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닉 부이치치가 발가락 두 개로 특수전동휠체어를 조종해 산책을 하고 있다. / photo 사랑나눔재단
유명 연예인, 고위공무원, 대기업 부사장, 전직 대통령, 유명 여배우, 재벌가문의 딸….
최근 몇 년 사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평범한 보통 사람의 눈에는 모든 걸 갖추고 있었다. 속된 표현을 쓰면, 적어도 먹고살 걱정이 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함으로써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이들이 스물여덟 살 호주 청년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한 번만이라도 들었더라면 과연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 청년은 닉 부이치치(Nick Vujicic·28)다. 부이치치라는 성(姓)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의 부모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호주로 이민 온 사람이다.
“단 한 명이라도 용기를 얻는다면…”
닉 부이치치가 지난 2월 21일~3월 1일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국은 부이치치가 29번째로 방문하는 국가였다. 닉 부이치치의 한국 방문은 사랑나눔재단 박종옥 이사장의 초청으로 이뤄졌다. 부이치치는 한국 체류 기간 중 서울, 부산, 대구, 수원, 분당 등의 여러 교회를 돌며 강연과 함께 신앙 간증을 했다. 부이치치는 2월 말 부산 호산나교회에서 강연을 했다. 부이치치는 활달한 얼굴로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보고 삶에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해 큰 호응을 받았다.
“혼자 있을 때 불행한 사람은 결혼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나 자신도 항상 행복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통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날 강연에는 닉 부이치치를 알고 있는 비(非)기독교인도 많이 참석했다. 이 강연을 들은 초등학생 강민혁군은 기독교선교전문 케이블 채널 CGNTV와의 인터뷰에서 “범사(凡事)에 감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목사 부부에게 찾아온 불행
부이치치는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부이치치의 아버지는 멜버른 지역 교회의 목사였고 어머니 역시 크리스천이었다. 첫아이를 임신한 이후 부부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머니는 간호사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임신 중의 수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 수칙을 잘 지켰다. 부부는 첫아이가 ‘잘생긴 아들’이길 간절히 원했다. 산부인과 주치의는 세 번의 초음파 검사를 통해 아이가 건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1982년 12월 4일 멜버른의 한 주택가. 독실한 기독교인 부부에게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이 덮쳤다. 산모의 몸속에서 나온 아이는 팔다리가 없었다. 왼발에 발가락 두 개가 달린 ‘작은 다리’가 전부였다. 희귀병인 테트라 아멜리아 이상(tetra-amelia disorder·해표지증·海豹脂症·바다표범의 물갈퀴처럼 팔다리가 짧은 증상)이었다. 부부는 출산 전 의사로부터 그 어떤 경고도 듣지 못했다. 아이를 본 의사 역시 큰 충격에 빠져 입을 열지 못했다. 초음파 검사에서 팔다리가 안 보였지만 몸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의사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와 마을 전체가 ‘사지 없이 태어난 아이’를 애통해했고 부모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부부는 신에게 물었다.
“왜 이 같은 일이 일어나게 했고 또 왜 이를 감당하게 하셨습니까?”
부부는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부친은 아들이 오래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병원 검사 결과는 매우 건강하다고 나왔다. 부부는 걱정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아나갈지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대체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는 처음에는 부인하는 단계를 거쳤다. “현실이 아닐 거야, 이건 악몽이야”라고 되뇌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 캄보디아를 방문한 부이치치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부부가 ‘사지 없는 아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부부는 눈물과 슬픔과 의문의 나날을 보냈다. 부부는 수년 동안 하나님에게 힘과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다. 부모의 극진한 사랑 속에서 소년은 구김살 없이 성장했다. 소년은 자신이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치원에 갔을 때부터 소년은 현실의 벽에 충격을 받았다.
“너도 보통 아이들과 똑같아”
부부는 아들을 보통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빅토리아주 주법(州法)은 신체 장애가 있는 아이가 보통학교에 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이치치는 여느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입학했다. 부이치치가 학교에 다니면서 이 주법은 개정되었다. 부이치치는 처음 학교에 갔을 때의 일을 자신의 홈페이지(www.lifewithoutlimbs.org)에 이렇게 고백했다.
