다 과거에 받은 세례를 기억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격려해서,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피로 영원히 죄 씻음 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를 받은 후에도 세례가 우리의 믿음에 계속하여 주는 유익입니다. 둘째, 세례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거듭 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롬6:4-5).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산다는 것을 표 해준다는 것이지요(롬6:11). 바른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육욕이 소멸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들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느끼며, 또한 동시에 성령이 자신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어 주시는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기들 속에 역사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접붙임을 받고, 그 안에서 또한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흡수하여 새 생명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롬6:5). 그래서 성경은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함’(딛3:5)이라고 부릅니다. 셋째,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표식입니다. 이 약속이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뜨겁게 해줍니까! 마치 결혼 반지를 보면서 자기와 한 몸된 배우자를 생각하고 기뻐하는 것처럼, 세례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낮추시고 기꺼이 우리와 결혼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기뻐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없는 세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세례의 완성이고 또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간단히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행8:16;19:5). 세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런 간단한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세례를 주는 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모두 불러야 합니다. 우리의 중생과 깨끗하게 함에 있어서 아버지는 원인이시고, 아들은 질료이시며, 성령은 효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라는 엄청난 복을 표시합니다. 그러니 세례를 생각할 때마다 어찌 우리의 믿음이 새 힘을 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세례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세례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돕는다는 것이지요. 결혼식을 왜 하고, 결혼 반지를 왜 낍니까? 모든 사람들 앞에 이제 둘이 한 부부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공포하는 것 아닙니까? 세례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고 싶다는 우리의 소원을 모든 사람들 앞에 공포합니다. 또 세례를 통해 우리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같은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세례없이 신앙 생활 하겠다는 사람은 결혼식하지 않고 동거하겠다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꼭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오해들이 있을까요? 첫째, 세례를 단지 군인들의 계급장처럼, 우리가 신앙 고백하는데 사용하는 하나의 표징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쯔빙글리). 단순한 입문의식이나 서약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다른 성례의 경우에서처럼, 세례를 통해 말씀의 안내를 받고 성령의 조명을 받아 묵상의 계단을 걸어 오를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신비의 은혜에 도달하게 됩니다. 단순한 표지가 아니라, 믿음에 실제적인 유익을 주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지요. 둘째, 세례의 효력이 물 자체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 없지요. 물에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세례에 힘을 주는 것은 말씀의 약속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을 때 그 약속들이 능력으로 살아 역사하는 것입니다. 셋째, 세례 받은 다음에 짓는 죄는 그 세례의 힘으로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오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지않고 미룹니다.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아야 평생 지은 죄를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러나 세례는 영원한 용서를 보장해 주는 하나님의 도장과도 같습니다. 그 도장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위에 찍혔습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순결하여 그 효력이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피의 은총에 대한 약속입니다. 넷째, 세례 받은 다음에 짓는 죄는 회개와 열쇠의 힘으로 용서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의 고해성사가 바로 그런 오해에서 만들어낸 발명품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거듭되는 우리의 죄 때문에 괴롭고 실망될 때마다, 단호하게 이미 받은 우리의 세례를 기억하며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영원히 씻음 받았다는 확신을 다시 새롭게 해야 합니다. 다섯째,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가 다르다는 오해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주는 사람이 달라도 교훈이 같으면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요한의 교훈을 보십시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사도들이라고 해서 이 교훈에 한 자라도 더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크리소스톰은 요한의 세례에는 죄의 용서가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어거스틴 조차도 요한의 세례에서는 죄를 용서 받을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세례에서는 실제적으로 용서받는다고 말함으로써 그 두 세례를 미묘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없습니다. 누가의 증언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도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눅3:3).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요한은 장차 오실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사도들은 이미 나타나신 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입니다(눅3:16; 행19:4). 어떤 초대의 저술가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다시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요한의 세례는 준비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행19:2-7). 그러나 그것은 성경을 잘 못 읽은 것입니다. 바울의 그 세례는 성령세례를 의미하는데(참조. 행1:5; 11:16), 그러나 그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던 자들에게 처음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을 받았던 사도들에게 오순절에 다시 성령이 임했던 것처럼 이제 현저히 나타내 보이시는 은혜로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행2:1-4). 또 요한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세례의 종류를 구분한 것이 아니고, 자신과 예수님의 인격을 구분한 것입니다(마3:11; 눅3:16).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에서 강조했듯이 누가 세례를 주든지 간에 그것을 실제로 주재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은 구약의 세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스라엘도 홍해와 구름기둥 아래에서 모두 한 세례를 받은 것이지요(고전10:2; 출14:26-31; 민9:15). 그 사건들은 다 신약 세례의 원형들입니다. 여섯째 오해입니다. 어떤 엉터리 교사들은 마치 세례가 우리에게 모든 원죄와 본성의 부패까지도 다 사라지게 해주고,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있었던 순결한 본성을 회복시켜 준다고 가르칩니다. 저들 말처럼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하고 타락한 것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얻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일들’(갈5:19)입니다. 