“학교 생활은 정말 즐거웠다.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학교 생활 초반, 나는 나의 신체적인 차이로 인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거부되고 괴기하다고 여겨지고 따돌림을 당해 불편했고 이를 견뎌야 했다. 적응이 너무 힘들었다. 나는 부모님의 지지로 이런 도전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태도와 가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분명 나는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모든 부정적 관심을 회피하기 위해 학교를 결석할 때도 많았다.”
8살, 자살을 시도하다
부이치치는 8살 때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부이치치는 어머니에게 “죽고 싶다”고 얘기했다. “내가 내 인생을 바꿀 수가 없고 또 그 문제로 낙심하고 화가 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부이치치는 하나님께 자신의 팔과 다리가 자라게 해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다. 결국 10살 때 욕조에 올라가 그 안으로 떨어질 생각을 했다. 부이치치는 자살을 생각했던 어린 시절과 관련, 자신의 DVD ‘사지 없는 것에서 한계 없는 데까지(From No limbs, To No Limits)’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변 사람에게 짐이 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나는 내가 모든 걸 빨리 버리면 버릴수록 모든 사람에게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고통과 삶을 끝내길 원했다. 그러나 고맙게도 부모와 내 가족은 나를 위로했고 힘을 주었다.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신이 얼마나 나를 축복하시는지를 깨달았다. 내 부모님을 주신 신께 감사한다.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나는 오래전에 포기했을 것이다. 특히 학교가 그랬다. 모두가 날 놀렸으니까.”
부이치치는 부산 호산나교회 강연에서 자살을 기도하다 포기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욕조 위에 올라가서 세 번째 시도할 때 어떤 강한 힘이 나를 구원했다. 부모님이 나를 굉장히 사랑한다. 내가 자살했을 때 평생 당해야 할 부모의 고통을 생각하니 자살을 할 수 없었다. 부모에게 죄책감을 남겨두고 떠나지 않기 위해 자살을 포기했다. 그래서 오늘까지 살아있다.”
부이치치의 DVD를 보면 얼굴에서 변화가 두드러진다. 학교에 가기 전 그는 여느 아이들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 그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진다. 그늘이 깊게 새겨져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충만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부이치치의 육성을 들어본다.
“자신감을 키우는 것은 긴 여정이었다. 나는 성격을 만들어갔다. 부모님과 함께 하루에 조금씩 예수님께 다가갔다. 그러면서 인생을 바꿔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언변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 회장에 당선되었고, 고등학교 때는 부회장을 했다.”
골프·수영·축구… 만능 스포츠맨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 9장과 어머니가 보여준 한 신문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요한복음 9장은 맹인으로 태어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왜 이 사람은 장님이죠’라는 질문에 예수는 “하나님의 뜻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라고 답한다. 신문기사는 심각한 장애를 딛고 사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부이치치는 비로소 어려움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5살 때 부이치치는 자신의 생명을 예수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 집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 부이치치.
“그때 나는 나의 목적을 깨달았다. 신은 이제까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방법으로 나를 사용하고 있다. 신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며 살도록 격려하고 고무하기 위해, 그들의 희망과 꿈을 이루도록 하려는 데 나를 사용하려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다리, 내가 ‘작은 닭 뼈(my little chicken bone)’라고 이름 지은 내 다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부이치치는 왼쪽 발의 발가락 두 개를 사용하는 법을 배웠고 또한 ‘발뒤꿈치와 발가락’을 이용해 컴퓨터를 사용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법을 배웠다. 부이치치는 일상 생활에서 혼자서 머리를 빗고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고 물을 컵에 떠서 마신다. 테니스 공을 던질 줄 알고 골프 퍼팅을 하고 수영을 하고 낚시도 하고 축구도 한다. 전자 드럼도 칠 줄 안다. 전자 드럼은 수준급이다.
17살이 되었을 때 부이치치는 기도 모임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훗날 비영리단체 ‘라이프 위다웃 림(Life Without Limb·사지 없는 삶)’으로 발전하게 된다. 부이치치는 21살에 복수 전공으로 재정학과 회계학 학사를 받았다. 이후 ‘동기부여 강사’ ‘희망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부이치치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주제는 10대들의 문제. 이와 함께 기업에서도 그를 강사로 초청한다. 부이치치는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구분 없이 국제적인 희망전도사가 된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사지 없는 삶’ 대표로 그는 정기적으로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종교모임, 학교, 기업에 가서 연설을 한다.
25살, 경제적 독립을 꿈꾸다
부이치치는 가는 곳마다 어린이들로부터 수많은 유사한 질문을 받는다. 모두가 ‘사지 없는 몸’에 관한 질문들이다. 부이치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꼬마는 ‘어떻게 구두끈을 매나요?’라고 묻고, 또 몇몇 꼬마들은 용감하게도 내 소매를 올려다보고는 ‘팔은 어디에다 감췄나요’라고 물었다. 내 조카의 경우 간호학을 공부하고 있다. 조카는 마침 혈압과 관련된 것을 공부하고 있었다. 조카는 손을 들어 교수에게 질문했다. ‘팔이 없는 사람은 혈압을 어떻게 재야 하나?’ 강사는 ‘그럴 경우 다리를 통해 혈압을 잰다’고 대답했다. 조카가 다시 물었다. ‘양 다리가 다 없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 순간 강사는 무시를 당했다고 느꼈고 화를 버럭 내면서 조카를 강의실에서 쫓아냈다. 나는 나중에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그걸 알았다. 의사들은 내가 정말 혈압 측정이 필요하면 내 심장에 혈압기를 대고 혈압을 잰다는 것을. 그 다음부터 나는 혈압 재는 문제에 허둥대지 않는다.”
부이치치는 3년 전 25살이 되었을 때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원했다. 부이치치는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해 자신의 말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부이치치가 처음으로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온 것은 2008년 3월 28일 미국 ABC방송 밥 커밍스의 ‘20/20 쇼’였다. 이어 부이치치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했다. 그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신이 직접 운전할 수 있도록 개조한 자동차를 갖고 싶다고 밝혔다. 부이치치는 또한 자신의 삶과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목표를 세워 마침내 2009년 말 완성했다. 책 제목은 ‘노 암스, 노 레그스, 노 워리스(No Arms, No Legs, No Worries)’. 국내에서는 아직 번역 출간되지 않았다.
‘사지 없는 삶’은 2005년 그의 삶과 연설을 DVD로 제작해 현재 전세계에서 판매하고 있다. 이 DVD는 4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집안에서 부이치치가 생활하는 모습을 10여분짜리의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팔과 다리가 없는 그가 어떻게 혼자서 일상생활을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두 번째 파트는 부이치치가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강연하고 현지인들과 만나는 장면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다. 부이치치는 강연이 끝나면 원하는 청중과 스킨십을 하는 시간을 갖는다. 청중은 모두 양팔이 없는 그를 짧은 순간 깊게 포옹한다. 그와 포옹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녀노소 관계 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그를 포옹한 어린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감격해 한다.
▲ 지난 2월 한국을 방문해 강연 중인 부이치치.
부이치치는 단편영화 ‘버터플라이 서커스’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미국 메소드 필름페스티벌에서 최우수 단편영화상을 수상했고, 그는 최우수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살률 1위’ 한국인에 전하는 메시지
닉 부이치치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2008년 MBC 교양프로그램 ‘W’를 통해서였다. 현재 부이치치는 호주에서 거주지를 옮겨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부이치치는 미국에서 ‘Life without limbs’라는 비영리법인을 설립하고 4대륙 12개국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희망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이번 한국 방문을 성사시킨 사랑나눔재단 박종옥 이사장은 부이치치를 2005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처음 만났다. 박 이사장은 오렌지카운티 자유복음교회에 강사로 초대된 부이치치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사랑나눔재단은 지구촌에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199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 등록된 비영리단체. 박 이사장은 2006년 사랑나눔재단을 우리나라에도 발족시켰다. 박 이사장은 2008년부터 부이치치를 한국에 초청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왔고 2년 만에 그 결실을 이뤘다. 박 이사장은 “닉 부이치치가 보여준 희망의 스토리는 희망과 꿈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행복의 메시지”라고 말한다. 사랑나눔재단은 ‘스페셜 미(Special Me)’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스페셜 미’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생명존중 캠페인이다. 닉 부이치치 한국 초청도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현실에서 ‘스페셜 미’ 캠페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부이치치는 DVD 다큐멘터리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장애의 더 큰 목적을 찾았다. 팔다리가 없는 나를 본 사람들은 신의 은혜를 받으면 어떤 환경이나 어려움도 다 극복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역경이 아무리 크더라도 주님은 더 크신 존재이며 가장 어려운 때라도 그만한 목적이 있고 모든 일이 좋은 쪽으로 해결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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