부패한 성품이 뜨거운 용광로의 불꽃처럼 끊이지 않고 쏟아내는 온갖 더러운 일들이지요. 세례식을 통해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원죄로 인한 죄책과 하나님의 저주와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시켜 준 사실을 확실히 약속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감옥’에 갇혀 사는 동안은 여전히 죄의 공격을 받아 계속 ‘육체의 일들’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식이 그것까지 자동으로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의 몸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계속 육체의 정욕 때문에 시달리고 쓰러지고 넘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롬8:1). 그리고 죄의 세력은 결코 다시 우리에게 지배적인 힘이 되지 못합니다. 세례의 목적은 바로 그런 육의 세력을 죽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 죄로 넘어지더라도 그 때마다 씩씩하게 일어나서 다시 싸우며 완전한 승리를 위해 전진해야 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내 정욕이 약간이라도 죽었으면 그것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믿고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세례를 집례하는 자가 불량하면 그 세례도 불량하다는 오해입니다. 재세례파가 그런 주장을 하지요. 교황제도 아래서 불경건한 우상숭배자들의 손에 의해 받은 세례는 다 취소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충분한 교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고 받은 세례는 나중에 다시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마 그런 식으로 해야 한다면 온 세상의 강물을 다 동원해도 성도들의 세례를 충당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누가 집례했건 세례식은 주님이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식은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부분적인 결점이 전체의 효력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세례 받을 처음에 깨달음이 부족하고 그래서 참 회개가 늦었더라도 나중에 그럴 수 있게 된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그 때 비로소 세례로 맺으셨던 약속의 은혜가 회복되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에 효과적으로 보증을 해주는 것이 세례라면 바른 세례식은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교황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전하여 준대로 가장 단순하고 거룩해야 할 세례식에 온갖 잡동사니를 다 덧붙였습니다. 주문과 촛불과 성유와 숨을 내 쉬는 행위(exufflation)등이 그런 것들이지요. 그러나 세례식은 주님이 보여주신 것만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목사는 세례 받을 자를 교회 온 회중 앞에 소개하고, 회중은 증인이 되어 그를 주목하며 위하여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그가 배웠어야 할 신앙고백서를 읽어 주고, 세례가 의미하는 약속들을 선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그 다음 그를 위해 기도하고 감사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려 보냅니다. 세례 받는 자를 물에 완전히 잠그느냐, 세 번이냐 한번이냐, 또는 물을 뿌리기만 하느냐 붓느냐 하는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잠근다’(baptize)는 말 뜻처럼 침례를 행한 것이 분명하지만, 물에 푹 잠그든 머리에 뿌리든 그것은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정할 일입니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을 집례하는 일은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맡기신 일입니다. 마치 세례를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해서 평신도들에게 ‘비상 세례’란 것을 허락하는 데 이것은 매우 잘 못된 것입니다. 또한 카르타고 회의(AD.397년)의 결정처럼 여자들은 성찬식이나 세례식을 집례할 수 없습니다. 터툴리안이나 에피파니우스도 그 점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여자가 남자의 직책을 요구하거나 더욱이 사제의 직분을 요구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아무튼 ‘피치 못할 사정’을 들어 주님이 주신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세례를 주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세례 자체에 구원하는 힘이나 용서하는 효험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그런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주의 약속의 말씀들을 믿으면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혼인 예식이 곧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바로 거기서 출발하지요. 결혼식 없이 부부처럼 살겠다거나, 또 결혼식을 자꾸 되풀이 하는 것이나 모두 비정상이 아닙니까? 세례식은 예수님과 우리의 혼인 예식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 된 새롭고 신비한 삶이 출발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결혼식이 총각 처녀의 신분을 유부남 유부녀로 바꿔주듯 세례는 신분을 바꾸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 영접하고 예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신분의 놀라운 변화를 확인하고 공포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실제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고 하나님의 저주에서 해방하고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신분을 완전히 바꾸어 줍니다. 천국 시민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지요. 이 신분의 변화는 쌍놈이 양반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신분 상승입니다. 잠시 후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 속에 살아야 할 처지에서 영생 복락의 나라 천국을 마음껏 즐기며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처지로 바뀝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죄와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를 필연적으로 끼고 살아야 했던 비참한 운명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어 성령의 위로와 격려와 돌보심을 받으며,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 수 있는 황홀한 운명이 됩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총각 처녀의 사명을 바꿔주듯 세례 또한 우리의 사명을 바꿔줍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도 이 점이 결려서 머뭇거렸습니다만, 곧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을 확인하는 것임을 알고 기쁘게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죄가 없는 예수님이 죄인들의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실 사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는 것입니다. 곧 죄인들을 위하여 대신 고난 당하시고 죽임 당하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늘을 찢고 외치신 아버지의 음성이 그 모든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사명 감당을 위해 성령을 부음 받습니다. 성령이 비들기 같이 예수님께 임하십니다. 전투를 위한 무장을 하신 것이지요. 복음 행진을 위해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 날 세례는 예수님의 신분과 사명에 완전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날 부터 예수님은 이전의 나사렛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우리가 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감을 잡으시겠지요? 세례는 우리의 신분을 바꾸기 위한 것입니다. 또 세례는 우리의 사명을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례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벌레같은 죄인에서 천국의 시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세례를 받았다면 사명을 바꾼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세상의 종 노릇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받은 말씀대로 지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례가 주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빼앗기지 말고 주안에서 새로운 신분 새로운 사명으로 날마다 복음의 행진을 계속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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